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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I Oct 11. 2024

7. 허영의 끝

보이는 삶에 집착한 여자의 최후

7. 허영의 끝


영민의 부모님은 영민이 의사가 되길 원했지만, 영민은 연구하는 게 더 좋았기에 외국계 제약회사의 상품개발팀에 입사했다. 영민이 주리와 만난 것은 2003년쯤이었다.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그녀는 영민의 회사 총무부 신입사원이었다.

혼기가 꽉 찬 나이에도 여자 앞에서 주변머리가 없던 영민에게 총무부에 있는 같은 대학 동기가 다리를 놓아준 덕분에 두 사람은 만났다. 차분하고 얌전한 주리는 한눈에도 예쁘게 생긴 미인형에 집 안도 부유하고 좋았기에 영민은 그녀에게 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살고 있는데, 어머님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사립대에서 강의하고, 아버지는 미국 5대 투자 자문사 중 하나인 뱅크 인의 멜버른 본사에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영민은 생애 처음으로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나서며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했다. 주리도 성실하고 착한 영민이 무척 맘에 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만난 지 8개월 만에 결혼했다.     

주리가 부유하게 자랐다고 들었기는 했지만, 그녀의 재력은 두 사람의 결혼식에서부터 남달랐다. 당시 5성급 호텔의 식장 대여료만도 6천만 원 이상에 생화 장식과 식사 비용까지 합하면 총 1억 가까이 비용이 들었는데, 두 사람은 그런 곳에서 결혼식을 한 것이다.

결혼식에 온 사람들은 두 사람의 집 안이 다 어마어마하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영민의 집안은 그렇게 어마한 부자는 아니었고, 아버지가 조그만 법인회사를 운영하시는 정도였기에 이런 거창한 결혼식보다는 소박한 결혼식을 하길 바랐다. 하지만, 주리의 말로 친정아버지가 외동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미안함에 예식비용과 신혼집까지 선물하는 것이라며 강행하니, 영민과 그의 부모님은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주리의 친정과 주리의 능력은 이뿐이 아니었다. 주리는 남편의 기를 살려 준다며 일 년에 두 번씩 차를 바꿔주었다. 결혼하고 장모님이 선물했다며 받은 BMW가 적응될 때쯤, 선물이라며 아우디를 또 보낸 주리의 친정 부모님 덕에 영민은 회사 사람들과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화려한 결혼과 통 큰 처가댁 부모님, 그리고 무엇보다 미인에다가 능력자 부모님을 두고도 전혀 거만하지 않고, 오히려 남편을 존중하고 시댁에 잘하는 주리를 아내로 둔 것이 영민도 너무 자랑스럽고 행복했다.     

어느덧 두 사람이 결혼한 지도 10년이 지났고 영민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덟 살, 다섯 살의 두 아들도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있었고, 첫 아이를 낳고 산후 우울증에 부동산업을 시작한 아내도 여전히 아름답고 성실했다.




제작 년부터는 부모님의 일산 전원주택을 팔고 부천 중동의 고급 빌라를 싸게 매입해서 부모님도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부모님이 가까이 사시면서 주리는 더 자주 부모님 댁에 방문했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인심 좋고 착한 며느리라는 말을 들으면서 영민의 부모님에게도 자랑거리가 되었다.

두 부부에게는 항상 사람이 따랐고, 부부의 재력과 좋은 성격에 투자금이나 부동산 계약을 맡기는 등 그녀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더욱이 최근에는 아내가 부천 중동에 고급 주상복합 오피스텔 건물을 세울 계획으로 투자자들을 유치하는데, 영민도 영민의 친구들도, 영민의 부모님도, 부모님 지인들도 모두 그곳에 투자할 정도로 모두 그녀를 믿고 인정했다. 주리는 최근 몇 달 그 일로 많이, 바쁘고 힘든지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영민은 그런 주리를 걱정해서 퇴근하면 일찍 집에 와서 집안일이며 아이들 돌보기에 더 신경을 썼다. 어느 주말 투자자를 만나러 나간다는 아내는 현관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섰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주리의 애정 표현에 쪼르르 달려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여보! 고마웠어! 내가 당신 사랑한 건 정말 진심인 거 알지?”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하하하···. 늦지 않을 거지?”     


주리는 영민의 눈을 바라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집을 나선 주리는 오늘로 벌써 일주일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첫날엔 ‘오가다 사고라도 났나?’ ‘사기꾼 녀석들을 만나서 납치라도 당한 건 아닐까?’하는 걱정에 경찰서를 찾아가서 신고도 했다. 경찰은 신고는 받아 주겠다면서도 단순 가출일 수도 있으니까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삼일, 사일···. 영민은 이제 걱정을 넘어서 ‘아내가 혹시 바람이라도 난 게 아닐까?’ ‘이곳 생활이 힘들어서 미국 부모님께 갔나?’ ‘내가 버림받은 건 아닐까?’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아내가 집을 나간 지 일주일째 되는 날, 경찰서에서 아내를 찾았다고 연락이 왔다.     


“이 주리 씨 찾았습니다.”     


그 말에 영민은 며칠간 했던 이런저런 걱정과 고민과 원망들, 그저 왜 며칠씩이나 집에 안 들어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지! 생각했다. 주리의 건강은 괜찮은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게 중요했다. 영민이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으려는 순간 경찰이 말했다.    

 

“그런데, 이 주리 씨 사망하셨습니다. 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동반자살을 하신 것 같습니다.”     

     

‘자살? 그것도 동반자살? 왜? 누구랑?’     


영민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멀쩡하던 아내가 자살했다는 것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일인데, 누구와 함께 죽었다니, 그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영민은 다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주리의 부검이 진행되면서 그녀가 동반 자살사이트에 가입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강원도의 한 여관에서 네 명의 남녀가 함께 손발을 묶고 번개탄과 연탄을 피웠다. 그중 한 명이 영민의 아내 주리였다. 죽은 이들의 옆엔 유서가 놓여있었는데, 주리의 유서에는 딱 세 글자만 적혀있었다.     


‘미안해!’     


영민은 믿을 수도 없었고, 믿어지지도 않았다. 무엇이 주리를 자살하게 만들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주리가 남긴 ‘미안해!’ 세 글자의 의미를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리는 가난한 시골의 노부부에게 태어난 막내딸이었다. 그녀는 비록 가난했지만, 막내로서 부모님의 사랑과 애정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부모를 졸라 명품 옷과 신발로 자신을 치장했고, 친구들에게 자기는 몸이 아파서 요양하러 이 시골로 내려와 있다고 말했다. 스무 살이 되면서 형편상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꾸던 주리는 밤에는 유흥주점에 다니고, 낮에는 대학교 캠퍼스와 강의실을 다니면서 대학생처럼 생활했다. 학적부에 이름도 없는 그녀가 강의는 누구보다 열심히 듣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어느 날 전공 수업 때 출석부에 이름이 없어서 강의실에서 쫓겨났어도 아무도 주리가 그 학교 학생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녀는 외국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유학 온 유학생으로 친구들에게 알려졌고, 늘 씀씀이도 크고, 옷이며 가방이며 대학생이 가지고 다니기엔 비싼 명품들로 휘감고 다녔다.   

   

그렇게 그녀는 회사에도 거짓 학위증으로 입사했고, 회사에서도 늘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느 정도 부자인지, 좋은 사람인지 보여주려 애를 썼다. 주리는 영민과 함께 살면서는 자신뿐 아니라 영민과 영민의 부모와 아이들까지도 잘난 사람을 만들어야만 했다. 고급 빌라와 고급 차 좋은 옷과 최고의 교육까지 주리는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가 한 선택은 부동산 사기였다. 부모님의 집을 팔아 그 돈으로 자신과 가족을 치장하고, 부모님의 집은 한 달에 오백만 원씩 월세를 냈다. 월세는 영민과 주리가 사는 집도 매한가지였다. 미국에 살고 있는 아버지가 해 주셨다는 그 집 역시 월 오백오십만 원짜리 월세 집이었다. 거기에 좋은 집을 싸게 사 주겠다며 회사 사람들에게 받은 돈도 몇 개월 치 월세만 내놓고는 다 자기와 식구들을 꾸미는 데 탕진했다. 주리는 그렇게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평생 거짓으로 삶을 살면서 여기저기서 돈을 가져다 쓰고, 저기서 돈을 빌리고 심지어 가족이고, 친구고 모두에게 사기를 치며 돈을 써댔던 것이었다.        

            

주리가 죽었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영민에게 찾아와서 돈 얘기를 꺼냈다. 주리가 출퇴근하던 부동산으로 쓰던 사무실의 관리실에서도 월세 독촉 전화가 왔다. 찾아간 주리의 사무실에는 각종 체납 독촉장과 다른 사람들의 집을 담보로 사채를 쓴 서류, 그리고 영민이 지금 타고 있는 차와 그간 수시로 바꿨던 차들의 임대료 체납 등···. 셀 수도 없는 체납고지서들이 쌓여 있었다.

그간 영민이 먹고 마시고 입고 타고 자던 모든 것들이 다 이 사무실에서 체납고지서로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민은 이 기가 막힌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주리가 저지르고 간 모든 것이 영민에게 으로 남게 될 판이었다. 영민은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이들과 또 부모님까지 책임을 지려면 영민이 정신을 차려야 했다. 영민은 자신도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사람들은 그 돈으로 누리고 살았으니, 공범이라며 책임을 지라고 했다. 하지만, 영민은 자신이 가장 큰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영민은 우선 부모님과 자기의 집을 먼저 비워줘야 했다. 아직 피해 규모나 피해자에 대해선 경찰에서 조사 중이기에, 멀리 이사 갈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런 중 영민은 주리의 장례를 치르면서 그녀의 부모를 처음으로 만났다. 주리의 부모는 주리가 결혼해서 10년을 사는 동안, 그녀가 결혼했는지, 애를 낳아 이렇게 큰 손주들이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 장례식에 오게 된 주리의 부모님은 자신의 딸이 죽고, 손주들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혀 한동안 영민과 주리의 자식들인 리율과 리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꽤 늦은 시간에 리율과 리엘 형제의 집에 찾아갔을 때 아이들 아빠인 영민은 직접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두 분이 이삿짐을 박스에 직접 넣고 계셨고, 할머니는 버릴 짐을 골라내고 계셨다. 늦은 시간이라 리율과 리엘은 방에서 자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학습지 회사를 그만두고, 저녁 늦게 이 집에 간 이유는 아이들의 엄마가 석 달째 보내준다고 말만 했던 형제의 학습비를 받기 위해서였다.

낮에는 늘 집이 비어 있고, 전화 연락은 되지 않았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밤늦은 시간을 선택해서 찾아다.

그 학습비 얼마나 된다고 밤에 남의 집을 갔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급여가 한 달 치 그대로 묶여 버리게 될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당장 한 달을 살아야 하는 내게는 꼭 받아야만 하는 돈이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럼, 진작 챙기거나 그만두게 하고 수업을 가지 말았어야지! 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 사실 앞에선 할 말이 없다. 보이는 것만 믿었기에 그렇게 부잣집에서 학습비 정도를 떼어먹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곧 주겠다는 말만 덥석 믿었던 것 같다.          

좋은 집에 사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부모, 수업 중엔 항상 아이들과 선생님께 고급스러운 간식도 챙겨주고, 항상 반듯하고 깔끔한 아이들 엄마! 나는 이 집의 안주인인 주리를 부러워했었다. 나도 이런 집에서 아들의 선생님과 아들의 공부방에 간식을 들고 들어가서 요즘 우리 아들이 잘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그런 엄마였으면···. 하고 상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저 눈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판단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부자인 그녀를 부러워한 나 자신의 생각도 속물근성 아니겠는가!

나는 한 달 교육비 자동이체 되지 않았어서 아이들 엄마인 주리에게 안내했고, 그때 그녀가 한 말을 그대로 믿었다.

    

“어머! 선생님! 그랬어요? 세상에, 그 통장 푼 돈 나가는 데라서, 미쳐 신경 못 썼네요. 이달에 오피스텔 사업 때문에 돈이 좀 돌아야 해서 담 달에 이달 분까지 꼭 넣어둘게요. 죄송해요. 얼마 되지도 않는 돈 가지고 걱정시켜 드렸네요.”

    

다른 곳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 학습지 시스템이, 방문교사는 직원이 아니라 계약직이라서 아이들의 학습비가 두 달 입금이 안 되면 교사의 월급에서 자동 출금이 다. 아마도, 그 옛날엔 자동이체보다는 선생님들 직접 수금이 많았고, 그 수금이 회사로 다 입금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시스템이 된 게 아닐까 생각된다.(결국 아이들과 수업을 한 학습 회비는 끝까지 내가 받아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아무튼, 워낙 잘 사는 집이니까 애들 회비 정도야 떼어먹을 일이 있겠어? 싶은 생각에 아이들 회비를 내 돈으로 먼저 입금했다. 그런데, 두 번째 달에 또 입금이 안 됐기에 수업이 끝나고 얘기했더니,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 제가 하루에도 몇억씩 돌리다 보니까, 몇십만 원 정도는 자꾸 까먹네요. 진짜 죄송해요.”    

 

그러면서 안방에 가서 뭘 뒤지더니 가방을 하나 가지고 와서 말했다.  

  

“선생님! 이거는 제가 쓰려고 산 거긴 한데, 한 번도 안 썼어요. 가방이 생각보다 크더라고요. 바꾸려다가 선생님 가방 보니까 드려야겠다. 싶어 드리는 거예요.”     


나는 3년간 주야장천 메고 다니며 나와 함께한 너덜너덜해진 나의 갈색 백 팩을 보았다. ‘그간 너도 고생이 많았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죽이 헐어서 축 늘어진 내 가방을 슬쩍 끌어당겨 내 뒤로 숨겼다. 3년을 하루도 안 빼고 열심히 들고 다니던 가방이었는데, 낡을 때도 됐지! 하지만, 가방명품 이런 걸 잘 모르는 내게도 그녀가 내민 가방은 수업하러 들고 다니기엔 너무 비싼 고급 가방 같았다.    



“아닙니다. 어머님! 이 가방이 편해서 들고 다니는 거예요. 낡긴 했는데, 익숙해서요. 선물은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엔 꼭 부탁드립니다.”

“에이~ 부담 안 가지셔도 되는데···.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서 드세요.”    

 

하더니, 고급 수제 과자를 덥석 안겨주었다.     


“항상 우리 애들한테 잘해 주시니까 늘 뭔가 드리고 싶었는데, 이것도 안 받아 주시면, 제가 섭섭해요.”  

   

나는 어쩔 수 없이 과자가 든 쇼핑백을 받아 들고 나왔다. 정말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다고 생각하면서···.     



사실 처음 방문교사 교육을 가면 꼭 명품이 아니라고 해도 옷도 신발도 엄마들은 보고 있으니, 너무 싸구려에 허름하고 지저분한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땐 누가 그런 걸 보나 싶었는데, '엄마들이 생각보다 선생님에게 관심이 많구나! 내 가방은 언제 봤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내 가방이 좀 힘들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 달을 밀리고,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바람에 석 달째 학습비를 받지 못하면 내 마지막 급여에서 빠져나가게 되니까 팀장에게 전화가 온 것이었다. 지금이야 자동이체와 현금 이체가 너무 잘 되어있지만, 그때만 해도 현금 이체를 하려면 은행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이체보다 직접 받으러 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인사도 할 겸 갔었는데, 야밤에 이사하는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아이들 아빠인 영민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나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며 세상이 진짜 요지경이구나! 싶었다. 그렇게 품위 있어 보이던 주리가 자기의 허영을 채우기 위해 사는 사기꾼이었다니···. 나는 무엇보다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아이들은 엄마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수백억 가까이 되는 그 많은 빚 때문에 아이들의 앞날은 어떻게 달라질 것이란 말인가?

자신의 허영심에 일을 저질러 놓고, 해결할 수 없으니, 자살을 선택한 그녀를 아이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특히, 부자인 줄 알고 좋아서 결혼하고 사채까지 끌어다 유지하는 것들 인지도 모르고 좋다고 쓰고 먹고 입은 자기도 잘한 게 없다면서 최대한 피해보신 분들에게 평생 값아 나가겠다며 내게도 조금 기다려달랬다. 말이라도 책임을 느끼며 자책하는 영민을 보니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돈을 받았냐고?

받을 수 있었겠냐고···. 나보다 더 많이 떼이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영민이네 조부모님들은 집까지 빼앗긴 상황인데 말이야! 그렇게 나의 마지막 월급은 그녀의 허영을 부러워한 비용으로, 아니, 삼백만 원짜리 고급 수제 과자를 산 셈 치자! 가 되어 버렸다.

다음, 내게 인수인계를 받은 선생님을 통해 들었는데, 텅 빈 집 앞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울 문을 두드리고 난리가 나서 관리실에서 그 빌라 입구의 통제 하게 한다고 했다.

과연 영민 씨는 어디로 간 것일까? 살기 위해 간 것일 테니까, 부디, 한때는 아이들의 엄마였던 주리 씨의 일은 잊고 아이들과 상처와 아픔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서길 간절히 바라본다. 또한 그 당 피해를 보신 분들에게 어떻게라도 책임을 지겠다고 한 영민 씨의 다짐이 얼마라도 지켜져서 모두가 마음에 평온을 찾기를 기도해 본다.



작가의 말     

때때로 사람들은 너무 타인에게 보이는 데 신경을 쓰고 살기도 합니다.

요즘엔 SNS로 보이는 삶이 있어 더하면 더 했지 덜 한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나만 이렇게 후줄근하게 사는 것 같고, 나만 힘든 것 같다고 느끼기 해요.

하지만,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내가 지금 누구와 행복한지 그게 중요하지요.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할 것 같아요. 기준을 내 안에 두고 내 능력껏 나를 격려하고 챙기면서 살다 보면 내가 아무리 아무것도 아니라도 어느 순간에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남의 눈이 아니라 내 눈을 통해서 세상을 사는 현명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남들을 평가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요.

세상은 내가 존재하기에 함께하는 게 아닐까요?     


그럼,

다음 8화 감사의 다육이

노인 고독사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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