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끈질긴 사랑
올해도 어김없이 시골에서 엄마가 김장김치를 택배로 보냈다. 김치 상자를 열어보니 빨간 김치가 맛있게 알싸한 냄새를 풍긴다. 김치국물을 닦아가며 차곡차곡 김치통에 김치를 넣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해마다 김치를 큰 상자로 두 상자나 보내왔다. 그럴 때마다 좁은 냉장고에 넣느라 애를 먹었다. 제발 그냥 사먹겠으니 김치를 보내지 말라고 몇 년을 씨름하다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좁은 집에 김치냉장고를 들였다.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김치를 몇 백 포기 담는 엄마가 더 힘들 것이다. 나는 정리만 하면 되는 것인데도 김치 없어도 된다며 온갖 짜증을 부렸다. 해마다 김치상자가 골칫덩어리가 되어 김치 맛이 어떤지도 몰랐다.
그런데 올해는 김치가 딱 한 상자다. 처음이다. 정말 한 상자만 보내준 것이……. 막상 줄어든 김치를 보니 이젠 엄마도 기력이 많이 약해지셨구나 싶다. 숨이 죽은 배추김치 위로 엄마의 주름진 손이 겹쳐 보인다. 젊어서 미인 소리를 듣던 엄마의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파여있다. 일요일도 없이 매일 미용실에 나가면서도 자식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김치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직접 담고 늘 아침저녁으로 밥을 해주었다.
남의 집에서 월세를 사는 형편이었지만 나는 4년제 대학에 보내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공부한다고 집에 몇 푼 보태는 것도 아까워했던 나였다. 다른 집은 편하게 용돈 받아가면서 공부하는데 왜 나는 집에 돈을 보태주면서 공부해야 하냐고 불만을 쏟아냈다. 내가 쓰지도 않은 카드빚 때문에 카드회사 직원이 집으로 찾아왔던 그날도 엄마는 어김없이 김치를 꺼내 밥을 차려주었다. 꿈을 포기하고 부모님의 힘든 삶을 지켜보는 것이 버거웠다. 엄마와의 잦은 다툼으로 추운 날 따듯하게 해 주고 배고플 때 배부르게 해 준 큰 사랑을 보지 못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매운맛이 사라지고 잘 숙성된 김치처럼 엄마도 나도 늙어가고 있다. 엄마가 김장김치를 보내주면 왜 시키지도 않는 일을 하느냐며 얼마나 화를 냈던가. 엄마의 주름과 아픈 몸은 어쩌면 나 때문 인지도 모른다. 김치냉장고를 다시 사라고 엄마가 보내준 돈을 급한 일이 있어 다른데 썼다. 엄마의 김치를 오래오래 아껴먹기 위해 적금을 타면 김치 냉장고를 살 계획이다. 요즘은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고 계란프라이를 부쳐서 꼭 점심을 먹는다. 엄마의 김치는 전라도 특유의 시원함과 감칠맛이 있어서 특별하다. 마흔이 넘어서야 엄마의 김치맛을 제대로 음미한다. 남편도 아이들도 김치맛을 보자마자 탄성을 지른다.
엄마에게 용돈을 보내고 김치가 맛있다고 전화를 했다.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환상적인 맛. 왜 이제야 그 맛을 안 것일까? 엄마는 그런 사랑을 나에게 준 것이다. 김치가 맛있다는 그 한 마디를 듣기 위해서 노년에도 아픈 몸을 뒤로 하고 부지런히 움직였을 것이다. 바빠서 점심을 샌드위치로 때울까 하다가도 엄마의 김치를 생각하면 저절로 밥을 퍼서 밥다운 밥을 차려 먹게 된다. 엄마의 김치가 없어질 때까지 두고두고 생으로도 먹고 지져도 먹고 볶아도 먹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