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
어렸을 때 틈만 나면 오목놀이를 했다. 뒷동산에 올라갔다가 누가 집에 놀러 오기라도 하면 재빠르게 풀숲을 헤치고 내려와 기다렸다는 듯이 오목게임을 청했다. 온 동네 조무랭이들을 적수 삼아 바둑돌로 천하무적을 꿈꾸었다. 학교에서는 연습장에 네모칸을 그리고 정성스러운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쉬는 시간마다 오목경기를 펼쳤다.
오목은 참 단순했다. 단순히 5개의 줄을 이어가기만 하면 승리한다. 더 많은 반격을 하기 위해서 가운데에 돌을 놓고 함정에 빠지길 기다리면 여지없이 거미줄에 걸려들었다. 일부러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상대를 교란시키기도 했다. 열심히 공격하고 방어하다 보면 한 수 앞을 보는 능력도 생겼다. 상대가 5줄을 만들기 전 바둑알이 연속 세 개 이상 놓였을 때부터는 초긴장한 상태에서 적재적소에 상대의 공격을 받아쳐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세 개의 바둑돌이 두 방향으로 연결된 33 규칙이 금수인걸 알았을 땐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주로 이긴 방법이 33 권법이었는데 마치 전쟁터에서 가장 좋은 무기 하나를 잃은 것 같았다. 인생에서도 그런 순간이 온다. 가장 좋은 무기가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 말이다. 결혼과 육아 후 경력 단절을 겪었을 때 내 인생에 더 이상 33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결혼 전의 경력은 너무 오래되어서 사회에서 인정되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며 학사학위를 두 개나 더 따고 자격증을 땄지만 정작 돈을 벌 때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무리 갈고닦은 실력이 있어도 사회에서는 이미 경력단절과 나이제한에 걸렸다. 운 좋게 초등학교 방과 후 수학강사로 취업했지만 그나마도 방학에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담당선생님의 서류처리가 늦어져 월급이 일주일 늦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붙어있는 33은 안되지만, 떨어진 33은 된다. 한 줄에 세 개가 붙어 있어도 옆줄에는 한 칸이 비어 있다면, 금수가 아니다. 의도적으로 떨어진 33을 만들거나 43을 만들면 전략적으로 이길 수 있다. 누구나 인생의 전략을 새롭게 세워야 할 때가 온다. 상대의 공격을 막을 때는 가능한 근처에 두어야 역공할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것이다. 멀리 두면 공격을 막기가 힘들다. 오목은 단순하지만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한수에 밀려 패배할 수 있다.
내가 43 전략을 만든 방법은 바로 창업이었다.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야 일을 할 수 있다면 불리하겠지만, 내가 사장이 되면 판은 달라진다. 16평 월세아파트에서 거실에 있는 tv와 소파를 과감히 치우고 책상을 놓았다. 현관에는 교육청에서 허가받은 개인과외교습자 간판을 붙였다.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는 법을 운운하며 집에서 교습을 하지 말라고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내일을 하는 것마저 법의 판단 앞에 서야 한다면 판사님께 사정이라도 해보려고 했다. “내가 과외를 하는 사람인데 집에서 과외를 하지 말라면 어디서 돈을 벌 수 있을까요?”라고 말이다. 오목에서 부지런히 공격해야 이기는 것처럼 상대가 공격해 온다고 주눅 들지 말고 어떻게든 방어를 해내야 한다.
일을 하기 위해 아이들 종일반 신청을 하러 동사무소에 갔을 때는 진짜 사업하시는 것이 맞냐며 사진을 찍으러 온다고 했다. 종일반 신청을 위해서 없는 사업장도 만들어 서류를 낸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막상 내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의심받는 처지가 되니 세상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보장된 수입이 없었다. 공부방 수업이 없을 때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전단지를 돌리고 수업연구에 몰두했다. 5줄만 만들면 승리한다는 단순한 진리가 인생에서도 통하면 얼마나 좋을까? 전단지 100장을 붙이면 학생 한 명이 등록한다는 것과 같은 고귀한 진리. 월급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과를 낸 대로 수입이 들어오다 보니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패배한다. 나만의 전략을 세운 후 하나 둘 학생들이 채워지고 새 아파트로 이사도 했다.
내 나이 마흔셋. 앞으로 인간의 수명이 120세까지 라고 하니 어쩌면 중간도 못 왔을지 모르지만 이제 인생 후반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또다시 열심히 갈고 닦았던 나만의 전략이 코로나라는 직격탄을 맞아 이미 구식이 되어버렸다. 학생들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든 것이 눈에 띄고, 온갖 미디어에 노출된 모습을 보인다. 급격히 변하는 세상과 인생 후반전이라는 콜라보가 그리 썩 좋은 것은 아닌듯하다. 오목에서 선공과 후공을 번갈아 두듯 인생에서는 다양한 선택의 순간이 있다. 그때마다 자신만의 무적수를 만들며 준비한다면 반드시 역공의 순간이 올 것이다.
오목을 하자고 조르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천하무적이 되어 온 동네에서 적수를 찾아 헤매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이들 앞에서는 수많은 전략이 무색하지만 응전의 태세를 갖추고 오늘도 바둑판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