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와 선영
제1화. 은희와 선영
햇살이 긴장하듯 운동장에 내려앉은 아침, 골갑예술중학교 외부 주차장에 붉은 스포츠카 한 대가 날렵하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윤기 나는 차체는 주변의 빛을 반사하며 번쩍였다. 운전석에서 칼주름이 잡힌 최고급 슈트 차림의 그녀가 내리자 주변의 공기까지 얼어붙는듯했다. 손목에는 번쩍이는 명품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습관처럼 손목을 한 번 들어 올려 햇빛 아래 시계를 반짝이게 한 후, 옷깃을 매만지고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주차장을 가로질러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이름은 박선영.
골갑예술중학교 교장이자, 한때는 성공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었다. 충북과 전북사이에 있는 기정 군 유지였던 아버지의 유산 덕분에 선영은 마두산 아래의 넓은 터를 닦아 사립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실패해도 괜찮을 만큼 물질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각종 비리를 저질러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학교 바로 옆에 집이 있음에도 굳이 차를 몰고 오는 이유는 단 하나. 위엄과 과시. 명문 예중의 이미지 관리, 그리고 교장이라는 지위에 어울리는 삶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서 ‘성공한 예술인’이자 ‘엄격한 행정가’로 불리는 그녀지만, 그 화려한 겉모습 아래에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
“교장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영은 혜민의 인사에 눈썹을 한껏 치켜올리며 미소 지었다.
“어, 그래 혜민아. 콩쿠르 수상 했다고 연습 게으리하면 안돼. 다음 달에 있는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 거두자~”
며칠 전, 혜민이 엄마가 선영에게 선물한 명품 시계가 선영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
선영은 만족스러운 어깻짓을 하며 교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복도 맞은편 화장실에서 나오는 승희가 선영의 눈에 들어왔다. 말없이 걷는 모습이 어쩐지 외로워 보였다.
승희는 실력 있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선영이 신경 쓰고 있는 학생들의 들러리로서 충분했다. 선영은 교내 콩쿨에서 승희 대신 혜민이 금상을 받을 수 있도록
심사위원들을 미리 포섭했다.
선영은 아무런양심의 가책없이 승희를 못본척 쌀쌀맞게 고개를 돌렸다.
‘세는 돈은 막고, 들어오는 돈은 더 늘려야지.’라는 생각으로 선영은 교장실에 장은희를 호출했다.
소심한 눈빛, 말라붙은 목소리, 그리고 이력서에서조차 풍겨 나오던 ‘착함’. 선영은 한눈에 그녀의 성격을 간파했다. 요즘 취직이 어려운 탓인지 그녀의 스펙은 제법 좋았지만 선영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기간제교사들을 뽑아서 싸게, 효율적으로 굴릴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은희를 채용한 이유였다. 부리기 좋은 인력을 뽑아서 적당히 생각해 주는 척하며 잘해주면 그런 사람들은 기대 이상으로 시키는 일을 잘 해내었다. 결국 그런 싸구려 인력들의 끝은 재계약이 없는 계약만료였으니까.
“선생님, 요즘 애들 연습 많지? 밤에 9시까지 학교 연습실 열어놓을 테니까, 연습 끝나면 문단속 좀 부탁해요. 비싼 돈 내고 다니는 학교인데, 이런 편의는 제공해야지. 그전에 우리 집 와서 열쇠 받아가요. 괜찮죠?”
은희는 순간 멈칫했다.
“네…? 아, 그게…… 전…….”
선영은 그녀의 말을 끊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선영은 압박 섞인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이 정도 수고는 해줄 수 있잖아요? 부탁해요, 선생님.”
은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은희의 대답에서 왠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 순간, 창밖에서 바람이 스쳤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그림자처럼 휙 지나갔다.
창문 틈새로 스며든 바람이 커튼을 스치며,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냈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한기가 내려앉았다.
누군가 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선이, 방 안 구석 어딘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