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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윤작가 Feb 25. 2022

38_10년이 흐른 후

마지막 이야기

캐나다를 떠날 때..

캐나다 초기에 어떤 이민자분에게 이런 얘기(또는 조언)를 들었었다. 영어 배운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이가 캐나다의 여러 가지 좋은 걸 경험하는 데 의의를 두고 오래 있지 말라고.. 1년 정도 있다 돌아가는 게 좋다고.. 3년 이상 있으면 한국에 못 돌아가거나 한국 가서도 다시 오게 된다고..


그 말씀이 어느 정도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1년은 좋은 것만 보였고, 2년 차에는 나쁜 것이 주로 보였다. 그래서 주저 없이 우린 2년 만에 귀국했다. (물론 처음부터 2년 계획이었고 그 당시 높은 환율로 돈도 문제였다) 그곳에 있으면서 이민으로 연결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난 ‘이민은 못하겠다, 돌아가서 우리나라 욕하며 살더라도 조국으로 돌아가련다’ 하고 귀국했다. 아마 3년 정도 있었더라면 이거 저거 다 극복하고 눌러있게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이민을 못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언어의 한계에서 오는 사회적 약자의 느낌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도 물론 주류는 아니었지만 비자발적인 비주류로 살 자신이 없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내가 반장을 하기는 싫지만, 내가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과 시켜주지 않아서 못하는 것의 차이랄까.. (반장이 되는 이민자도 있고 노력에 따라 주류가 될 수 있으니 오해 마시길)


지금 생각하면 편협한 그런 마음으로 돌아온 조국이건만 사실 돌아오자마자 후회가 됐던 건 사실이다. ㅎㅎ 어차피 한국에서도 주류가 아닌 것을 ㅎㅎㅎ 비주류면 어떤가.. 오히려 속 편하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못내 아쉬운 것은 내가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거다. 영어든 뭐든 거기서 할 수 있는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아까운 시간과 공간을 허비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을 아예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 브로셔를 뒤적이며 어떤 과정을 등록해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은 많지만 늘 아이가 걸렸다. 등하굣길에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일이 빈번할 것 같은 게 가장 문제였다. 직장맘으로 살다가 겨우 전업맘이 되었는데 아이에게도 좀 미안했고..


아이가 학교 가 있는 동안 가끔 무료 영어 클래스를 찾아가 보거나 taichi(태극권) 수업을 다녀보는 것이 다였다. 전업맘으로서의 2년을 후회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모처럼 리프레시할 수 있는 천국 같은 나날을 보내고 왔기에.. 그저 그 시간을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는 투자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조금 있을 뿐이다.




돌아온 지 10년

귀국해서 지난 10년간 딸아이를 키우면서 캐나다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아이의 성향 때문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고 예체능에 유난히 재능을 보이는 아이다 보니 캐나다 교육이 더 맞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었다.




캐나다에서 2년을 있다 왔으니 영어는 해결되지 않았냐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가 너무 어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초등 2, 3학년을 보내고 온 바람에 영어 수준이 딱 그 수준이었던 것. 그리고 돌아와서 꾸준히 연결해주지 않았던 점도 문제였다. 학원을 다니긴 했으나,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는 오히려 한국에서 영어공부를 가열차게 했던 애들에 뒤쳐지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외국인을 만났을 때 영어로 반응하는 속도는 남다르고 발음도 좋은 편이긴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nativeness까지는 아니다.


내가 조기유학을 꿈꿨을 때는 꿈이 참 거창했다. 캐나다만 갔다 오면 영어가 다 될 줄 알았고, 아이는 엘리트 코스만 밟을 줄 알았다. 공부도 잘하고 외고에 진학해서 명문대에 합격하는 수순이 기다릴 거라고 막연히 엄청난 착각의 늪에 빠져 있었다. ㅎㅎㅎㅎㅎ 넘나 세속적이었던 나 인정!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현실은 그저 캐나다 물을 좀 먹고 와서 영어가 좀 되는 애였다. 다행히 공부를 그다지 하지 않아도 영어 점수가 좀 나오는 애였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다른 과목도 이끌어주어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얼마 전 수능까지 끝내고 보니, 그래도 캐나다에서의 2년 덕분에 아이가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는 비교적 적었구나 싶다. 고3 올라와서는 영어 지문이 너무 어렵다고는 했으나, 그래도 영어공부를 안 한 것치고는 중상 정도의 성적을 받아왔고, 영어 공부할 시간을 다른 과목에 치중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 딸은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있는 편이 아니기에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우리 딸은 과목 중에 체육을 가장 좋아하는 소녀가 되었고, 질풍노도의 중학교 시절을 거쳐 중3 말 무렵부터 체대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워낙 중학교 때 공부에 손을 놓았고, 공부 적성이 아닌 터라 쉽지 않았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목표한 대학에 붙으면 캐나다를 떠난 지 10주년 기념으로 캐나다 여행을 가자고 공약을 걸었고, 마침내 얼마 전 감격스럽게도 그리고 감사하게도 본인이 그리도 가고 싶어 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우리 집에선 ‘기적’이라고 부른다. ㅎㅎㅎ


아이가 목표한 대학에 합격한 것도, 캐나다에 다시 갈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도 너무나 감사하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지금 비행기표 알아본다고 신났을 텐데.. 코로나가 빨리 종식되어 귀국한 지 만 10년이 되는 올여름에 캐나다행 비행기를 탈 수 있으면 좋겠다.


브런치 글을 읽어주신 많은 분들의 응원도 분명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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