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면서 이런저런 외적 내적 상황에 따라 알게 모르게 나의 가치관은 끊임없이 변해 왔을 것이다. 스스로 느끼기에 나의 가치관이 크게 변한 계기가 몇 번 있었는데 그중 한 번이 캐나다에서의 2년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마음가짐을 초심이라고 한다면 초심이 좀 무디어진 건 사실이지만, 자각할 때마다 마음을 다잡곤 한다.
한 가지는 예전보다 simple life, 검소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캐나다에 사는 2년 동안은 제대로 갖추고 살지 않았다. 2년만 사는 건데 뭐하러 다 사나 싶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코펠을 많이 활용했고, 두 식구뿐이니 한국에서만큼 다 갖추지 않아도 살만 했다. ‘이 정도만 있어도 되네. 살아보니 괜찮네’ 싶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렇게 최소한의 것으로 살자 싶었다. 돌아와서는 그 미니멀 라이프가 생각대로 잘 되지는 않았던 게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곳에 있는 동안 보아온 캐네디언들도 대체로 검소했다. 상류층 동네가 아니기도 했지만 부잣집이든 아니든 명품백 하나 들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없다. 부자여도 부자 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을 지내고 나니, 내가 풍족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욕심 내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 하나는 더불어 사는 삶에 눈을 떴다는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community(지역사회 또는 공동체)의 개념을 그곳에 사는 동안 너무나 잘 느끼고 경험했다. 아이 학교가 Community School이었고 스카우트 활동을 하면서 더더욱 그런 기회를 많이 접했던 것 같다.
Community 행사가 생각보다 많고 다양했다. 앞에서 몇 가지 소개한 적이 있듯이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핼로윈 등의 명절마다 아이들, 지역주민들, 소방관들까지 모두 함께 하는 행사가 열리곤 했고, 동네 사랑방 같은 도서관의 창립 기념행사도 지역 주민들이 모두 모여 즐기는 축제가 되었다. 봄에는 연어 방생 행사가 있어 동네 주민들이 줄지어 연어를 받아 강에 방생해주는 행사에 참여했고, 학교에서는 아이들과 학부모들뿐 아니라 동네 주민들도 함께 하는 Family Movie Night 같은 소소한 행사도 체육관에서 열어주곤 했다.
fundraising(기금 마련) 또는 donation(기증) 행사도 자주 있었다. Food Bank에 먹을 것을 기증하라는 가정통신문도 종종 받았다. 우리나라도 요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주로 쌀이나 파스타, 캔 등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기증하여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게 하는 제도다. 그 밖에도 빈 병을 모아서 기증하기도 하고, 책을 기증하기도 했다.
핼로윈 때 온 가정통신문
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스콜라스틱 책을 사라고 전단을 보내오기도 했는데, 아이가 사고 싶은 책을 골라서 주문하면 스콜라스틱 출판사에서는 똑같은 책을 두 권 보내주어 한 권은 아이가 갖고, 한 권은 학교에 기증하는 방식이었다. (난 이 시스템이 참 맘에 들었다)
기금 마련을 위한 행사는 참 다양했는데, 행사 때마다 raffle ticket(경품 추첨권)을 팔기도 하고 학교에서는 피자 도우나 쿠키 도우를 팔기도 했다. 이건 너무나 그리운 문화다. 내가 사고 싶은 종류를 표시한 종이와 돈을 봉투에 넣어 아이 편에 보내고, 정해진 날 받으러 가면 되는 거였다. 난 항상 마카다미아 쿠키 생지를 사 오곤 했는데, 50개 정도 들어있는 쿠키 생지를 받아다가 냉동실에 넣어두고, 틈틈이 오븐에 구워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었다.
내가 이기적인 삶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더불어 사는 삶에 눈을 뜨게 된 가장 큰 계기는 그곳에서 만난 어떤 어르신의 말씀 때문이었다. 처음 1년 정도 딸아이는 피아노 교습을 다녔었다. 교포 1.5세이던 한국인 선생님 댁에서 30분 개인 레슨을 받는 동안 나는 그 집 거실에서 기다리곤 했는데, 마침 선생님의 친정어머니와 잠깐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얘기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우리는 남을 돕고 살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 노숙자들, 거지들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그 역할을 맡은 것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
이 말씀을 들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머릿속이 띵 울리며 ‘내가 그 역할을 맡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른 사람이 맡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즈음 한국 TV에 차인표 배우가 나와 NGO 활동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어려운 아이들을 지원하는 일의 당위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방송을 보며 또 한 번 내 머릿속에선 종이 울렸다.
더불어 사는 데 참 인색했고 마음의 여유가 없이 살았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차인표 배우의 발끝도 못 쫒는 삶을 살고 있지만 나의 마음가짐을 조금이나마 변화시켜주신 두 분께 참 감사하다.
딸아이의 재발견
어린이집 시절부터 ‘명랑, 씩씩, 활달’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던 우리 딸은 캐나다가 참 잘 맞았다. 비록 2년간 돈도 많이 쓰고 나의 커리어도 중단되었지만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한창 놀아야 할 초등 저학년의 나이에 너무나 잘 놀았다는 것이다. 한국에 있었다면 나는 계속 직장을 다녔을 것이고, 딸아이가 방과 후에 학원을 전전했을 것은 안 봐도 비디오다. 캐나다에서는 캐나다식 교육환경 하에서 자연과 더불어 다양하게 많은 경험을 했고 행복한 추억을 쌓았다. 그때의 peak experience가 딸아이가 평생 살아나가는 게 있어서 큰 힘을 발휘하리라 믿는다.
두 번째는 아이의 저력을 보았다는 것이다. 아이와 붙어 지내다 보니 내가 그동안은 잘 몰랐던 딸아이의 재능이나 놀라운 면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절대음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그래서 음악 할 줄 알았다는 ㅎㅎ), 달리기를 잘하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체육에 남다른 탤런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다면 하는’ 저력이 숨겨진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술렁술렁해 보이지만 마음을 먹으면 해내는 근성이 어느 정도 보였다. 그 덕분에 작년 고3 수험생활 내내 아이를 응원할 때마다 “넌 한다면 하는 애다. 엄만 안다. 넌 해낼 거야”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다른 가족과 단절되긴 했었지만 아이에게만 온전히 온 신경과 애정을 줄 수 있었던 그 시간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