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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한 달빛 Jun 26. 2021

너와 나의 적당한 거리

달빛 아래에서 그림책 ⑦ - 전소영의 <적당한 거리>

한 발자국 물러서 보면

돌봐야 할 때와 내버려 둬야 할 때를

조금은 알게 될 거야.

- <적당한 거리> 중에서 -








1년 반을 함께한 반려식물 '파키라'가 얼마 전에 죽었다. 이국적인 느낌으로 첫눈에 반해서 데려온 뒤로 무럭무럭 잘도 자랐다. 잊을만하면 물을 주어도, 햇빛을 많이 보지 않아도 푸른 잎을 뿜어내는 모습이 시원함을 주었던, 내게는 듬직하고 예쁜 식물이었다. 죽은 원인은 나의 무지와 무관심 때문이었다. 물 빠짐과 장식 효과에 좋은 '마사토'를 움푹 파인 윗부분에 메워줬다. 그런데 예전보다 물 빠짐이 더디기 시작했다. 안에서는 뿌리가 썩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잘 자란다고 착각해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죽은 후에 알게 된 사실은 점질이 섞인 마사토를 그냥 사용할 경우 흙은 배수가 안 되고 공기가 통하지 않게 되어 뿌리가 썩고 잎이 노랗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사토를 깨끗하게 씻어서 충분히 말린 다음에 사용하거나 세척된 것을 구입해야 한다.


반면 많은 종류의 다육식물을 키워봤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었는데 '백금황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육이를 1년 가까이 함께하고 있다.


다육식물은 물을 적게 줘야 한다는 꽃집 사장님의 말을 그대로 실행해 보았다. 예전에는 다육식물의 특성을 무시하고 다른 식물과 똑같이 물을 주었다. 애정을 담아 물을 자주 주었던 것이다. 지금 키우고 있는 다육식물은 무신경에 가깝다. 지나친 관심에서 벗어나니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 살고 있는 다육식물이 되었다.


과거에는 식물을 키우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했다. 햇빛과 물을 주면 그냥 잘 자라는 줄 알았다. 식물마다 가지고 있는 특성을 무시했던 것이다. 어떤 식물은 물을 자주 줘야 하고 어떤 식물은 물을 적게 줘야 하고 어떤 식물은 자신이 무엇이 필요한지 겉으로 드러나지만 어떤 식물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처럼 표현을 하지 않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어느새 죽어가는 식물도 있다.


그런 거 보면 식물을 키우는 일은 인간관계와 많이 닮았다. 다양한 성격만큼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고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무신경해서도 안 되는 적. 당. 한. 거. 리 유지해야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작년 말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온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친구는 "너랑 나랑 안지도 벌써 20년이 넘었어!"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그때 친구 관계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을 때였다. 오래 알고 지냈다고 서로에 대해 진정으로 아는 것은 아니므로 친구가 그런 말을 했을 때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인간관계가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주고받음이 성립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방적인 관계는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하는 관계다.


문제는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것이 나에게 상처가 되는 관계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만나고 나면 찜찜한 관계도 있고 서로의 입장 차이가 달라서 이제는 관심분야가 평행선을 달려 접점이 보이지 않는 관계도 있다. 반대로 서로의 입장이 비슷해서 좋을 것 같지만 상대방의 존재를 무시하며 상처를 주는 관계도 있다.


그래서 거리를 두는 일은 식물도 사람에게도 필요하다. 예전에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가까워야 상대방을 더 잘 안다고 착각했다.





전소영의 <적당한 거리>




전소영의 '적당한 거리'는 식물을 키우는 일은 우리네 관계처럼 적당한 거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주인공의 화분은 싱그럽다. 그 이유는 뭐든지 적당해서 그렇다. 그리고 비좁은 흙에서 잘 버틴 식물은 분갈이를 해줘야 새로운 싹이 돋아난다. 저마다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식물들. 그리고 그 다름을 알아가고 그에 맞는 손길을 주는 것. 그렇게 너와 내가 같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사랑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관심이 지나쳐 물이 넘치면 뿌리가 물러지고 마음이 멀어지면 곧 말라 버리지."


반려식물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는 것뿐이다.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말고 앞서 판단하지 않으며 기다려 주는 것.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고 한 발자국 물러서 보면 조금은 알게 된다. 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적당한 물, 적당한 흙, 적당한 햇빛, 적당한 거리.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한 그 무엇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 적당함은 말은 쉽지만 관계를 맺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선을 넘기도 하고 상대방의 무례한 행동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그의 저서 <숨겨진 차원>에서 인간의 공간 사용법에 대해 4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느 만큼의 거리가 필요한지에 대해 실험을 통해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한 것으로 그중 친구와 나의 거리는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 Zone)로 46cm~1.2m라고 한다. 접촉을 꺼리는 사람들이 일정하게 유지하는 거리로써 서로의 팔 길이만큼의 거리를 뜻한다. 접촉보다는 대화로 의사소통을 하고 적당한 친밀감과 동시에 어느 정도의 격식이 필요한 관계다. <김혜남, ⟪당신과 나 사이⟫>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가깝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은 일이 많았을 것이다. 인지하지 못한 예전과 달리 지금은 '거리'를 두면서 알게 되었다. 적당한 거리를 지키지 못해 무례하게 침범한 그 선들 때문에 서로에게 스크래치를 내고 그것이 때론 깊은 상처로 남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둔다는 것너와 내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처 알지 못한 상대방의 존재를 알게 해주는 시간이기도 하고 인식하지 못했던 잘못된 관계를 알게 해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참고 도서

김혜남, 당신과 나 사이





달빛 아래에서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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