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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롤로로 May 20. 2021

긴 국경을 지나자, 새빨간 눈이.

[화양연화]와 [설국] 같이 읽고 보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중학교 시절 한 번, 고등학교 시절 한 번, 그리고 군에 와서 첫눈을 보고 또 한 번 읽었다. 내용이 그리 길지 않은 120페이지 남짓한 '설국'은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자 설국이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사회 문제나 철학적인 담론보다는 인간과 대상 사이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때로는 현란하게, 때로는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문체를 선호한 신감각파로 분류되는 작가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플롯'은 커녕 '내러티브'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칠게 요약한다면, 유산을 거하게 물려받아 이리저리 떠다니는 남자 주인공 '나'가 어느 시골 마을의 두 여성을 만나며 느끼는 감정과 그 풍경을 적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관찰자일 뿐이다. 이 소설에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분은 두 여주인공의 관계인데, 이 둘의 관계는 작품의 끝까지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둘의 모호한 관계와 눈의 고장에 대한 묘사가 쓸쓸한 애상감을 더하면서도 둘의 관계에 대한 미스테리함을 더한다. 낮에 나긋하게 읽기에는 이 만한 책이 없다. 


 그런데, 문득 [설국]을 읽은 후 [화영연화]가 떠올랐다. 이번에 리마스터되어 재개봉하였기 때문에 뇌 속의 대뇌피질의 바깥부분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설국]과 [화양연화]를 이어주는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고등학교 시절 한 번 본 적이 있는 [화양연화]는 어디어디에서 뽑은 개쩌는 영화 리스트에는 꼭 상위권에 위치하는 '그 영화'이며 홍대 인싸가 되기 위한 필수 관문 중 하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왕가위 감독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매력이 없다고 느낀 작품이 화양연화였는데, 시간이 지나고, 서툴지만 겪은 일들이 하나둘씩 쌓이고 나자, 신기하게도 지난 날에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양연화는 이웃집에 살게 된 두 남녀가 서로의 배우자가 내연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려하지만, 끝내 그 둘 또한 사랑에 빠지고 말고, 서로의 관계와 감정에 대해 고뇌하다 끝내 헤어지지만, 영원히 그리워하는, 그런 영화다.


 작품이 나온 시기도 다르고, 매체도 다른 두 작품을 하나로 묶어 글을 쓰는 이유는 두 작품을 관통하는 정서가 비슷할 뿐더러, 두 작품을 연달아 보며 각각의 작품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두 작품에서 멈춰섰던 지점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먼저, 내가 설국의 읽으면서 가장 이해가 안 되었던 점은 두 여인의 관계이다. 설국에는 고마코와 요코라는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고마코는 시골 마을의 여관에서 일하는 '게이샤'이고, 요코는 고마코의 약혼자 (고마코는 이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를테면, 

"그런 이야기(약혼)는 우리 둘 다 한 적은 없지만, 선생님(고마코의 남자의 어머니)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둘 다 알고 있었죠"

 와 같은 대사는 둘의 관계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추측하기 어렵도록 만든다)의 애인으로 '보이는' 여성이다. 보통의 상황에서라면 고마코가 요코를 홀대한다던가, 둘의 감정이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는 충돌하는 장면이 등장해야 하는데, 설국에서 이 둘은 그렇지 않다. 고마코는 요코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고마코는 '나'에게 일방적으로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요코는 고마코의 눈치를 살피는 듯하며, 때로는 '나'에게 고마코를 동정하는 듯한 대사를 내뱉기도 한다.  


 화양연화에서 내가 막혔던 부분은 둘의 '연극'에 관한 장면들이었다. 서로의 배우자가 서로 내연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만나 이 사실을 확인한다. 그 후 여자가 '둘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라는 대사를 내뱉는데, 이후 영화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애정을 고백하는 장면을 점프컷으로 넘겨 보여준다. 처음 이 장면을 볼 때는 '둘이 벌써 사랑에 빠진건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와서 보니 이 장면 자체가 하나의 연극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은 자신들의 배우자들이 처음 만났을 상황, 식당에서 밥을 먹었을 상황을 재현한다는 이유 (혹은 핑계)로 만나는 것이다. 사실 처음 이런 설정을 알았을 땐, 당황스러움이 앞섰다."둘에게는 가장 상상하기 싫은 장면일텐데, 왜 굳이, 그것도 불륜 상대의 배우자와 이런 행위를 하는 걸까?" 나는 이 부분이 다소 작위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껏해야 두 사람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순간을 계속해서 마주하고, 고통 받고, 또 다시 그것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주이상스'나 '히스테리' 같은 어줍잖게 들은 라캉의 용어로 해석을 시도해보았을 뿐이다.   


 이 둘의 접점을 찾는 것은 예상치도 못한 곳이었다. 화양연화를 보던 중, 나는 둘의 연극의 작위성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화양연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두 사람이 '헤어지기 연습'을 미리 해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감정을 극대화 시키는 이유는 관객이 두 사람이 하는 연극의 역설적인 의미를 깨닫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이별 연기를 하는 순간은 "우린 그들과는 달라요"라는 여자의 거짓말이 폭로되는 '진심'의 순간이면서도, 연극이라는 거짓을 통해서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는 '진실'의 순간이다.  영화는 곧이어 여자가 연극을 마치지 못하고 울기 시작하고, "그냥 연극일뿐"이라며 여자를 달래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연극이 그들의 불가능한 사랑, 즉 결국은 그들이 불륜 관계라는 사실을 덮기 위한 방어기제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논리는 그들이 만나기 시작한 이유인 '배우자의 불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애초부터 둘의 배우자 간의 불륜은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연극 안의 연극인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둘의 사랑의 부도덕함을 잊기 위해 만든 환상일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히려 이런 관점이 영화의 깊이를 더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사회의 질서와 상징의 틈새에서 삐져나오는 욕망을 환상으로 추구한다는 점은 오히려 라캉이 분석한 '욕망' 담론에 더 적절히 부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화양연화의 관객 중 몇몇이 둘의 명백한 불륜을 낭만화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배우자도 불륜을 하기 때문'이라는 이상한 전제가 깔려있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해석은 그들의 사랑을 '낭만화'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처절한 회피의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솟아내는 격정의 감정 속에 있는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이 나를 진정으로 울린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설국으로 넘어갔다. 오히려 설국에서의 설정을 매꿀 수 있는 설명으로 화양연화가 드러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요코와 고마코의 약혼자가 내연 관계였던 것처럼, 고마코도 요코의 누군가와 연인 관계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요코의 남동생은 고마코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두 여인의 묘한 한기와 때때로 보이는 연대의식 비슷한 모습들은 바로 이런 설명을 통해 채워질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두 여인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결코 격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화양연화]가 포스터의 강렬한 붉은색이 뻘쭘해할 정도로 절제된 순간의 분위기를 이용해 격정을 슬그머니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 해석들은 순전히 나의 망상이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서로 다른 두 작품의 설정이 서로를 보완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그 이유는 두 작품 모두 '사랑에 채념하는 사랑'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평범하지 않은 사랑의 형태를 자신의 배경처럼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로 변화시키거나, 되돌릴 수 없는 감정이다. 또한 바꿀 수 없는 지점의 사건이 현재와 미래를 모두 덮어버린 상황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설국의 주인공인 '나'가 독자에게 매력적이지도 않고, 미덥지도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는 어디까지나 타인들의 사랑에 '호기심'으로 접근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설국의 마지막 장면, 마을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요코가 불이 난 건물에서 뛰어내리다 떨어져 정신을 잃고, 그녀를 구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치여 그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내가 미끄러지며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불타는 집과, 여자의 죽음과, 아름다운 은하수의 사이를 왕복하는 것. 그것이 관찰자인 우리의 한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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