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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롤로로 Mar 02. 2021

김재규는 왜 중정이 아닌 육본으로 갔나

<남산의 부장들>과 <그 때 그 사람들>을 통해 본 김재규

한국에서 10.26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명확한 주제의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2인자에게 암살당한 독재자라는, 다분히 영화적으로 매력있는 이 소재는 역사적 정의보다 개개인의 경험적, 정서적 정의가 앞서는 몇 안되는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담스러운 사건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논란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이러한 10.26의 배경은 웬만한 작가적 포부 없이는 이 사건을 영화화하는 것이 힘들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것을 가장 명확하게 증명하는 점이, 10.26을 중심으로 영화화된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가 '그때 그사람들(이하 그사람들)'과 '남산의 부장들(이하 부장들)'로 압축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두 영화가 다루고 있는 10.26의 전개와 인물 묘사 역시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우리는 영화로서 전시되는 10.26은 장르적 스펙타클과 역사적 현실의 사이에서 작가의식이 개입된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독재자의 암살과 이것의 영화화, 두 작가는 과연 어떤 의식을 통해 이 사건을 바라보려 했던 것일까? 정말 신기하게도, 나는 두 영화가 10.26을 다루고 있음에도 서로 픽션화에 돌입하게 된 연유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사람들'의 경우는 2인자가 1인자를 술자리에서 권총으로 쏴 죽이는, 그 암살의 황당함에 집중하고 있다면, '부장들'의 경우는 김재규가 남산으로 가지 않고 육본으로 이동한 황당함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두 영화는 10.26이라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출발하여, 서로 전혀 다른 방법과 구조에 도착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사람들'은 분명한 블랙 코미디이다. 청와대 간부들은 물론 박통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어리숙하고,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처럼 보이며, 그들의 행동은 연극적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기괴하다. 박통을 비롯한 차지절, 김기춘, 최규하 등은 남성의 유아적 단계에 정신상태가 머무르는 인물들처럼 표현되며, 김재규는 냉혹한 암살자라기 보다는 정신이상증세를 보이는 인물처럼 보인다. 또한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들은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리지만, 유신 이전의 한국 역사와 10.26 이후의 한국 역사를 상기하며 그 대사들을 듣는다면, 매우 다의적 의미를 가진 수준 높은 대사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사람들'은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과 육본에서의 체포'를 매우 냉소적으로 희화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넓게는 애초에 군인이 18년을 독재하는 국가에서 무슨 일이 더 일어나면 어떻냐는 절망의 냉소에 가깝다. 남산에 사람을 가두어 고문하고, 각하가 국가라며 대놓고 소리치는 사람들, 만약 그들이 그들의 수장을 죽였다면, 그 사람들은 결코 정상일 수 없다는 논리적인 추론. 10.26이라는 절대적 혼돈 앞에서 임상수는 논리적으로 비논리적인 답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임상수의 반응이 불합리에 온 몸으로 저항하는 예술가의 관조에 가깝다면, '부장들'의 우민호는 어떻게든 논리적 연결과 설명을 찾아보려는 학자의 열정에 가깝다. '부장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느 영화에나 나올법한 '악당들'이다. 그들은 결코 멍청하지 않으며 (차지철은 예외지만, 어쨌든 그들 모두는 자신의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철저히 움직인다는 점에서 '그사람들'의 인물들과 확연히 다르다), 임상수가 10.26 당일의 시간을 다룬 것과는 달리 우민호는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파리 실종 사건부터를 시작으로 궁정동 안가에서 울린 총성의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사람들'이 김재규의 알 수 없는 몸부림에 집중했다면, '부장들'은 김재규를 비롯한 박정희, 차지철을 설명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영화의 다른 접근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한 해석이다. 두 감독 모두 '중정 부장이면서 박정희를 암살한' 인물,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의 탄압의 상징이 민주주의를 위해 박정희를 죽인' 인물이라는 이중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두 영화가 이 이중성을 다루는 태도는 확연히 다른데, 나는 여기서 앞서 말한 '재구성의 시작점'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임상수는 10.26을 영화로 재구성함에 있어 '암살'의 비합리성을 바탕으로 '(육본으로의)유턴'을 군부를 장악하기 위한 김재규의 판단으로 해석하는 순서를 택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앞서 말한 것처럼 블랙 코미디가 되었다. 하지만 우민호는 참모총장을 남산으로 데려 가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었을 것이라는 판단을 바탕으로 '유턴'의 비합리성을 통해 '암살'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두 감독의 영화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미국'의 묘사이다. '그사람들'과 '부장들'은 서로 많은 소재와 대사, 인물과 동선을 공유하지만, 단 한 지점, 미국의 지점에서 서로 다른 묘사를 보여주는데, 미 대사의 발언이 바로 그것이다. '그사람들'에서 차지철은 미 대사와 김재규의 만남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알 뿐, 그곳에서 오고 간 대화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부장들'에서는 미국이 박정권을 압박하는 형국을 차지철과 박정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 장치는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가져온다. 


 '부장들'에서 김재규는 박정희의 명예로운 퇴임을 준비하는 듯 보인다. 언제 쯤 그만둘 것 같냐는 박정희의 반복되는 발언과, 대내외적 위기, 그 속에서 김재규는 오로지 박정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부장들'의 핵심은 그 믿음이 부서지는 것에 있다. 영화 내내 김재규는 박정희를 위해 행동하지만, 김재규 본인이 믿고 있던 박정희의 모습과 실제 박정희의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이 후반부에 드러날 때(돈이나 가져 와), 김재규의 모든 것은 무너진다.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말 자체가 포함하는 것은 그 시대의 모습이다.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죽는다. 권력은 지시만할 뿐 책임지지 않기에. 그리고 이 무너짐의 틈새로 미국이 들어온다. '차기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꿈이 말이다. 그래서 김재규가 부마항쟁의 모습을 보며 미 대사와 김형욱의 발언을 회상할 때, 나는 이 영화가 완전한 픽션의 길로 나아가려 하는 것일까 기대를 가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화는 '차기 대통령'이라는 극적 장치를 통해 '유턴'의 선택을 더욱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부장들'에서 김재규는 대통령이 될 수 있었지만, 민주주의를 위해 육본으로 가 체포된 남자가 된다. 이러한 선택을 강조하기 위해 '그사람들'과는 달리 전두환이라는, 군부의 연장선에 있는 인물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에는 의문의 여지는 남는다.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위해서 박정희는 죽였다는 것은 김재규의 이중성 중 뒷 부분, 그러니까 박정희를 죽였다는 부분에만 초점을 맞출뿐, 그가 중정 부장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점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김재규의 유턴을 마지막으로 영화를 모호하게 끝내버리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영화 초반 박정희 시대를 설명하는 자막과 영화 후반 문어대가리와 김재규의 발언을 비교하는 것, 그리고 김재규가 육본으로 유턴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막과 신군부의 등장을 알려주는 자막까지, 이 영화는 과도하게 친절하고, 그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좀먹는다. 미국의 압박, 박통과 차지철의 무능, 그 사이에서 친구를 죽여야했던 김재규의 붕괴, 영화는 이 모든 것을 탄탄하게 잘 이끌다가 후반에 가서 '김재규 의사'라는 다소 성급한 결론으로 건너 뛰며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그 부분이 개인적으로 상당히 아쉬웠다.


 두 예술가가 하나의 부조리를 만났다. 그리고 임상수에게 김재규의 육본행은 이미 미쳐버린 놈이 뭔들 못하겟냐는 푸념의 냉소가 되었다면, 우상호에게 김재규의 육본행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자수의 숭고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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