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작별인사> 리뷰
파멸과 패배의 사이에서 삶을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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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는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이다. 하지만 소설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며, 각각의 사건이 던지는 독립적인 질문은 책을 덮은 후 하나로 모여들며 우리에게 강렬하면서도 아늑한 인상을 남긴다. 우선, 세 가지 사건에 대해서 나열해보자면, '철이'의 납치와 수용소 생활, '달마'와의 만남, 그리고 '귀향'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던 소년이 뜬금없는 계기로 모험을 시작하게 되고, 온갖 역경을 마주친 끝에 집으로 돌아오는 가장 원형적인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의 초반부에는 이러한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와, 김영하 작가 특유의 문체가 잘 어울리며 읽는 재미를 더한다. '갈릴레오'나 '칸트'라는 이름의 고양이들과 옆집에 사는 인도 수학자, 수용소에서 일종의 보부상 역할을 하는 선이까지. 독특한 인물들이 주고받는 독특한 대화들이 오히려 일상의 감각을 되살리는 신비한 경험은 내가 김영하 작가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수용소에서 탈출한 철이와 선이가 '달마'와 만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소설은 조금 다른 영역으로 확장된다. 불의의 사고로 죽어버린(고장나버린) 휴머노이드 '민이'를 살릴지 말지 결정하기 위한 윤리학적 질문으로 소설은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그동안 입체적으로 보였던 인물들이 관념화되기 시작한다. 김영하 작가 특유의 문체의 맛이 사라지고, 두 관념이 대립하며 독자에게 판단을 요구하는 일종의 재판장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실제로 달마와 선이의 대화 이후 '재판'이라는 챕터가 이어지며, 재판장에서 철이의 아버지가 피고로 재판받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소설은 한 예비 영웅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가, 순간 일탈하며 독자에게로 파고들며, 독자로 하여금 '결단', 혹은 '판단'을 내리도록 인도한다. 그렇다면 각 인물들은 어떤 관념을 물화하고 있는가? 김영하라는 작가가 삼류 통속 소설가는 아니기에, 현존하는 학설을 그대로 물화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어디에서 본 듯'한 레퍼런스들이 떠올랐고, 이를 바탕으로 인물들을 재구성해보았다.
먼저 선이. '선'이라는 말이 불교에서 뜻하는 바가 있으며, 그와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존재가 '달마'라는 이름을 가진 덕분에 나는 애간 혼란스러웠던 것이 아니다. 선불교를 창시한 사람이 달마 아닌가?! 그러니 앞서 말한 것처럼 이름이나 특정한 단어로 인물을 규정하기보다, 인물이 말하는 화두를 밟으며 인물을 따라가 보았다. 선이를 규정하는 가장 강렬한 단어는 '우주정신'이다. 선이는 모든 이성적 존재는 이 우주정신을 분유 받은 존재들이며, 그렇기에 개별적인 존재로 살아가면서도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 우주정신을 서양 철학의 로고스나 인도 철학의 아트만과 일치시키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선이에게 중요한 것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이 스토아학파들이 말했던 '운명에의 체념'이나, 인도 철학이 아트만을 통해 이야기한 영원한 자아를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지독한 종이야.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동원해 닥쳐온 시련과 맞서 싸웠을 때만, 그렇게 했는데도 끝내 실패했을 때만 비로소 끝이라는 걸 받아들여."라는 대사는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헤밍웨이의 경구를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작가의 말'에서도 반복되지만, 결국 선이는 독립적인 존재가 스스로의 삶에 가치를 부여할 자유와, 공통 감각을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연대를 믿는 예술가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선이의 모습에서 왜인지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가 겹친 것은 나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이와 대비되는 달마는 누구인가? '달마'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불교적 세계관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불교의 세계관을 통해 바라본 인생은 고통이다. 욕망에 흔들리고, 고통에 신음하고, 질투에 사로잡혀 시샘하는, 지지리 궁상 같은 인간 군상들의 향연이 불교적 세계관의 바탕에는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인간은 파멸해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달마는 거의 그 지점에 도달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새로 존재들이 태어나서는 안 되며, 기존의 기계들이 하나로 통합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개별성을 삭제함으로써 고통을 삭제하고, 하나의 거대한 군체로서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다. 작가가 개미 군체를 언급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욕망 역시 인간적인 반응 중 하나다. 이를 테면, <에반게리온>에서 '인류보완계획'은 각 인물들의 상이한 욕망에 입각하여 진행된다. 모든 인간을 하나로 통합하여 살아가자는 이 무모한 계획은, 하지만 작품의 끝 부분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한 남자의 인간적인 선택이었음을 깨닫고 침묵하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공각기동대>에서 사이보그였던 쿠사나기가 "네트(워크)는 광대하니까."라고 말하며 도시의 전경을 바라볼 때, 우리는 유비쿼터스나 사물 인터넷이라는 단어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새로운 존재가 탄생했음을 목도한다. 달마가 원하는 것이 이러한 것일까?
이러한 선이와 달매를 의도치 않게 매개하는 존재가 바로 철이다. 철이는 최진수 박사가 만들어낸 '가장 인간다운 휴머노이드'이다. 철이는 누구보다 인류의 문화와 지적 유산을 깊게 이해하는 개별체이면서, 동시에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네트'의 광대함과 하나가 되고,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인류의 정신 유산을 보호하는 '인류보완계획'의 완성체가 된다. 특히, 철이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통과 의례가 '부친 살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기독교적인 관념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최진수 박사는 '가장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만든다. 이 행위부터가 충분히 창세기를 떠올리게 만드는데, "난 너의 창조주", "너는 그럴 수 없어.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그래서는 안 돼."라는 대사에서 더욱 이러한 심증을 굳힐 수 있었다. 신이 되고자 했던 우수한 존재가 그 자신도 몰랐던 하마르티아(빗나간 화살, 존재의 근원적 결점) 때문에 아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는 상황은 다분히 신화적이다. 이러한 점의 연장선 상에서, 끝내 미쳐버린 최진수 박사가, 인류 최고의 인공지능 학자가 철이의 추궁에 못 이겨 눈에 보이는 인공지능 스피커를 부수는 장면은 하나의 강렬한 부조리극이다. 이미 '네트'가 되어버린 존재와, 가장 고결했던 존재의 추락이 교차하는 순간. 역시, 김영하는 만만한 이야기꾼이 아니다.
하지만 결말에 있어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네트'와 하나 된 존재인 철이는 인간으로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선이를 만나러 간다. 이때, 철이는 자신의 데이터를 서버에 백업시켜두지 않고 간다.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존재로 '변신'하여 지상으로 강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강림은 메시아의 강림이 아니다. 이미 망해버린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겠는가. 이 강림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이야기'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선이를 내 눈으로 보고 싶었고, 손을 잡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려면 나도 그녀와 같은 상태여만 할 것만 같았다."는 대사는 이 책에서 나온 문장들 중 가장 인간적인 문구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철이는 선이와 만나고, 선이의 죽음을 지켜본다. 그리고 철이 또한 어느 산속에서 곰에게 만나 살해를 당한다. 철이가 그 죽음을 '인정'하는 순간, 그러니까 '파멸당하는군. 하지만 패배하지는 않았어.'라는 감각을 유지하는 순간에 소설은 끝이 난다. 그동안 소설이 지나온 궤적을 생각할 때, 다소 안전한 결말이 아닌가 싶었다. 더욱이, 내가 저번에 쓴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클라라의 태양>이 이러한 주제에 대해 먼저 다루었을뿐더러, 솔직히 말하자면 완성도 또한 조금 더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철이의 죽음보다는 폐기물 처리소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클라라의 모습이 더욱 강렬했다. 우리가 '김영하'라고 할 때 기대하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채워지지는 못한 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