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는 헤어졌지만 남겨진 흔적은 의외로 끈끈했다.(끈적하다라고 쓸 뻔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찾아와 달라붙는다. 보내주려면 약간의 결심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리뷰를 적어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오래간만에 사랑 이야기에 끌렸고, 사랑에 대한 고민을 하나 적었다.
그리고 내 이야기로 하나 이어졌다. '헤어짐'에서 시작된 테마였다.
그리고도 모자라 또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서래의 말에 빗댄다면 눈을 감으면 자꾸 떠오르는 영화다. 정확히 하자면 대사들이 둥둥 떠다닌다.
영화는 그저 사랑 하나 보여줬을 뿐 딱히 물어본 것도 아닌데 나 혼자 대답하지 못해 동동거린다.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관객들이 좀 더 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얘길 했다고 한다. 감독의 소소한(?) 소망 하나가 성취된 것 같다. 나의 축하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진심으로 축하와 감사를 전한다.자신이 매력적이란 것을 알고 있는 이 영화는 탕웨이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나쁜 영화가 아니라고. 관객 한번 만나기 위해 이토록 화면과 대사를 갈고닦았다고. 정말 매혹적이다.
문어체 같기도 하고, 어색한 듯싶지만 그래서 매우 적절하기도 했던 서래의 어휘들이 계속 해준의 마음속에서 빙빙 돌아다녔듯 이 영화의 남겨진 여운이 자꾸 맴돈다. 생각하기를 피해 가지 못하도록 옭아매는 영화다. 무거운 주제였으면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는 분명 사랑 이야기여서 그렇다!
헤어질 결심의 후반부 장면엔 밀려오는 파도가 두 주인공을 감싸는 주된 배경이 된다. 파도는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하고 동시에 지우기도 하는 참 특별한 힘을 지녔다.
사랑과 관련된 흔한 질문 중 하나이다.
우리는 과연 자신과 비슷한 존재에게 끌리는지,
아니면 자신과 다른 존재에게 끌리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내게도 오래 간직된 질문이었기에 그간 많은 이들에게 물어봤었지만 답은 갈렸다. 어쩌면 둘 다 정답이기도 하다. 직접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도, 그간 보고 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토대로도 각각의 선택지는 각각의 합리성에 대한 논리적 설명도, 뒷받침할 사례들도 든든하게 보유하고 있기에 양쪽 모두 할 말은 충분하다.
물론 이 영화가 이에 대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모양에서 때때로 친숙한 이미지를 연상하듯 내겐 이 영화의 한쪽 벽면이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영화는 일단 비슷한 존재에게 끌린다는 쪽에 한 표를 행사하였다.
해준이 절에서 한 고백 중 / 취조실에서 서래가 한 대답 중
위 해준의 대사는 절에서 서래를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꺼낸 사유였다. 비슷함을 '종족'이라는 약간 독특한 어휘를 들어 표현하고 있다. 의미적으로는 '같은 부류'라는 뜻을 전하려는 것이었겠으나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던 걸까? 감독의 의지였는지, 해준이 둘의 만남과 끌림에 운명적인 분위기를 더하고 싶어 선택한 어휘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종족'이라는 어휘로 인해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보다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외침이 밑에 깔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서로의 비슷함을 확인한 것이 해준의 마음 변화엔 중요했던 모양이다. 두 번째 관람하던 도중 이 대사가 만들어졌던 원 상황에서 서래가 '말씀'이라고 했을 때의 살짝 실망한 표정, 다시 '사진'이라고 했을 때 살짝 반짝이는 해준의 표정이 갑자기 너무 크게 보여서 깜짝 놀랐다.
산이 그렇게 싫으냐는 질문에 대한 서래의 대답과 그 대답에 대한 해준의 반응
관심이라는 일반도로를 지나 사랑이라는 전용도로에 곧 들어가게 됨을 나타내는 이정표가 방금 전 지나갔다. 그것이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도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이다. 만남의 초기, 상대방에게 관심이 있을 경우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행동 중의 하나는 서로의 비슷한 점 찾기이다. "어, 정말요? 저도 그런데요."나 "저도 그거 좋아해요." 같은 멘트가 덕담처럼 오고 간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호감이 점점 무르익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이기도 하니까.
영화에서도 그 둘이 가까워질 수 있는 이유로 계속 비슷함이 강조된다. 취조 중에 먹은 음식을 치우는 행동에서도, 해준의 집에 있던 벽면 가득한 끔찍한 사건 사진들을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어가며 같이 바라보는 장면에서도, 각자의 영역에서 프로페셔널하게 일처리를 하는 모습 속에서도 두 사람은 비슷한 존재로 비친다. 둘은 경찰과 피의자인데... 대척점에 있는 두 존재지만 직업과 상황이라는 껍데기를 벗긴 본연의 인간 알맹이는 비슷하다고 얘기하는 것과 같았다. 뤼팽과 홈즈가 역할로는 완전 다르지만 존재론적으론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호미산에서 서로의 감정을 다시 표현하는 과정 중
결정적으로 해준은 호미산에서 다시 한번 서래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다.
진실을 찾으러 갔던 호미산,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경찰로서의 품위를 결국 다 버리게 만들었던 그녀 앞이었지만 해준은 이미 글러브를 내려놓은 채 싸울 의사를 상실한 상태였다. 난 경찰이고 넌 피의자라고 굳이 힘주어 내뱉는 말로 마지막까지 버텨보지만 이미 그도 느끼고 있었다. 의미 없는 최후의 저항이었다. 나 그거 좋아요라고, 담담한 듯 가볍게 되받아 들어오는 서래의 직진성 앞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끝끝내 취조에 협조하길 거부하다 결국 진실을 말하고 마는 범인처럼 자신이 왜 서래를 좋아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토해내듯 외치는 해준이었다.
결정적인 그 순간의 고백이 처음 영화를 볼 땐 잘 들리지 않았다. 뉘앙스만 감지했을 뿐이었다. 나중에 다시 들으니 몸이 꼿꼿하다는 말이었다. 사랑의 고백이라기엔 쉽게 사용될 만한 표현이 아니었기에 잘 들리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다시 들었을 때도 약간 튕기는 느낌이었다. 별로 맥락에 부합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붕괴'라는 곳까지 이르게 했던 '그녀'라는 존재에 대한 평가이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곳에서 토해낸 진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아주 중요한 고백이었음에도 솔직히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옷에 붙인 포스트잇처럼 겨우 붙어 있다 제자리가 아닌 양 곧 떨어져버리는 대사였다. 오히려 몸이 꼿꼿하고, 긴장하지 않고, 똑바르다는 수식어를 붙여 보다 어울리는 사람은 해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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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왜 해준은 저렇게 고백했을까? 생각해보니 해준의 이미지 속에는 서래가 저렇게 그려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해준은 진심 그렇게 느꼈던 거였겠으나, 실제론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과 가치관을 서래에게 투영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입으로 토해낸 '붕괴'라는 상황 전까진 경찰이라는 직책에 들어선 이후 최선을 다해 이룩하고 지켜온 자부심은 해준을 상징하는 수식어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사랑이 덮쳤고 모든 것은 붕괴되었다. 갑자기 찾아온 폭우에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둑처럼 어쩔 수 없었던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해준의 입장에서 그 결과는 너무 갑작스러웠고 불가항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둑을 무너뜨린 폭우처럼 설명 가능한 이유조차 댈 수 없다는 점이 더 문제였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우리의 마음처럼 사랑으로 정리하면 간단했지만 당시 해준은 그걸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해준이 힘들게 수습하여 애써 정리한 이유는 '한순간 여자에 미쳤던 경찰'이라는 딱지였다. 아하하... 관객의 입장에선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해준의 입장에선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뒤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이런 방식의 사고를 하는 이가 바로 해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명되지 못한 부분이 여전히 남는다. 여자에 미쳐 실수할 수는 있다 치자. 그런데 왜 그 실수에 자신의 '희생'까지 덧붙여야만 했을까... (역시 사랑으로 정리되면 간단했지만) 그녀를 구하기 위해 취했던 희생적 행동에 대한 이유는 풀다 만 사건처럼 남아버렸다. 자신의 과오를 드러내지 않고 덮기 위함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그건 또다른 모순을 불러온다. 해준이 가진 형사로서의 자부심은 외부적 인정에 의해서라기보단 본인 스스로 이룩한 성취이자 형사라는 자신을 이루고 있는 세포적 형질에 훨씬 더 가까웠다. 그렇기에 범인을 놓치고 실수를 덮는 쪽보단 차라리 실수를 인정하고 범인을 밝히는 것이 더 해준의 본모습에 가까운 결말이었다. 왜냐하면 범인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범인을 놓아줬다는 것 자체가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형사 해준에겐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자기모순적 결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사 내용이 서래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여 일차 무혐의 결론을 내렸지만 막상 의심의 순간이 오자 서래에 대한 마음과는 별개로 끝까지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적했던 형사 해준의 모습으로부터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해준의 최종 선택은 달랐다. 그러니 설명 가능한, 본인도 납득할 수 있는 희생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 다시 만나기까지의 일 년여 시간 동안 벽에 붙여놓은 사진처럼 계속 되짚었을 것이다.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모습을 서래가 가지고 있어야 했다. 붕괴를 감내했던 자신의 희생에 당당한 묘비명이라도 올리려면 서래는 본래 그럴만한 사람이었어야 했고 결국서래의 존재는 점점 더 위의 고백처럼 굳어졌을 것이다. 외형적으론 자식의 성공을 위해 물심양면 희생하는 부모이지만 내면적으로 자신의 과한 기대를 자녀에게 투사하고 있는 부모의 모습과 비슷하달까. 자신이 완성시키지 못한 것을 자식을 통해 성공시켜야 하고 그래야만 자신의 희생에 정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서래는 꼿꼿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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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이게 서래 씨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해준의 말이 나오지만 실제로 '많은 것'의 실체에 대해선 하나도 언급하는 것이 없었다. 설명 잘하는 해준이었지만 아무런 추가적 증빙을 내놓지 못했다. 너무 많아서? 그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을 여전히 놓치고 있는 해준이었다. 무엇을 놓쳤는지에 대해선 조금 뒤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자.
결론적으로 해준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사랑의 중심 테마는 '비슷함'이라 볼 수 있다.
해준의 고백을 쭉 이어서 보자면, 자신과 같은 종족임을 아는 순간 사랑의 문이 열렸던 것이었고, 자신과 비슷한 존재였기 때문에 (비록 파멸에 이르렀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이기도 했다.
서래와 해준은 닮았다. 확실히.
하지만 과연 둘의 끌림은 과연 그 '비슷함' 때문이었을까?
살인사건 현장에서 살인도구를 우선적으로 찾는 형사처럼 사랑이란 현장에선 감정을 먼저 들여다봤어야 했는데 해준은 그러지 못했다.
해준의 결론으로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호미산에서의 해준의 고백을 들여다보면 앞에서도 말했듯 조금 독특하다. 고백 속에선 서래 씨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말하고 있지만 오히려 해준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대사였다. 이게 사랑이라는 현장이었음을 감안했다면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동기이자 단서는 바로 '감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텐데...
그토록 똑바로 보고자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매번 놓치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감정이었다. 사랑 고백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그리워했다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말하지 못하는 해준이었다. 이게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이자 '다름'이었다. 여기서 해준과 서래의 개인적인 특성이 극명하게 갈린다.
나와 같은 관객은 관찰자이다. 사랑이란 게임에서 양쪽 진영을 다 볼 수 있는 옵저버이기도 하다. 제삼자 시각에서 다시 사건파일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정리한다면 두 사람은 매우 다른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었고 해준의 마음에서도, 서래의 마음에서도 모두 그 '다름'이 중요한 끌림의 변수로 작용했다.
두 사람의 다름은 주로 그들의 말에서 나타난다.
말하는 나는 말이 나의 것이라 생각하며 단어들을 선택하고 나열하지만 막상 말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내 기준에 맞춰 움직이던 단어와 억양은 다른 이에게 발화의 기회가 넘어가는 순간 힘을 잃는다. 같은 노랫말이라도 가수가 어떻게 호흡을 내뱉으며 부르느냐에 따라 아주 다른 노래처럼 들리듯 말도 그렇다. 그래서 말은 그 사람을 드러내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윤여정 배우를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연기는 정말 훌륭하지만 이제 스크린 밖에서도 그녀는 많은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된 것 같다. 아마도 연기를 제외한 그녀에 대한 관심의 중심엔 그녀의 말과 말하는 방식이 있지 않은가 싶다. 이제 그녀의 말은 그녀의 생각이고, 그녀의 옷이고, 그녀 자신이다.
서래는 직설적이고 직관적인 언어를 던지는 사람이다.
'마침내'와 같은 독특한 어휘가 해준의 마음에 생각보다 깊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정말 해준의 관심을 끌었던 핵심적인 요소는 그녀의 화법이었다. 서래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조금씩 마음이 흘러가기 시작했던 해준은 잠복근무를 하면서도 그녀가 궁금했고, 상상을 통해서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길 기대했다. 그런 그에게 서래가 말하는 방식은 곧 서래였다.
그녀의 화법은 단지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녀라는 존재를 눈앞에 보여주는 실물사진이었고, 그녀의 매력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번역기였다.
서래의 말은 마음 그 자체를 꺼내는 행위이다.
그러니 격식과 상황은 부차적이고, 아이들처럼 바로 핵심으로 돌진한다. 내 것을 바로 꺼내서 상대에게 보여주고, 상대에게서 보이는 것을 바로 읽어준다. 때론 당황스러울 정도다. 곳곳에서 보이는 해준의 당황스러움이 너무 이해가 되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서래의 대사들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좋아하는 감정은 사랑의 일상적인 재료이지만 서래의 말로 나타나는 표현 방식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다. 서래가 한국어를 잘 못하는 중국인이란 설정이 그래서 빛을 발한다. 익숙하지 않은 표현 방식이 그로 인해 당위성 인증을 취득한다. 격차가 주는 인상은 그대로 남기면서 그 격차를 거부할 이유를 삭제하는 아주 영리한 방식이 된다. 게다가 서래는 사랑이 가장 중요한, 그래서 사랑 이외의 것은 부차적으로 변하는, 역시 흔치 않은 사람이기에 서래의 대사는 더욱 강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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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가 만들어내는 대사의 강렬한 인상에 대해 생각해보면 좀더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지 않나 싶다. 앞서 얘기한 내용 외에 서래라는 캐릭터는 현실 속 인물을 넘어 주로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어떤 원형적 존재처럼 느껴지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탕웨이조차 영화 시사회에서 서래가 불쌍하게 보였다는 얘길 했다고 한다. 역사에서도, 신화에서도 사랑이 가장 중요했던 이들이 처하게 되는 결과는 늘 비슷하다. 중요한 순간 사랑을 선택하는 행동은 주로 현실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행동을 대가로 요구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고, 극적인 구원의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대부분 결국 불쌍하다고 표현할 만한 결과를 맞이해야만 했다. 영화에서도 서래가 자신을 묘사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불쌍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어쨌든 그럼으로 인해 우리는 서래라는 존재에게 무의식적으로 끌리게 된다. 그녀는 일종의 원형적인 존재이기에. 그런 이들은 윤리적이고,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잣대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마음에 남겨진 그녀에 대한 불쌍함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을 선택했음을 쉽게 단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의 맘속 깊은 곳에도 사랑 그 자체에 충실해지고픈 욕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난 이것이 여성들이 탕웨이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얘기해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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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는 마음을 읽는다.
직업적으로 만나는 사람의 마음도 잘 이해한다. 그래서 맞춰주는 것도 손쉽게 잘한다. 이게 어려운 사람들에겐 정말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노래 못 부르는 사람에게 노래시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서래는 가장 당황스럽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상대방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철석이에게 폭행을 당하는 아주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결국 그 폭력을 멈출 수 있었던 것은 철석이 본인도 부인할 수 없었던 엄마에 대한 이야기이자 엄마에 대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살인이라는 현장에선 해준의 세심한 눈이 빛을 발했다면, 사랑이라는 공간에선 서래의 눈을 절대 피해 갈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이 영화의 정말 재미있는 부분이 하나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처음 보았을 땐 보이지 않던 부분이었으나 다시 보고 나니 재미있는 구도가 하나 보였다.
애초에 이 영화가 표방한 것이 '사랑 이야기'였으니 사건보다 사랑을 앞에 놓는다면?
그러면 이번엔 사랑에 대한 취조의 과정이 드러난다.
박찬욱 감독은 취조가 진행되는 과정과 사랑이 진행되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포개지도록 만들었다. 당연히 취조의 과정은 사건과 관련된 것이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경찰과 피의자로 위치하게 된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겹쳐진 두 과정에서 이젠 반대로 사랑의 과정을 앞으로 꺼내고 사건에 대한 취조를 뒤에 놓으면 두 사람의 위치와 역할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재미있게도 사랑도 취조처럼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안에서 해준은 반대로 취조를 당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겉으론 취조하는 자가 해준이었지만 대화에서 늘 이기는 자는 서래였던 거였다. 하지만 문제는 지고도 진 줄 모르고 있는 해준이었고, 주고도 준 줄 모르는 마음이었다.
서래와 달리 해준은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에 취약했다.
서래와는 아주 다른 측면이다. 해준은 친절했지만 친절은 행동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지 감정을 설명해주는 단어는 아니다. 그래서 로봇에게도 친절한 행동을 입력시킬 수 있다. 해준의 원래 스타일에 더해 경찰이라는 그의 신분 때문에 더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다. 사건 현장에서 작은 것들도 놓치지 않는 세밀한 눈을 가졌고, 죽은 자의 마지막 시선까지를 좇는 해준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때로 보이는 것 아래에 있는 것을 잘 보지 못할 때도 종종 있었다. 마침내 우는구나라는 서래에 대한 묘사에선 정작 서래의 표정을 읽지 못하고, 몇 년을 붙잡고 있었던 질곡동 사건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누락하고 있었다. 자신이 늘상 기록하던 잠복 음성파일에 기록되는 관찰의 내용들이 줄곧 서래에 대한 감정을 담고 있었음을 본인만 몰랐다.
해준은 사실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그의 이해는 주로 펼쳐진 상황들에 대한 이해이자 눈앞에 벌어진 것들을 담아내는 행위이다. 그래서 그의 말은 주로 묘사이다. 주로 눈으로 그려지는 말들이다. 눈으로 그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묘사와 설명은 해준의 주전공이다. 개미가 사람을 먹느냐는 서래의 질문에 금파리부터 시작해서 개미와 딱정벌레와 말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설명은 해준식 묘사의 정점이다.
그래서 해준은 사랑의 내용도 마음이 아니라 행위를 묘사하고, 사랑의 과정도 증거물을 모아 사건에 대한 명칭을 붙이듯 처리한다. 마음을 꺼내놓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시선으로 바라본 자신을 기록한다. 그래서 마치 신문기사 제목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부심 가득하던 유능한 경감이 여자에 미쳐 수사를 망치다.'
다만 행위라고 해서 마음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전에도 얘기한 바 있지만 때론 행동이 말보다 더 진실에 가까울 때가 많다. 서래의 범죄를 증명하는 폰을 바다에 버리라고,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찾지 못하게 하라는 해준의 당부이자 서래를 보호하고자 했던 행위는 해준의 마음 가장 깊은 진앙점에서 일어난 울림이 현실까지 전달된 행위였다. 울림 자체가 강하고 깊었기에 그 진동이 현실까지 도달했을 땐 해변을 뒤덮는 높은 파도가 되어 있었음에도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누구보다 마음 읽기를 잘하는 서래에겐 가장 강력한 사랑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서래의 고백처럼 그 순간부터 진짜 사랑이 시작되었고,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만났던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이토록 '무너지고 깨어질' 정도로 행동했던 이는 없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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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서래는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을 받지 못한다. 가장 사랑받아야 할 남편이란 존재로부터는. 그녀는 그저 누군가의 소유물이거나 욕망의 해결처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해준을 사랑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취조가 시작되면서 서래도 어느 순간부터 해준이라는 존재를 의도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거리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래의 마음이 시작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몇몇 소소한 경험들이 겹치면서 시나브로 피어났을 것이다. 늘 거칠고 폭력적이고 잘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과만 같이 지냈던 그녀가 친절하고 예의바른 경찰을 만났다. 그녀 입장에선 생소한 경험이자 지금까지 만났던 이들과는 '다른 남자'였다. 생존을 위해 거친 삶을 헤쳐왔고, 상황에 따라 영악하게 행동함에 주저하지 않는 그녀와 달리 해준은 '반듯한' 남자였다.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설명해주고, 맛있는 초밥을 같이 나누고, 심지어 치약까지 짜주며 방수가 된다는 밴드도 건네준다. '이 사람 도대체 뭐지...?' 하는 생각이 들 법한데 그게 또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밴드를 손등에 붙이고 향수를 그 위에 뿌리며 방수가 되는지를 확인하는 그녀의 행위 역시 중의적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경찰은 칼을 든 살인 용의자도 제압할 수 있는 든든함까지 갖췄다. 그럼에도 마초적인 느낌보다는 신사적인 분위기가 훨씬 강했다. 그렇기에 그런 해준이 자신의 주변에서 자신을 감시한다는 것이 귀찮을 수도, 불쾌할 수도, 더 나아가 커다란 심리적 압박이 될 수도 있는데 그와는 다른 느낌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피의자 신분에서 벗어나야 하는 서래의 입장에선 처음과 달리 이는 매우 위험한 줄타기가 될 수 있었음에도 감시가 점점 관심의 행위로 변해가는 해준처럼 서래 역시 일단 자신의 감정을 그 줄 위에 올리고선 줄의 진동을 느껴보기로 했던 것 같다.
...▪︎
지금까지 늘 그랬지만 또 이야기가 길어졌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대답하자면 사랑의 끌림에 작용하는 주요 요인으로 이 영화는 결국 서로의 다름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고 얘기하는 듯하다.
물론 이 결론은 서래와 해준에 한해서며, 더 엄밀하게 정리하자면 단지 비슷한지 다른지에 대한 답변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결론이기도 하다. 안타깝지만 해준과 아내였던 정안은 영화 속에서 문과와 이과라는 비유로 나타나듯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달랐다. 다르다는 것 자체가 끌림의 핵심이라면 그 둘도 정말 사랑했어야 했을 것이다.(실제로 처음엔 정말 열렬히 사랑했을 수도 있다. 영화에선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16년 이상 지난 것으로 나오고 있다.)
결과적으로 비슷함과 다름이 사랑의 끌림에 얼마나 작용하는가는 추가적인 다양한 '조건'에 영향을 받는 것 같다. 단지 비슷하다가 아니라 무엇이 비슷한지가 중요하고, 단지 다르다는 판정지 타이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에서의 다름인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는 말과 같다.
게다가 거기에 시간적인 변수까지 덧붙여진다면 해답으로의 과정은 더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처음엔 분명 매력으로 작용했던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지점이 답답함의 지점으로 반복해서 나타나거나, 더 나아가서는 헤어짐의 가장 대중적인 답변인 '성격차이'의 첫 줄이 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스칼릿 조핸슨과 아담 드라이버가 출연했던 '결혼 이야기'라는 영화에서도 매우 드라마틱하게 잘 그려졌던 부분이다.
다르지만 어울릴 수 있고, 비슷하지만 지루하지 않을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물론 최종은 아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자 중간정산일 뿐이다.
'다름'은 주로 서로에 대한 매력의 포인트로 나타나고, 각자의 부족한 부분에 대한 보완재처럼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비슷함과 달리 서로의 다름은 굳이 인식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의식되어지는 부분이다. 나에겐 없는 상대방의 특성은 눈에 잘 들어오며, 그게 때때로 맘속으로도 쑥 들어올 때가 있다. 만남의 초반 서로의 다름에 끌리게 되는 일들은 왕왕 있다. 어쩜 이리도 다른데 서로 결혼했을까 싶은 부부는 쌔고 쌨다.(우리 부모님도...) 그리고 다름은 때로 매우 유용하기도 하다. 호흡이 잘 맞는 커플은 하나의 일을 처리할 때 각자의 서로 다른 장점을 잘 활용하여 역할을 분담하기도 한다. 야구라는 스포츠에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가 모두 필요하듯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은 서로 다른 둘이 협력할 때 훨씬 수월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위에 얘기했듯 좋았던 바로 그 지점이 얼마든지 나중에 헤어짐의 이유로도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비슷함'은 지속성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 요소이자 편안함을 만들어내는 주된 원료이다. 단기간 사귀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오래 갈 인연을 찾는 것이라면 비슷함은 필수적인 부분인 것 같다. 특히 각자 가진 중요한 부분들, 예를 들어 신념이나 가치관 등이 다르거나 의미를 부여하던 취향에서 차이가 많이 보이면 소통의 앞마당엔 어려움과 주저함이 하나씩 하나씩 피어날 것이다. 처음엔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언젠간 걸음을 막아설 정도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반대로 그 부분에서 서로 비슷함을 공유한다면 나눌 것들도 훨씬 많아지고 함께 있는 시간이 편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소통의 편안함과 그 중요성은 계속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상대방의 매력 포인트가 너무 높아 상대적으로 소통이 잘 되지 않음에도 간과하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그런 관계는 오래 가기 어렵거나 외형적으로는 지속이 되더라도 결국 누군가 불행 요소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우리는 점심 때 먹었던 메뉴를 가능한 저녁 땐 먹지 않으려 한다. 오늘 점심조차 어제와는 다른 종류의 음식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그런 우리지만 외국에 나가거나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또 익숙했던 한식을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게 모순적인 것인지 자연스러운 것인지 잘 구별되지 않는다. 둘 다이기도 하다. 비슷함과 다름의 가치는 쉽게 판결이 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고민을 더해가고, 찾아낸 답으로 계속 질문을 메꿔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의 실체는 점점 아득해지는 느낌이다. 이젠 눈과 귀로 감지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넘어서는 거대한 행성처럼 느껴지곤 한다.
지구과학을 총동원하여 이 지구라는 행성을 이해하려고 하듯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한때 쉼을 누렸던 곳도 얼마 지나지 않아 쉴 수 없는 곳이 되기도 하니까.
이번에도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
뭐 그렇더라도... 계속해서 묻고, 줄기차게 대답해보려 한다.
목적지는 여전히 멀어 보이지만 간간이 메꿔지는 지점에서 잠시나마 쉴 수 있는 걸로도...
일단은 그걸로 족하다.
===== 대사들을 조금 더 붙여본다. =====
| "내 잠을 빼주고 싶네요. 건전지처럼."
| "나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그거 참 공교롭네. 송서래 씨는 뭐라고 할 것 같아요?"
| "참… 불쌍한 여자네."
| "내가 안 보일 땐 안 보고 싶었어요?"
| "이제 내 손도 충분히 부드럽지요?"
| "나는 왜 그런 남자들하고 결혼할까요? 해준 씨처럼 바람직한 남자는 나랑 결혼해 주지 않으니까. 얼굴 보고 한마디라도 하려면 살인 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하죠."
| "당신… 생각났어요. 당신이 와서 이걸 볼 텐데. 당신이 무서워할 텐데."
| "난 해준 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