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계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7대 난제가 있다고 한다. 당연히 나와 같은 평범한 이들은 답이 아니라 문제의 의미조차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반대로 나처럼 평범한 인간들에게 있어선 그보다 더 어려워 보이는 난제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의 특이점은 우리에게 익숙함과 막연함을 동시에 던져준다는 데 있다. 일단 너무 흔하고 한편으론 너무 평범하기에 질문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없다. 어려울 것이 뭐 있냐는 듯한 순진한 아이의 표정으로 빤히 나를 쳐다보는 질문 앞에서 아이에게 사탕 내주듯 바로 답을 내밀면 좋겠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들어가기는 쉽지만 나오기는 어려운 거울미로처럼 쉽게 내디뎠던 발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갈 곳을 잃고 혼란에 빠지고 만다. 미로속 거울에 비치는 길은 진짜 길이기도 하고 동시에 진짜 길이 아니기도 한 것처럼 사랑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사랑이라 불러왔던 다양한 모습들을 계속 마주치게 되나 막상 '그게 정말 사랑이었나?'라고 확인하려는 순간 그 옆에 다른 형태의 사랑이 또 보인다는 점이, 분명 사랑인 것처럼 보였으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랑이라 칭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는 점이 우릴 곤란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그렇게 오래도록, 수없이 많은 이들이 답을 찾았음에도 아쉽지만 아직 정답이라 부를 만한, 모두가 동의하는 일관된 답이 우리에겐 아직 없는 듯싶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을 법한 질문임에도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 또한 풀리지 않은 난제였던가..?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답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린 질문과 함께했던 시간만큼 답과도 함께했을 것이다.
다만 답은 답이면서도 답이 아니기도 하다. 그게 어렵다. 태양처럼 지구상 모든 이들에게 동의를 얻을 만한 빛이 없었을 뿐 지금까지의 답들은 사랑을 찾는 이들이 자리한 공간에서 필요한 만큼 밝게 빛을 발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찾기를 구한 이들의 손엔 나름의 답들이 한 움큼씩은 쥐어져 있을 것이며, 그동안 고생한 이들이 남겨 놓은 흔적들은 우리에게 이정표 역할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최근에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보게 되었다. 영화의 영화적인 부분과는 별개로 사랑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엔딩 크레딧 뒤에 따라왔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질문이 퇴근하다 마주친 지인처럼 갑작스럽게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잘 지냈냐고 인사를 하는데... 반갑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한 순간이랄까. 반가움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도 지인과 술한잔 하러 들어가 서로의 이야기로 시간의 잔을 채웠을 것이다. 사랑 이야기란 것이 보통 그렇지 않나.
헤어질 결심 스틸컷 중
사랑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삶에 더 많은 시간이 포개질수록 사랑이란 것의 복잡성에도 조금씩 눈이 떠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정확한 기억은 아닌데 박찬욱 감독도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를 한번 써보고 싶었다고.
사랑이 만일 단순하다면 이 영화의 타임트랙을 김밥처럼 쪼갰을 때 그중 어느 조각은 사랑이라 말할 수 있고, 어느 조각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의 순진한 기대에 속한다. 더군다나 같은 조각을 놓고 누구는 사랑이라 말하고, 누구는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한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이소라의 애잔한 목소리가 가슴을 적시는 '바람이 분다'의 유명한 노랫말처럼 추억은 다르게 적힐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사랑 이야기가 그러했다.
주인공들의 감정은 분명 서로를 향했음에도 그 감정은 상대방의 가슴에 닿지 못한 채 그대로 지나가버렸다. 물론 이유도 있고 상황도 이해가 된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비켜가고 말았다. 다가올 때는 잡지 못하고 지나가버려야 아쉬움의 손을 뻗는다. 상대를 속여야, 그리고 자신을 속여야만 잠시 그럴듯해 보이는 연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절간을 배경으로 드러나는 두 주인공의 다정한 모습은 마치 현실의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는 가상세계로 들어와야 마음 놓고 연인이 될 수 있는 캐릭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현실에서 두 사람의 존재성을 규정짓던 조건들은 반대로 이제 두 사람의 관계성에 기여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감시와 관찰이 목적이었던 현실의 녹음파일이 절간이란 공간에선 전혀 다른 기능으로 바뀌는 장면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삐삐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아실 것이다. 조용히 남겨졌던 연인의 애틋한 목소리를 뒤늦게 수화기를 통해 확인하던 순간의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영화에서도 살짝 엿보이는 장면이 있었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중
그렇게 절간은 두 사람이 각자의 현실을 떠나 서로의 솔직한 감정을 나누는 별도의 세상으로 변한다. 사랑의 감정은 이제 비켜가지 않는다. 내 가슴에서 울리는 북소리는 바로 상대방에게 전달될 수 있었고 또한 바로 응답할 수도 있었다. 다만 가상세계는 결국 깨어나야만 하는 세계이다. 걱정과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안한 시간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부분이 끼어드는 순간 금방 깨어질 수도 있는... 얇은 얼음판으로 뒤덮인 호수 위의 스케이팅은 아름답지만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것처럼.
누군가에겐 사랑이었지만 상대방에겐 사랑이 아니었던 두 개의 시간을 겹치면 무엇이 남게 될까... 수학에선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합쳐지면 0을 향해 가는데 사랑도 그러할까... 서로를 향한 마음이 아무리 깊은들 전달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데 전달되지 않은 절대값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 사랑은 고백에 가까울까, 아니면 행동에 가까울까...
우리는 종종 말보다 행동이 진실에 더 가깝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 명제는 사랑에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모양이다. 입술을 통해 만들어지는 말이 담아낸 감정은 영화 내내 서로에게 잘 전해지지 않는다. 그 말들은 오히려 상대방이 없을 때, 상대방을 보지 않고 기계의 힘을 빌어 재생될 때 효력을 발휘한다. (의도적 설정이었겠지만) 심지어 두 사람은 사용하는 모국어도 다르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훨씬 빠르게 서로에게 가 닿고 훨씬 쉽게 이해된다. 감정만이 아니라 상대방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까지 전달된다. 먹고 난 도시락을 치우는 단순한 행동에서부터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사적인 행동까지, 밥을 만들어주고 잠을 재워주는 행위의 의미 하나하나가 다 서로에게 온전히 전달된다. 심지어는 숨 쉬는 것까지도.
우리도 대부분 그런 것 같다. 말은 쉽게 예측되는 우리의 기대치와는 다르게 의외로 우리의 감정도, 우리의 진실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심지어 사랑한다는 고백조차 그렇다. 인간은 말을 할 수 있는 존재이고 인류는 말과 언어로 소통을 해왔으며, 그 기능의 발전은 역사의 줄기만큼이나 이어졌는데 왜 개개인의 소통에선 말이라는 도구가 이토록 비효율적인 도구가 되고 말았을까 싶은 의문이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중
원래 제작 의도에 담겨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영화가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말이라는 것이 어쩌면 우리를 드러내는 도구인 동시에 우리를 감추는 도구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 우리의 의사소통엔 언어적인 부분보다 비언어적인 부분이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음성만 텍스트로 전환해서는 의사소통에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나 감추고자 하는 의지까지 포함되어 있다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건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미안하다는 말 속에 미안함이 전혀 없어도, 사랑한다는 말 속에 사랑이 빠져 있어도 우린 충분히 그 말을 사용할 수 있다. 맘에선 싫지만 말은 고맙다고 할 때도 있으니까. 그럴 때는 말이 오히려 맘을 감추는 도구가 된다. 취조의 현장이 독특한 형태로 그려진다. 피의자 입장에선 혐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말로 나를 감추는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취조실이며, 반대로 형사 입장에선 말 아래 감춰진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날카롭게 다듬은 질문으로 파고 들어가는 곳이 취조실이 된다.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모습 역시 그 설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감춰진 또다른 부분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서로에게 살포시 피어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 모두 꺼내놓을 수 없었던 그 마음이 취조의 말로 바뀌어 드러나기도 하니 독특한 뉘앙스가 만들어진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며 바라보던 취조실이란 공간을 마치 카페에 앉은 연인을 바라보는 느낌과 중첩되게끔 만들어버렸다. 영화 후반부 어시장에서 두 부부가 만났던 장면 역시 재미나다. 말로 대화하고 있는 이들은 외형적으론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소통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반면, 눈짓과 표정으로 대화하는 이들은 말없이도 서로의 감정을 전함에 무리가 없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우리가 하는 말의 본래 의미를 잘 모르면서 내뱉을 때가 종종 있다.
영화 초반부 탕웨이를 처음 만나자 박해일이 많이 놀라셨겠다는 말을 건넨다. 하지만 제삼자가 보기에 놀란 사람은 오히려 박해일 자신이었다.(박해일의 대사는 자주 이런 방식으로 사용된다. 영화 뒷부분, 탕웨이에게 수갑을 채워 나란히 차 뒷자리에 앉은 채 돌아왔을 때 차 문을 열어주는 후배 형사 김신영에게 너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묻지만 그 질문은 오히려 김신영이 박해일에게 했어야 하는 질문이다.) 결정적으로 한 사람은 사랑한다 말한 적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의 버려진 어휘들은 다른 한 사람에 의해 길어 올려졌고, 가슴에 새겨넣은 사랑의 언어가 되어 깊이 뿌리내렸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중
| 사랑을 '사랑'으로 인식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당연하겠지만 사랑의 가장 근간엔 좋아한다는 감정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종종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 너머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곤 한다. 이유가 뭘까. 사랑은 분명 좋아하는 감정이 맞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다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 또한 맞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좋아하는 감정에 사랑이라는 최종 딱지를 붙이기에 주저할 때가 있다. 사랑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만 같아서일까. 물론 이유는 다양할 수 있겠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좋아함과 사랑함 사이엔 논리적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는, 하지만 체감적으론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지만 막상 겹쳐놓고 보면 좋아함으로 표시한 영역 밖에서도 사랑은 종종 나타난다. 사랑은 분명 더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
반대로 이를 단순화시켜 평면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좋아한다는 표현에 담기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마음이 사랑으로 번역되는 것을 주저할 수도 있다. 단순한 사물에도, 취미활동에도, 선호하는 음식에도 가리지 않고 사용될 수 있는 좋아한다라는 표현이기에 특별한 대상에 대해서 품게 되는 감정을 그런 것들과 동일하게 놓는 것에 대해 무의식적인 저항감이 일어나기도 한다. 좋아한다는 감정들도 서로 무게감이 다르니 체로 걸러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만 좋아함의 감정을 다시 정제하여 사랑으로 가늠할 무게만큼 추출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어디쯤인지 알긴 쉽지 않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중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그 깊이감일 것이다. 좋아한다는 마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만 담아낼 수 있는 소중한 마음과 가치들이 분명 존재한다. 다만 우리가 평소에 그것들을 다 헤아려 '사랑'으로 명명하진 않는다. 물론 헤아리는 것 자체도 어렵다. 그러니 사랑을 사랑으로 인식하는 것 역시 간단치 않다. 오히려 좋아한다는 감정이 훨씬 이해하기도 쉽고 직관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아함이 커졌다고 느꼈을 때 대부분 그 감정을 사랑의 일차적 증거로 삼곤 한다.
때론 말 그대로 사랑에 빠져버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조금씩 물들어가는 사랑도 적지 않다. 오래도록 같이 알아왔던 친구나 동료가 어느 순간 사랑의 대상이 되는 스토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영화관 밖에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물드는 감정. 영화에선 슬픔을 이겨내는 경우에 대한 비유로 썼지만 실제론 주인공이 사랑에 물드는 과정에 대한 표현이었다. 그럴 경우 사랑에 대한 감정이 언제 피어났는지 알아채는 시기는 통상적으로 피고 나서 한참 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대로 안타깝지만 사랑을 인식하는 공통적인 타이밍이 있기도 하는 것 같다. 주로 헤어짐을 맞이하는 순간이 그렇다. 그때 가서야 자신의 감정을 헤아려보게 되고, 무게를 달아보고, 그 깊이를 들여다본다. 영화의 주인공들도 그러했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선 필연적으로 헤어짐이 사랑으로 연결이 된다.
| 행동은 말보다 가깝기는 하다. 하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 얘기를 하고자 함은 아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는 고백을 한번 들여다보자. 그 진정성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면 정말 감동적인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이 고백이 감동을 일으키는 포인트는 당연하겠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는 행동의 무제약성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그 무한의 가능성은 오롯이 날 위해서라는 단 하나의 목표로 수렴되고, 그에 대해 의심하지 않게 되는 순간 고백은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다.
하지만 저 고백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진심이 현실화되기 전까지만 빛이 난다. 생각해보자. '무엇이든'에 담길 수 있는 모든 것이 정말 다 괜찮을까? 당신을 사랑하는 고양이가 당신의 침대 옆에 죽은 까마귀를 놔줄 수도 있다. 그건 고양이니까?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을 너무 쉽게 보지 말자. 박정민 배우가 맡았던 홍산오라는 인물의 행동은 모두 사랑을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무엇이든을 빼고 조건이나 제한을 거는 순간 저 고백은 김이 빠져버린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말은 우리를 종종 답답하게 하나 행동은 우릴 불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잘 지냈던 연인이라도 결혼을 하거나 동거를 시작하면, 다시 말해 서로의 일상적인 행동이 겹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그래서 가장 먼저 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들부터 조율하기 시작할 것이다. 흔히 말하듯 치약 짜는 방법부터 변기 뚜껑이 있어야 할 적당한 위치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건 서로를 위한다는 목적성을 가진 행위라도 예외가 아니다. 수용되는 행동과 수용되지 않는 행동, 유의미한 행동과 무의미한 행동은 분명 존재하는 듯하다.
서로 그 패턴을 알아야 한다. 스마트폰 열 때만 패턴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중
| 위태로운 사랑과 안정적인 사랑
부부라는 관계는 어떤 면에서 사랑이라는 비행이 안정적으로 착륙한 공항과 같다.
하지만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비행에 더 가깝다. 그렇기에 우리의 가슴속엔 늘 비행에 대한 꿈이 있다. 위태롭지만 날고 싶은 것이다.
물론 부부라고 해서 다 사랑이 내려앉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부부는 비행을 안정적으로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당연히 안정적인 비행이 되기 위해선 지속적인 소통이 이루어져야 하고, 서로의 위치와 속도를 계속 확인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때론 한 사람이 불가피하게 착륙했을 때도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영화엔 주말부부, 섹스리스 부부 등의 깨어질 확률이 수치로 나타나는 대사가 등장한다. 수치는 결과치이니 결과로 향하고 있는 부부까지 포함한다면 해당 수치는 더 높아질 것이다. 많은 이들의 굳건한 믿음 속에서 여전히 안정적인 사랑의 최종 형태는 '부부'이지만 실제론 날지 않는 부부가 더 위태로운지도 모르겠다. 정작 사랑하는 이에겐 끊임없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박해일이 정작 아내의 입에서 계속 반복되는 이주임이란 존재가 남자였음을 의심조차 못한 것은 결국 사랑이란 동력이 없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아니면, 사랑은 필연적으로 의심을 동반하게 되는 걸까...
헤어질 결심 스틸컷(편집)
어렵다. 사랑이란 참 어렵고, 헤어짐도 참 어렵다.
생각이 많아졌다. 아니 생각만 많아졌다.
남녀 간의 사랑을 떠나 다시 사랑이란 뭘까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도 이어지지만
1번 문제도 풀지 못한 상황이니...
사랑은 그 형태가 변화무쌍하다.
형태가 없는 에너지가 형태를 가진 물질의 질량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수식처럼 분명하지 않은 무언가가 보다 쉽게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다른 존재로 변화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간혹 있는 것 같다.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사랑이란 존재는 다행히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나는 듯하다.
그게 책임이라는 형태가 되면 없던 인내도 품을 것이며
그게 희생이라는 형태가 되면 겸손을 두르게 된다.
그게 자비라는 형태가 되면 용서를 심을 것이며
그게 보호라는 형태가 되면 용기를 입을 것이다.
허나 사랑은 마치 날고기와 같아 조금만 소홀하면 부패하기도 쉬워
책임이란 이름은 반드시 뒤따라오는 권한의 허용범위에 눈을 감기 쉬우며
희생이란 이름으로 지나간 자리엔 어느새 보상에 대한 기대가 잡초처럼 피어나 있을 것이다.
자비라는 이름에 취하면 정의가 떠나기 쉬우며
보호라는 이름의 보디가드는 결국 통제라는 무기를 휘두를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무엇보다 가장 쉽고 빠르게 욕망이라는 형태로 변형이 되니
순수한 사랑은 실험실에서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얘기가 길어졌다.
내 탓이다.
얘기가 길어진다고 아는 것이 늘어나진 않는다.
내가 그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르고 있음이 다시 드러났다.
다만 언젠가, 또 어디선가 분명 다시 만나겠지.
조금 더 단순한 모습으로 그를 대할 수 있다면
조금은 더 편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