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별오름과 거문오름은 각자 품은 이야기들도 다르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오름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목적도 과정도 아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거문오름은 거대한 불길이 지나간 흔적 위에 오랜 세월이 한 겹 한 겹 쌓여 만들어진 오름이고, 그에 반해 새별오름은 매년 불타오르는 오름이다.
거문오름이 품고 있는 생명들 중에서
거문오름의 탐방로를 걷다 보면 현재의 세월은 결국 이전의 세월을 디딤돌 삼아 세워지게 됨을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긴 시간의 흐름 속에 자연적으로 잉태되고 소멸된 수많은 생명과 비생명의 체취와 자취가 거문오름의 토양에 나이테처럼 겹겹이 쌓여 있고, 그것을 자양분 삼아 각자의 자리에서 또아리를 틀고 숨쉬는 수많은 존재들 사이를 지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아니 그 생명체들의 집합체가 바로 거문오름이라 얘기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에 새별오름을 덮고 있는 것들은 매해 불태워지고 매해 새로 태어난다. 그렇기에 새별오름의 탐방로에서는 한 해를 거쳐 다시 태어나는 억새 이외에 다른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새별오름에 더해진 가치는 지질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인 가치가 아니라 문화적 가치일 것이다. 농한기에 묵은 풀과 해충을 없애기 위한 제주의 오래된 불놓기 의식이 이제는 축제라는 형태로 증폭되고 재조립되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결국 인간에서 갈리나보다. 인간이 배제된 형태를 지향하는 오름과 인간을 중심으로 다시 태어난 오름이라는 면에서 거문오름과 새별오름은 극명하게 대비된다고 볼 수 있다.
억새도 가득하고 푸름도 가득하다. 근데 왜 토토로의 배가 떠오르는 거니...
새별이라는 이름은 초저녁 외롭게 떠 있는 샛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왜 샛별이 연상되는 오름인지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은 찾지 못했다. 숙소가 제주의 동쪽에 있었기에 자연스레 주로 제주의 동쪽에 위치한 오름들을 먼저 찾아가게 되었는데 여정의 마지막 즈음에 다다라 오래간만에 서쪽에 갈 일이 생겼고, 그로 인해 예쁜 이름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새별오름을 만나볼 기회도 생겼다.
앞서 얘기했듯 새별오름은 인간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오름이다. 사람을 맞아들이고자 함이 목적임을 대놓고 표명하듯 주차장의 규모부터가 남달랐다. 대형 콘서트장에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무대 위로 주인공 새별오름이 서있고 그 앞쪽은 공연을 보러 올 사람들로 채워질 거대한 공간이었다. 들어오는 길에선 차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주차장 저 안쪽엔 차량들이 많이 보인다. 아... 거대한 주차장 안쪽에 먼저 자리를 잡고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은 푸드트럭의 행렬이었다. 그렇구나... 공연장에서 준비팀이 자리를 정돈하고 무대를 준비하듯 각각의 차량에선 각자의 분주함이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무대 한가운데 서서 차분히 내려다보고 있는 새별오름이었다.
새별오름에서 볼 수 있는 한라산은 좌우 오름들 중앙에 턱 자리를 잡고 가히 왕의 기세를 풍긴다.
불타는 오름으로 더 유명한 새별오름에선 정월대보름이 찾아오면 오름 전체를 태우는 들불축제가 열린다고 하는데 막상 오름 앞에 서니 저 거대한 오름이 통째로 불타는 장면을 상상하기가 솔직히 쉽지는 않았다. 만일 보게 된다면 장관일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불타는 오름을 보고 있는 맘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왜였을까...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경 중 하나가 불구경이라는데. 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11월 초, 그 시기의 새별오름은 억새로 시작해서 억새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올라가는 길, 넘어가는 길, 내려오는 길 모두 억새로 이어진다. 햇볕도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비추던 날, 억새들의 찰랑이는 은빛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통상적으로 오름의 주요 상징은 굼부리이지만 새별오름에선 굼부리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늦가을 새별오름 공연장의 타이틀곡은 '억새'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이틀곡만 무한 재생해서 들어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변 전망을 보기 위해선 등성이만 오르면 되고, 억새를 만나기 위해선 메인 탐방로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주요 탐방로를 살짝 비켜난 굼부리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새별오름을 지나며 바라보았던 장면들을 쭉 이어서 붙여보면 새별오름은 매우 독특한 풍광 아래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름의 가장자리 한쪽엔 인생의 종착점에 도달한 사람들을 위한 땅 위의 마지막 의식들이 경건하고도 묵직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런 반면 오름의 반대편 가장자리로는 인생의 위락을 상징하는 골프장이 아주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저 멀리로는 한라산이 보좌에 앉은 왕인 양 좌우 양쪽으로 늘어선 오름들을 신하들처럼 거느리고 있었고, 반대쪽으로는 푸르른 바다의 자유로움이 아스라이 느껴지고 있었다. 불타는 오름, 또는 억새라는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졌기에 새별오름을 찾은 사람들은 주로 그 모습으로만 오름을 보고 만족하지만 실제론 주요 탐방로를 살짝 벗어나면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모습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오름이었다. 높아지고 유명해지고 부유해지고픈, 우리들이 흔히 욕망하는 것을 같이 욕망하지만 때론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보여지고픈 모습의 괴리에서 오는 고민도 품고 있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지만 가끔 그 역할에 회의를 품고 자유를 꿈꾸는 듯한 마음도 어딘가 간직하고 있는 모습.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어딘가 측은하게 느껴지는 새별오름이었다.
새별오름과 이어진 한쪽 탐방로는 망자들의 누운 시선을 지나가는 길이다.
새별오름이 놓인 자리와 그 모습은 인생의 어딘가를 통과하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느껴져 어딘지 모르게 우리와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제주와의 마지막 인사는 거문오름에 남겨두기로 했다.
조금 더 일찍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비가 내렸던 지난 목금을 지나, 예약이 불가했던 주말을 지나, 배를 타야 하는 월요일이다. 결국 월요일 아침 9시로 예약을 했다. 그렇게 떠나는 날이 당도했고, 멀리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을 보려는 사람처럼 거문오름을 찾았다.
거문오름에서 만난 한 느릿한 생명
그런데 거문오름으로 가는 내내 비가 그치지 않는다. 예보에선 오전까지는 비가 온다고 한다. 이번 여행을 통틀어 특별히 예약을 해야 방문할 수 있었던 데가 딱 두 곳 있었는데 바로 곰배령과 거문오름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찾아가기로 한 날에 맞춰 비가 내리는지. 미안하다. 내가 반갑지 않았던 거니.
입구의 안내소에 도착해 여행을 앞둔 비행기가 취소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변 분위기를 살핀다. 아까보다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입구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우비를 입고 있었다. 다행히 이 정도 비엔 취소가 되지 않는다는 듯 가이드는 평소와 다름없이 올라가기로 예정된 사람들을 불러모아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중이다. 조심해야 한다는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목소리가 이토록 편안하게 들려도 되는 건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도 등재된 거문오름엔 이런 용암동굴의 흔적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편안하게 들렸던 가이드의 목소리는 출발이라는 테이프를 끊고 본격적인 오름 탐방이 시작되자 상대팀 응원석의 응원가처럼 살짝 불편함을 불러일으킨다. 가이드를 하는 가운데 필요한 설명 이상의 말들이 계속 늘어지고, 불필요한 농이 자꾸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한편으로 스타일의 문제일 수도 있고, 취향의 차이일 수도 있다. 실제로 나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하 호호 웃어주고 있었으니까. 그 사이에서 난 싫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살짝 애를 써야 했었던 것 같다. 한 번은 탐방객 무리 중에 있던 어린이 둘을 갑자기 사람들 앞에다 불러놓고 오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서울대 예찬론에 이어 서울대 입학 기원 얘기를 한참 풀어내는데 그때는 내가 오히려 아이들에게 미안해지기도 했다.
결국 난 조금씩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말에서 멀어지고 싶었던 마음이 절반이고, 사진을 찍다가 보니 자연스럽게 뒤쪽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 절반이었던 것 같다. 일행과 약간 뒤떨어진 곳에 있던 마지막 커플까지 앞으로 보내고 내가 최후방 인원으로 남게 되었던 순간, 그때 느낀 그 커플의 시선은 분명 내가 자신들보다 뒤로 가지 않길 바라는 듯한 시선이었던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이었을 수도 있다.
선착순이 아니라면 마지막 자리가 주는 편안함과 안도감도 꽤 매력적이다.
물기 가득 머금은 나무들 사이로 계속 걸어간다. 가지들 사이엔 물안개가 가득 끼어 있고, 나무껍질은 평소보다 훨씬 진득하게 줄기에 붙어 있다. 잎사귀들은 잠깐의 부딪힘으로도 후드득 놀라며 물방울을 털어낸다. 그럼에도 마냥 눅눅하게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빗속에서도 빛나고 있던 수많은 푸르름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건 생명의 신호였다. 그래, 그 생명이 어디 가겠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너희들은 늘 그렇게 거기에 있었겠지. 오히려 갑자기 찾아와선 화사한 표정으로 반겨주길 기대했던 우리가 민망해진다.
저 나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찾아오는 사람들을 귀찮다고 여길까, 아님 반갑게 여길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그렇듯 나무들의 마음 역시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 사람들 찾아오는 것을 반기는 활달한 녀석이 있다면, 누군가 찾아오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녀석도 당연히 있겠지. 나무들이라고 어찌 다 똑같을까.
재미있게도 나무들이 본격적으로 하늘을 향한 수직 만들기가 시작되는 지점이 비슷하다. 사람의 서른을 이립(而立)이라고 했던가. 나무들의 저 시기를 직립(直立)이라 불러도 될 듯싶다.
고양이는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다지만 이번 제주 숙소 근방에서 떠돌던 녀석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딱히 먹을 것을 주었던 것도 아닌데 처음 만난 나에게 계속 부비대며 다리 사이를 휘젓던 그 녀석과의 만남은 분명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냥이를 보았던 그때의 마음과 달리 그걸 떠올리는 지금의 마음은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막상 함께 있을 땐 아껴주고 싶다는 마음이 크게 일었지만 방에 들어와 다시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해본다. 지금 나는 여행 중이고 어차피 데려가서 키울 것이 아니라면 여기서 마음을 접고 차갑게 대해주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책임질 수 없었던 나의 입장 때문에 더 잘해주지 못했던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결국 이름도 불러주지(붙여주지) 못했다. 이름을 불러주면 정말 책임져야 할 것 같아서... 지금에 와선 그랬기 때문에 편해졌고, 그랬기 때문에 불편해졌다.
다시 나무 얘기로 돌아가자면 식물들에겐 얼마만큼의 마음을 기대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같은 종의 식물을 놓고 한쪽에는 계속 사랑한다고 얘기해주고, 다른 쪽에는 욕과 부정적인 말들을 계속 해주고 나서 성장과 상태가 달라짐을 보여주는 실험도 했었다는데 꼭 그런 실험이 아니더라도 신화와 동화 속에 등장하는 나무들을 보면 나무에 인격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인류의 마음은 생각보다 꽤 오랜 세월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나 역시 역사 속에 등장하는 정이품송 소나무 이야기에서 별다른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니 나무에게서도 인간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집에 두고 온 화분들이 걱정이다. 날 많이 원망하고 있을 텐데...
우리가 가는 길과 너희가 가는 길이 같지는 않겠지만 그게 또 다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긴 탐방길을 지나가자 열두 번 감긴 오전 태엽도 이제 거의 풀려간다. 그리고 기상청의 예언은 실현되고 있었다. 아직 빗방울을 다 말리지 못한 나무들이었지만 잎사귀 사이사이로 조금씩 햇살을 내어준다. 머리 위로는 하늘이기도 하고 나무이기도 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는데 바라보고 있자니 잎사귀가 보듬었던 빗방울이 간간이 떨어지고, 그 잎사귀들의 흔들림 속에 햇살도 살풋이 떨어진다. 갑자기 거문오름의 오랜 시간이 빠르게 감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먼 옛날 강물처럼 흘렀던 불길의 흐름이 잔잔해지고, 시간은 오래도록 뜨거움과 차가움을 중재했을 것이다. 바람과 물과 햇살은 그 중재의 토양 위에 정성스럽고도 조심스럽게 초록의 숲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다시금 시간은 초록 위에 겹겹의 색을 덧칠했다. 오랜 세월, 시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수많은 생명들이 뿜어낸 다양한 색들이 춤추듯 흘러내리는 곳이 바로 거문오름이었다.
손타지 않은 것들, 날것의 모습들이 펼쳐내는 당당함은 그 오랜 시간 물들인 정성과 끈질긴 투쟁의 산물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