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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ㄴㅏ름대로 Sep 04. 2022

자화상(自畵像)

미움 섞인 사랑이어라. 시인 윤동주.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나에게 우물이란 보았던 기억만 있을 뿐 사용했던 기억은 없는 대상이다. 기억 속에 간직된 이미지마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처럼 우물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내겐 없었던 경험이긴 하다. 하지만 잔잔한 수면에 거울처럼 비친 반대편의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경험은 나를 비롯해 누구에게라도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는 다 다르겠지만.



바람처럼 불어오고 모래처럼 흩어지는 아름답고도 슬픈 화면이 동그란 창을 통해 계속 이어진다. 우물에 담긴 작고도 투명한 바닥으로 바깥의 세상이 하나씩 펼쳐지고 흘러가는 시간도 잠시 머문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 한 사내도 같이 따라 들어온다. 어디서 뚝 떨어진 듯싶지만 우물이 비쳐낸 세상과 시간을 지나 다다른 시인의 자화상이었다. 그렇게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우물 안을 잔잔하게 채우고 있었다. 간혹 방송에서 접할 수 있었던 샌드아트 이야기 한 편을 본 것처럼 시의 여러 장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어느새 다시금 새로운 장면으로 바뀌듯 흘러가는 시였다.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 : 연의 구분은 출간될 때마다 조금씩 편집되었다고 한다.





아스라이 펼쳐지는 아름다움을 지나 쓸쓸하게 등장하는 한 사나이


우물 속 세상에선 구름이 흐르고 하늘과 바람도 지나간다. 고요한 그 창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우물은 사라지고 마치 꿈을 꾸듯 아름다운 풍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그렇게 한 폭의 그림 속에 빠져들 무렵 다소 갑작스럽게 한 사내가 등장한다. 아차 싶다. 그 사내 역시 달빛 아래, 구름의 그림자 사이에 이미 있었을 터인데. 멀리 보이는 풍경에 집중하느라 가까이 있었던 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살짝 일지만 넘어가도 괜찮은 분위기다. 산모퉁이로부터 시작된 장면은 한 사내를 보여주기 전까지 꽤 길고도 유려한 풍경들을 지나 지나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이끌더니 갑자기 훅 들어온 한 사람에게 모든 시선이 모아지게끔 만들었다. 시인이 사내를 불러오기까지 그 앞의 풍경들이 꼭 필요했던 과정이었다는 것만 이해해준다면 시인도 충분히 우리를 이해해줄 것이다.



우물에 담긴 사내는 사내가 들여다보고 있던 바로 그 세상으로부터 왔으며, 사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우물이 가감 없이 비춰주는 사내의 얼굴을 통해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를 들여다보는 창이기도 하고, 지금을 나타내는 거울이기도 한 우물물은 더하거나 빼는 것 없이 밝으면 밝은 대로,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는 대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 세상은 엄혹하고 암울했지만 시인에겐 그 또한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흐름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아니라면 감당하기 어려운 세상의 어지럽고 무거운 모습들을 잠시 지운 원형 그대로의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었을지도... 다만 어느 쪽이 되었든 그 세상을 지나 조금은 힘겹게 도달한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변해버린 모습을 우물물 속에서 씁쓸하게 마주 대해야만 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우물을 벗어나면 미움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을까


우물 옆에는 우물을 떠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우물에 머무르지도 못하는 시인이 있다. 한편으론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가 떠나지 못하는 대상이나 함께 있지 못하는 대상의 본질이 우물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 분명하니까. 우물이 아니라 우물이 비춰주고 있는 사람, 그가 시인의 맘을 밀어내기도 하고 다시 끌어당기기도 하고 있다.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과 가을을 지나 다다른 사나이의 모습에선 어찌 된 일인지 미운 모습만 드러난다. 하지만 맘껏 미워할 수 없는 것은 미움만이 아니라 사내에 대한 연민 또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마주보게 되는, 물에 비친 그의 얼굴은 시인이 일생을 통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던 부끄럽지 않은 인생 앞에서 한없이 감추고픈 자신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미워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시인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갈망했던 이에겐 더욱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단지 미워져 돌아갔다는 말로 적고 있지만, 내겐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데서 느낄 시인의 고통스러움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우물을 벗어남으로 미워하는 마음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움에 사로잡힐 만큼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더라도 그것 또한 자신의 모습임을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삶에서 맘에 들지 않는 것들만 따로 떼어내 헹궈버릴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인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다행이었을까, 아니면 당연한 일이었을까. 우물을 벗어나니 그 사내의 지금 모습은 보이지 않고, 대신 그 사내가 지나온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움으로 가득했던 마음엔 어느새 연민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시인이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당시 시대상황을 짐작해보면 지켜야 될 마음을 잃어버리거나 팔아버린 채로 살아가는 이들이 시인과 같은 이들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다른 이들과 비교했기에 스스로에게도 연민을 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개인의 엄격한 자의식으로 이겨내기엔 너무도 엄혹했던 주변 상황들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스스로의 모습이 실망스럽고, 그래서 미워하는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론 힘든 세상을 이렇게라도 버티며 지내온 자신이 안쓰럽기도 했을 것이다. 원망스러운 세상에서 억울한 존재로 지내야만 했었다. 타협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지키고 싶었던 스스로에게 미안하고, 살아있음이 죄스럽고, 그럼에도 한없이 부끄럽고, 부끄러워야만 하는 자신이 불쌍하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돌아가고 싶었다. 미치도록 되돌리고 싶었을 수도 있다. 허나 시인은 그 모든 것을 다시 꾹꾹 눌러 담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별다른 수식도 없고, 아무런 과장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를 담담하게 묘사했을 뿐인데 그 문장이 담아내는 의미와 감정이 너무도 크다. 자그마한 우물이 세상을 담아내 비춰주고 있었던 것처럼 짧은 문장에 긴 여정과 깊은 고뇌가 담겨 있어 전해지는 울림이 결코 작지 않다. 여기서 한 호흡 쉬어야만 한다. 시에서도 여기서 연이 바뀐다.



다만 상황은 바뀐 것이 없다. 우물 속에는 미워했었던 그 얼굴이 그대로 있다. 잠시 뒤로 물러났던 미움이 다시 전면에 자리를 잡는다. 미워졌으니 떠난다. 미워서 떠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더 미워하지 않기 위해 떠나는 것이기도 하다. 미움이 밀어냈는데 막상 떠나니 그리움에 사로잡힌다. 아 정말, 가슴 아픈 반복이다. 수많은 사랑 중에서 이렇게 미움이 섞인 사랑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들여다보기 쉬우면서도 또 들여다보기 가장 어려운 대상이 바로 '나'이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닿을 수 없는 곳에 다다르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리움이다.


예전의 사내는 지금과 달랐던 것을 알고 있기에, 멀리 떠나오기 전 먹었던 집밥이 그리워지듯 한때나마 직접 느껴봤었던 사내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 시의 마지막 행에 이르러 시인의 감정은 그리움에 다다르는 것으로 여정을 끝내나 보다. 자신을 원치 않는 방향으로 변화시킨 외부적 환경에 원망을 돌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스스로를 한없는 질책으로 몰아세우지도 않는다. 변함없이 긴 풍경을 지나 가을 앞에 추억처럼 사내가 있을 뿐이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추억 속의 그 사내. 분명한 것은 그 사내도 한때 봄날을 거닐었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메워주는 것은 그리움뿐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선 그리움이 그리움 이상으로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그리움은 자신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에게도 향해 있을 것이기에. 세력은 흥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하나 세상은 어제나 오늘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세상은 변함이 없지만 계절은 다시 반복될 것이다. 언제라는 결론을 알 수는 없지만 봄을 기다린 보람은 봄을 그리워하는 자에게 주어질 것이었다. 펼쳐진 하늘과 파아란 바람 뒤로 추억 속의 한 사내가 다시 서게 되는 날, 그날엔 우물을 떠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움이 다다르는 곳이 꼭 과거일 필요는 없다.







주인공과 같은 오브젝트, 우물. 그 양면성


다가오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는 사내가 시의 감정을 이끌고 있다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같은 자리에서 풍경과 감정을 모두 담아내고 있는 배경은 바로 우물이다. 평범한 일상적 우물이면서 동시에 특별한 상징성을 지닌 우물이었기에 가능했다. 우선은 시인이 살던 당시라면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일상적 우물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시인의 일상은 그 우물과 별개가 아니다. 하지만 시에서처럼 한편으론 애써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우물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 우물은 현실 속 어떤 특정한 장소의 우물을 지칭하기보다 물질적 의미가 훨씬 희미해진, 내면으로 통하는 창을 지칭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만 보긴 또 어렵다. 시의 마지막 행이 끝나는 시점까지 우물이 자신의 위치를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두 손으로 우물을 짚고 고개를 숙여 우물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이토록 생생하니 우물에 비유적인 특성이 있을지라도 우물의 현실성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을 듯싶다. 오히려 우물이 가진 물질성과 상징성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기에 그 줄을 튕겨 나오는 시의 감성이 더욱 생생하게 울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지극히 평범해 보였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잘 모르던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어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이가 있는 것처럼 우물도 그러했다. 한편으론 시인의 주변에 항상 존재하던 평범한 우물1, 2, 3 중의 하나이다. 물을 긷고, 빨래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게 되는 그 우물은 그래서 일상의 이야기가 만나고 기억되는 곳이다. 어쩌면 시인조차 모르는 사이 흘려버렸을 수 있는 삶의 흔적들이 땅으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던 틈새를 지나 다시 지면으로 밀려올라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우물이기도 하다. 늘 거기에 있는, 시인이 늘 찾아가던 일상성의 우물이라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시인의 지금까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춰줄 수 있는 우물이게 된다. 그리고 한편으론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외딴 우물이 있다. 물을 길으러 가는 곳도 아니고, 사람들을 만나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말 그대로 외진 곳에 있는 외딴 우물이며, 시인은 굳이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홀로 산모퉁이를 돌아 그곳을 찾아가고 있다. 시인의 고백처럼 가만히 들여다보고자 가는 우물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볼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쉽게 바라볼 수 있는 것 같지만 의외로 자신의 진솔한 모습 앞에 다다르기 위해선 때론 의식과도 같은 과정을 지나야 하는 경우들이 있으니까. 누군가는 목적 없이 돌아다닌 여행을 통해, 누군가는 저 바닥에 뒹굴던 파편 같던 자신을 하나씩 모아 글로 옮기며 또는 색을 입히며 다시금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땅엔 아무도 없고 하늘 달빛만이 밝게 빛나는 그때, 시인은 그 우물에서 자신의 지나온 모습을 보며, 또한 그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시인은 분명 우물을 찾았다고 말했으나 어쩌면 우물이 시인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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