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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언 Apr 26. 2024

정신 체리

#가난한 집중력 


출근길 지하철에서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의 날개, 목차, 프롤로그까지 약 30페이지를 읽는 데에는 20분 정도 걸렸다. 그리고 약 30페이지의 책을 읽으면서 대략 열 번 정도 정신을 놓았다.


** 겨우 30페이지를 읽으며 했던 잡생각들 목록

1. 오.. 맞아 집중력 떨어지지 떨어져. 아무렴. 참, 언젠가 가족여행을  핸드폰을 잠시라도 꺼두거나 디지털카메라로만 딸내미의 사진을 찍으면 어떨까?(나름 책과 연관된 잡생각) 

2. 요즘도 디카쓰나? 당근에 얼마나 하려나(잡생각의 연장선)

3. 아 맞다 어제저녁에 고기 먹는데 와사비가 없었지. 쿠팡에서 생와사비도 추가하면 로켓프레시 최소 주문 금액 맞출 수 있겠다 아싸. (당근마켓에서 음식이 떠올랐나..) 

4. 남태령 역 즈음에서 지하철 전력공급방식 변경으로 불이 꺼져 책 읽기를 잠시 멈추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다 핸드폰을 하고 있어서 멈출 기색이 없네. 이럴 땐 또 집중력 대단한걸? 키키 (마침 불이 꺼짐..)

5. 아,, 바지가 좀 낀다. 저녁에 샐러드 먹어야겠다. 오이 썰어 넣으면 맛있는데 남편은 오이를 안 좋아해서 많이 살 수가 없다. (불이 꺼져 고개를 들었는데 왜인지 바지가 낌.)

6. 옆자리는 임산부좌석. 나도 저 자리를 찾아 앉을 때가 있었는데.. 얼마나 힘들까?(남태령역에서 임산부가 승차함) and so on...


텍스트와는 전혀 별개의 생각에 빠지는 나의 미천한 집중력은 정말 비루하기 그지없었다. 눈은 책을 읽고 있지만 (좀 더 솔직히는 읽고 있다고 착각) 생각은 다른 곳에서 있어 몇 문단을 허탕 치길 반복한 것이다.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낸 뒤 다시 몇 문장을 뒷걸음질 쳐 다시 읽어 내려가지만 또 비슷한 문장에서 나의 가난한 집중력은 그만 힘을 잃고, 동시에 길을 잃고야 만다.


#Concentration wins all 


몇 해 전 영어학원을 다닐 때다. 그 학원은 독특하게도 무조건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어 거의 외울 지경으로 읽게 한 뒤 영상을 찍게 하는 교육방식을 추구했다. 그러니까 학원이지만 펜을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영어선생님 Terry는 큰소리를 문장을 읽을 때 제발, 반드시, 꼭 문장만 생각하라고 했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 읽는 것은 그저 노동일뿐이라며, 뜻이나 뉘앙스를 이해하면서 읽으려 노력하면 공부가 된다는 게 그녀의 철칙이었다. 때때로 정신을 놓고 껍데기 알파벳만 영혼 없이 중얼댈 때면 가차 없는 그녀의 피드백이 돌아오곤 했으므로 한 줄 한 줄 정성을 다해 읽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6개월간 바로 내 눈앞의 문장에 집중하고 뜻을 파악하려 애썼을 즈음, 영어실력의 변화보다 먼저 찾아온 것이 있었다. 바로 다양한 인풋에 대한 집중력과 이해력의 상승이었다. 친구들의 말도 경청하게 되니 깊고 진솔한 대화도 가능해졌고, 뉴스도 흘려듣지 않고 책 한 줄도 마음을 다해 읽었더니 자연스레 인사이트도 생기는 게 체감될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다시 바닥났지만...) 당시의 집중력은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큰 무기이자 타인에 대한 너른 이해의 원천이었다고 생각한다. 


퇴근길, 숏츠를 보며 기억에도 남지 않을 영상들로 머리를 어지럽히던 내가 다시 그때의 영어학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어쩌면 그때의 그 집중력이 그리운 것일지도 모른다.


Oops, it's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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