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의 일상 이야기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 네 살 11월에 나는 네 살 연상이자 대학 선배였던 남편과 결혼했다.
남편은 나보다 한 해 먼저 졸업하고 공업도시로 불리는 한 지역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나 또한 졸업 후 남편이 있던 도시의 작은 사회개발학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곱게 자란 딸 아이가 혼자 자취 하는 것이 몹시 걱정스러우셨던 부모님께서는 남편의 '사람됨' 하나만을 보고 날을 잡았다.
삽십 년 전인 그때도 스물 네 살의 결혼은 또래들보다 빠른 것이었다. 살림은 커녕 전기밥솥에 밥이나 할 줄 알았던 내가 결혼을 한다니, 또래보다 어른스러웠던 친구 A는 결혼 전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무슨 결혼을 그렇게 일찍 하니? 결혼은 하는 날부터 고생이야...."
결혼 혹은 결혼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 전 생활도 그닥 호락호락하지는 않았기에 A의 말은 그저 일찍 결혼하는 친구를 위한 안타까움 쯤으로 듣고 지나갔다.
오랜 세월 결혼생활을 해오셨기에 그 힘듦을 충분히 알고도 남았을 아버지께 A가 한 말을 전하자, 우리 아버지는 '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나 그랬지, 요즘은 안 그렇다."
아버지께서는 심지어 결혼식 전날 공연히 마음이 울적해진 나를 향해
"정아, 옛날도 아니고 요새 어디로 시집을 가든 부모를 못 보나, 형제자매를 못 보나, 옛날처럼 시부모를 모시고 살기를 하나..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힘들면 전화하면 되고 언제든 차만 타면 왔다갔다 할 수 있는데 뭐가 그래 울적하노? 결혼식 전에 눈물 보이면 안된다. 즐겁게 보내야지."
하시면서 웃으셨다. 아버지께서는 결혼을 하는 것이 '딸을 떠나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하나 얻는 것'이라고 하시며 기분좋게 술잔을 기울이셨고 나와 발맞춰 신부 입장 연습을 하기도 하셨다.
옛날에도 그랬고 요즘도 그렇다
실전에 접어들면서 나는 비로소 A의 말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결혼은 준비 과정도 만만치 않았지만 당일에 예식을 치르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새벽부터 일어나 예식을 치르고 이후 이어진 폐백을 드리면서 나는 내가 태어난 이래 가장 많은 절을 해야 했다.
종일 굶다시피 하다가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겨우 식당에 앉아 한 술 뜨려는 순간 다시 식당 안에 계시던 각종(!) 어르신들을 만나 감사 인사를 드려야 했다. 허겁지겁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갈비탕 한 그릇에 밥을 말아 먹은 뒤 친구들이 모여 있는 피로연장으로 달려갔다.
신랑신부를 골탕먹일 궁리로 벌써부터 온 얼굴에 웃음기 가득했던 짓궂은 남편의 고향 친구들은 신부의 굽높은 고무신을 벗겨 거기다 위스키를 가득 따랐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신부를 사랑하는 만큼 위스키를 마시라고 했다. 어쩌겠는가.....
장인 어른을 닮아 역시 술을 좋아하고 또 장인 어른과는 다르게 술이 셌던 남편은 호기롭게 받아 원샷을 했다. 쏟아지는 박수 소리와 휘파람 소리, 스피커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로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서 빨리 어디론가 가서 눕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나를 향해 걱정마라는 눈빛을 보냈던 그는, 결국 여행 가방도 제대로 못 들만큼 취했고, 겨우겨우 비행기에 탑승해서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신혼여행은 우리 두사람이 서로 사랑한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
11월의 제주는 볼 것도 많았고 날씨도 좋았으며 90년대라 훼손된 곳이 덜해서인지 조용하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렇게 신혼여행을 마치고 양가에 인사를 다녀와서 마침내 우리의 보금자리에 도착했다.
그 때까지도 아무 걱정 없이 해맑던 나는 쌀통에 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쌀이 없는데 반찬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통장에 돈도 없었다. 정확히 잔액이 '0'이었다. 그렇게 '0'으로 맞추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폐백 때 받은 절값이 얼마간 남아 있었으니, 집안 어른들께 부지런히 절을 한 덕분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돈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어느 시인은 '나는 돈 벌기 위해 지구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나와 남편은 '돈 벌기 위해 결혼한 것'처럼 살았다. 아이가 태어난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그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더 바쁘게 살아야했다. 먹고 살기 위해, 아이를 키우기 위해 그리고 따뜻한 미래를 위해 '돈을 버는 일'과 '돈을 모으는 일'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보람은 있었다. 그 사이 사이에는 행복과 기쁨의 순간도 적지 않았다.
결혼 생활에서 정말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관계'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랬다.
그리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도 나와 남편을 어렵게 한다.
따뜻했던 가족들이지만 한 번쯤은 본의 아니게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은 경험이 누구나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를 낳아준 부모조차도 때로는 나의 진심을 몰라 주는 일이 있건마는, 한 사람을 알게 되어 맺어진 가족들이 나를 오해하고 내가 그들을 오해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이던가.
저마다의 살아온 역사와 자격지심이 한데 섞여 상대를 오해하고 방어적인 태도로 공격을 일삼을 때는 정말이지 '가족'만 아니라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서로 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생채기를 내는 아픔....
돌이켜보면 친구 A는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들과의 관계에 대한 어려움을 어디선가 미리 듣고 내게 알려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계' 그리고 '태도'에 대해 배우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식이라곤 아들 하나 뿐이지만 그 아이가 서른이 된 올해, 나는 며느리가 들어오면 어떤 시어머니가 되어야하나 생각해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 가지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나의 아들을 사랑하는 그녀를 며느리로서 받아들이고 존중하며 아껴줄 것.
어쩌면 가장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도록 애쓸 것이다.
우리 어머니 세대와 비교하면 우리 세대는 비교적 시집살이가 덜 했다고는 하나, 그것도 집집마다 다를 것이다. 이전 세대의 힘듦을 몸소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자신이 겪는 문제는 언제나 가장 힘들다.
요즘 MZ세대라고 불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시집살이'란 말은 조금 어색할 듯도 하다. 그러나 우리 세대가 보기엔 저 정도를 가지고 시집살이라고 하나 싶어도 세대가 다른 그들에게는 우리 때와는 또다른 '결혼생활'의 힘듦이 있다. 부모 복을 타고 나지 않은 이상, 요즘 부부는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집은 커녕 전세집 하나 얻기도 어렵다. 그러니 아이를 낳아 키우기도 힘겨운 세상이다.
30년이 넘는 결혼생활 동안 삶이 힘들 때면 한 번씩 부모님께 애들처럼 투정을 부린 적이 있다. 왜 그렇게 일찍 나를 시집보내셨냐고. 저가 좋아서 한 결혼이면서도 부모님의 속을 끓였던 철없는 딸이었던 것.
결혼생활이 힘들다는 것은 '옛날에도 그랬고 요즘도 그렇다.' 안타깝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