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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태 Apr 09. 2021

대인 공포증 환자, 강단에 서다

자신에 대한 문제점,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당신입니다


-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괴로워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그런 분들에게 다소 도움이 될 것입니다 - 


"강사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강사님께서는 2000년도 신지식으로 선정되셨으며, 화천군청 공무원 신분이면서 특이하게 <○○언론사> 시민기자로도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어렵게 시간을 할애해주신 강사님께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사회자의 화려한 소개에 어색한 자세로 일어섰습니다.


사실 난 대인 공포증 환자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내게 제일 두려운 건 소풍이었습니다. 봄, 가을로 나눠 매년 두 번씩 진행됐습니다. 산골 분교 전교생이래야 고작 20명 남짓. 소풍 프로그램 중 빠지지 않던 항목은 개별 노래 부르기입니다. 제발 비가 내려 소풍이 취소되길 바랐지만 한 번도 그런 행운(?)은 오지 않았습니다.


소풍이 싫었던 건, 남들 앞에 서야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대중 앞에 서면 울먹이는 것도 아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뀌고 목소리뿐 아니라 온몸까지 심하게 떨었습니다. 선생님 강요에 못 이겨 "학교종이 땡땡땡" 이란 노래를 국어책 읽듯 빠르게 불렀습니다. 박수는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비웃음, 놀릴 것 같다는 불안감. 자신감은 점점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를 진학할 수 없었던 상황. 쾌재를 불렀습니다. 더 이상 많은 사람들 앞에 설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검정고시에 합격 후 군 입대, 대인 공포증은 단체생활 부적응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렵게 군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제대했습니다. '전역 후 뭘 해야 하나'라는 고민은 오래 하지 않았습니다. 홀로 수행하는 스님이 되기로 했습니다. <반야심경> <천수경>을 깡그리 외웠습니다. 그렇게 해야 스님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광신도였던 사촌누님께 큰 스님을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네가 가진 것 다 버렸다고 생각할 때 다시 말해라."

'대체 뭘 버리라는 건가!'


결국 스님을 포기하고 면사무소에서 혼자 열심히 일하던 한 직원을 떠 올렸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보기로 했습니다.  


공무원 생활 중 제일 싫었던 건 한 달에 한 번 있는 반상회 날이었습니다. 반회보 들고 마을에 나가 주민들에게 설명을 해야 합니다. 주민들에게 빠르게 읽어 주곤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곤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말단 직원 땐 남들 앞에서 설 기회가 적다는 겁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회의 주관, 행사 사회 등 상황은 달라집니다.


'남들 앞에 서는 연습을 하자. 뭘 어떻게?'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산에 올라 소리 지르기. 별 효과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즈음 인터넷 윈앰프 방송을 알게 됐습니다. 윈앰프 방송이란 어떤 사이트에 채팅방을 만들고 음악도 들려주고, 멘트도 하는 라디오와 비슷한 일방 통신입니다.


그러려면 많은 음악이 필요합니다. 당시엔 '소리바다'란 사이트를 통한 무료 음악파일 다운로드가 가능했습니다. 2만여 곡 정도 확보 해 놓고 방을 열었습니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듣는다고 가정한 후 마음껏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들어댔습니다.


한 명, 두 명, 세 명... 참여자가 늘기 시작하자 말하는 병적 부담이 시작됐습니다. 방송 시작 전, 백지에 1시간 분량을 빼곡히 써 놓고 읽는 형식으로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굳이 맨트를 미리 써 놓지 않아도 날씨 이야기며 당일 주요 뉴스 분석 등 즉흥적 소재 구상 능력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내친김에 24시간 방송(24시간 운영되던 윈앰프 방송) 오디션에 합격하기도 했습니다.


말하는 기술은 배웠지만 대중 앞 자신감에 대해선 미지수였습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란 가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무렵 청내에 부서별 대표자 선정, 행정혁신 발표 제도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지원하지 않으면 주무담당인 내가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너한테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 하나만 하자."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척, 바쁘다는 동료 계장을 불러내 술 한 잔 사며 대표선수 부탁을 했지만, 답은 "노(No)"입니다. 

까짓것 한번 부딪혀보자. 제발 1등 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1등은 군청 대표선수 자격으로 강원도대회에 참가해야 합니다. 하늘도 무심하지, 발표자세보다 내용을 중시했는지 내가 1등을 한 겁니다.


강원도 대회. 일찍 출발해 발표장을 둘러봤습니다. 조명 때문일까, 관객들은 내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지만 객석이 어둡기에 나는 그들을 잘 볼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열심히 스크린만 보며 발표했습니다. 강원도 18개 시군 중 3등을 했습니다. 상금보다 스스로 대견스러워 몇 날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인기피증극복한 줄 알았는데...


며칠 뒤, 군수 앞에서 멘토링 선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손이 덜덜 떨리고 목소리마저 기어 들어갔습니다. 전 직원 앞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한 겁니다. 성격은 타고난 것인가 보다... 좌절은 빨리 찾아왔습니다.


그대로 주저앉으면 패배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딸아이가 다니는 중학교로부터 전화를 받은 게 아마 그 시기였을 겁니다. 학부모 자격으로 지역경제 이론 강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장기출장 계획이 있어 곤란하다고 적당히 둘러댔습니다. 이대로 언제까지? 딸과 아들 앞에 떳떳한 아빠가 되지 못할지 모른다는 부담감이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다음 해, 운 좋게 1년 장기교육 대상자로 뽑혔습니다. 교육기간, 남들 앞에서 발표해야 할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기가 생겼습니다.


'1년 동안 아무것도 배우지 못해도 좋다. 대중 앞에 나서는 기회로 삼자.'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분임토의, 개별 발표에 무조건 나섰습니다. 교육기간 중 발표 기회는 많아야 서너 번 정도인데 무려 10번을 했으니 변화를 위해 무진 애를 썼던 시기였습니다.


"저기요 말씀하실 때 위아래 보시지 마시고, 눈동자도 왔다 갔다 하시잖아요, 고정된 시선으로 카메라를 보고 말씀해 주세요, "


교육 이후 발령받은 부서는 군정홍보담당. TV나 방송매체를 통한 인터뷰 기회가 많은 자리입니다.

20초 인터뷰를 하는데 10번은 NG를 냈을 겁니다. 보다 못한 기자가 "당신 말고 이 내용 좀 아는 계장 없습니까?"라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형부 인터뷰하는 거 봤는데요. 표정과 말하는 게 너무 불안해서 조마조마했어요."


내 인터뷰 방송을 본 처제의 말에 "이젠 죽어도 인터뷰 안 한다"란 생각도 했습니다. 

저변에서 치밀어 오르는 오기. 이후 방송사 인터뷰만 있으면 내 업무가 아니더라도 밤새 연찬한 후 응했습니다. 되든 안 되든 부딪치는 겁니다. 


"여기 KBS 라디오 방송국인데요. 주민 중에서 지역현황을 좀 알고 일주일에 한 번씩 인터뷰를 할 만한 사람 한 명만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네, 한 명이 있긴 한데 직업이 공무원인 사람은 안 되나요?"

"괜찮습니다. 그런 분이 있어요? 그분이 누구죠?"

"접니다."  


스스로 음색을 점검해 보고 상황에 따른 목소리 톤 조정도 했습니다. 지역에 대한 공부 기회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매주 목요일 라디오를 통해 지역소식을 전하는 통신원을 맡았습니다. 그즈음 홍보담당에서 관광기획담당으로 인사발령이 났습니다. 후임 담당에게 내가 해오던 일 모두 인계했지만 통신원 일은 넘기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연습을 좀 더 해보자는 의도였습니다.


강단에 서다


"트위터를 이용한 홍보를 하신다던데,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명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대신 강사료는 없습니다."


어느 날 강원도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강사료가 문제겠습니까!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자신 있는 분야는 다른 가 봅니다. 30여 명 남짓한 직원들 앞에서 질문 유도까지 하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관광해설사로 나섰습니다. 군수는 휴일도 나와 성실히 일한다고 평했겠지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는 기회 때문이었습니다. 내 업무인 지역관광 홍보라 목소리나 표정에 자신감도 붙었습니다.


"'SNS를 이용한 홍보, 이렇게 하면 망한다?' 참 특이한 제목인데, 어떻게 하면 망하는지 강의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게 SNS는 자신 있는 분야였습니다. 강의 요청이 올 때마다 대학이나 기업체 등 닥치는 대로 나섰습니다. '유익한 강의였다'는 찬사를 듣고 돌아오며 '그 중요한 부분을 왜 말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아쉬움도 행복이었습니다. 


'글쓰기 강좌, 산천어축제 성공사례, SNS를 활용한 홍보기법' 등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가리지 않고 나서곤 했습니다. 그들은 내 변화를 이끌어 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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