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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숲 with IntoBlossom Aug 07. 2023

[붉은신] 그곳에 붉은신은 없었다

거울 앞 그림책 네 번째.


서명: 붉은신

저자: 글/그림 오승민

발행: 만만한책방(2022)



<붉은신>, 만만한책방 제공


 동그랗게 뜬 생쥐 한 마리가 앞표지를 가득 메웁니다. 강렬하게 응시하며 놀란 듯 경이로운 눈빛으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생쥐. 그 무언가에 의해 파란 생쥐의 몸은 붉게 물들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생쥐가 바라보는 것은 붉은 신이었을까요? 뒤표지에서는 생쥐가 처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둡고 음습한 어딘가에 갇혀있는 파란 생쥐는 창살 넘어 세상을 바라봅니다. 붉은신이 무엇이길래 저리도 놀란 표정을 짓는 걸까요. 파란 생쥐는 왜 갇혀있을까요? 궁금을 불러오는 표지에서부터 그림책 <붉은신>은 시작합니다.



<붉은신>, 만만한책방 제



무지개 끝에 하얀 배가 있다네.

병들고 아픈 동물을 기다리네.

거기에 생명을 살리는 신이 있다네.

죽음에서 삶으로 돌려보내 주는

붉은신이 있다네.


생쥐의 이름은 '꼬리끝'. 호기심 많은 꼬리끝은 눈먼 늙은 할아버지 쥐의 구슬픈 노래에 관심을 보입니다. 약하디 약한 꼬리끝은 할아버지 쥐의 노래에서 희망을 찾길 바랍니다. 병약한 꼬리끝은 할아버지 노래 속의 삶을 돌려준다는 붉은신을 찾아 하얀 배로 떠납니다.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여정인 줄 꼬리끝이 모를 리 없지만 그만큼 꼬리끝은 절실합니다. 할아버지가 말한 하얀 배는 커다란 하얀 건물이었네요. 꼬리끝은 하얀 배 안으로 들어갑니다.



<붉은신>, 만만한책방 제공
<붉은신>, 만만한책방 제공


 건물은 미로 같습니다. 과연 이곳에 붉은신이 있는 걸까요? 꼬리끝은 생명을 찾아 하얀 배로 들어왔지만 그곳은 되려 위태로운 생명줄을 잡고 있는 수많은 동물들이 있습니다. 동물의 시선으로 바라본 동물실험실의 광경은 실로 끔찍합니다. 정체 모를 약에 검은 눈물을 흘리는 토끼, 울퉁불퉁 제 모습을 잃은 채 흉측하게 변해버린 개구리, 살가죽만 남은 개가 그들입니다. 분명 생명을 살린다고 했는데 이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누구'의 생명을 살리는 곳인지는 우리 모두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를 위해 희생되고 있는지를 꼬리끝의 시선으로 불편하지만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붉은신>, 만만한책방 제공


 붉은신은 하얀 배에 있지 않았습니다. 죽음만이 있는 하얀 배에서 붉은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만 있었죠. 생명의 온기를 주는 태양은 바깥 너머에 존재하니까요. 탈출하려던 꼬리끝은 제 이름을 잊은 채 559라는 숫자로 살아가는 오랑우탄을 만납니다. 그 둘은 서로를 도우며 탈출을 감행합니다. 꼬리끝과 559는 하얀배 바깥으로 가까스로 나오게 되고 뉘엿뉘엿 지는 붉은 신과 마주합니다. 하지만 아직 하얀배 안에는 수많은 동물 친구들이 남아 있습니다.


 오승민 작가의 그림책은 언제나 아련함이 묻어납니다. 예전 앨범을 꺼내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번지듯, 스며들듯 다가오는 오 작가의 그림은 저미듯이 스쳐가는 통증과 같습니다. 그림책 <붉은신>도 마찬가지로 다가왔습니다. 밴드를 붙이지 않고 상처 난 맨 살갗을 그대로 드러낸 듯한 <붉은신>을 감상하면서 작업 당시 오 작가의 마음을 상상해 봤습니다. 우리가 무심히 먹는 진통제 한 알에도 수많은 동물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작가는 분명 아프고 미안하고 잊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었겠지요. 혹자는 <붉은신>이 너무 적나라하고 무섭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작가의 그런 마음을 공감하며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리 쉽게 치부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조금 뜬금없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영화 <암살>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고? 모르지.

그렇지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불확실한 즉각의 결과보다 상황과 소신을 피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그림책은 언제나 독자들을 불편하게 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그림책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가치 중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눈먼 하얀 쥐 할아버지, 호기심 많은 생쥐 '꼬리끝',

붉은신을 마주하며 비로소 이름을 되찾은,

더 이상 599가 아닌 오랑우탄 '긴팔'

그리고 그들이 바라보던 붉은신 태양.


실험으로 인한 동물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다고 알고 있다고, 미안하다고, 잊지 않고 알리겠다고 다짐하고픈 오승민 작가의 그림책 <붉은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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