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중에 입시 12
조카의 엉덩이는 새털보다 가벼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상상력과 무한한 호기심 때문인지, 진중하니 앉아서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든 아이였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도 길가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 개미 한 마리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쳐다보고 만져보고 이야기도 건네보는 아이였다.
문제집을 풀 거나, 숙제할 때도
“고모, 이 사람들은 표정을 왜 이렇게 찡그리고 있을까요?",
"이 아이는 왜 혼자 학교에 가요?",
"이 학교 급식은 우리 학교보다 맛있을까요?” 등등.
예문에 등장하는 상황이나 삽화에도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고는, 그 궁금증이 해소되어야만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 조카가 ‘진득하게 앉아서 오랜 시간 그림만 그릴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걱정이 밀려왔다.
믿는다고 말은 말했지만, 내가 조카를 믿는 것과, 조카의 엉덩이가 의자 위에 오랫동안 있는 것은 별개였다.
미술학원 다니는 것이 어떤지 물어보면 언제나 괜찮다는 말만 했다.
차라리 ‘힘들어요’, ‘어려워요’ 등의 푸념이라도 늘어놓았다면, 예방 주사를 맞은 것처럼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조카는 무심한 듯 “괜찮아요”만 반복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면 되었겠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입으로만 믿는 척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미술학원에서 첫 번째 평가서를 받는 날이 되었다.
‘집중력이 부족하니 더 노력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으리라.
그런데 웬일인가? ‘실력은 아직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집중을 무척이나 잘한다’라는 평가였다.
조카가 태어나고도 한참을 같이 산 세월도 있으니, 조카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도 정말 자유롭게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단면을 보고, 전부를 알고 있는 듯, 섣부른 판단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라는 말처럼, 찰나의 경험만으로도 본질을 꿰뚫어 보는 능력자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타인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다니, 얼마나 우스운가!
조카의 평가서가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단박에 깨달음에 경지에 이르러 더 이상 수행할 필요조차 없다는 돈오돈수보다,
단박에 깨달아도 끊임없이 수행이 필요하다는 돈오점수가,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나에게 위로를 주었다.
조카의 미술학원 평가서는 나에게 희망 안내서처럼 느껴졌다.
사실 조카가 미술로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의아했다.
솔직히 의아함보다는 의구심이나 의심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단전의 힘까지 끌어모아 뱉어내려고 해도,
나오지 않고 버티는 가래 덩어리 마냥,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조카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못된 의심 덩어리가 끈질기게 남아있었다.
‘혹시라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미술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국·영·수보다는 미술이 더 쉬워 보여서 선택한 것은 아닐까?’하는 염려가 있었다.
하지만 학원 평가서에 나타난 조카의 마음은 미술을 향한 진심과 열정이 가득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가래 덩어리를 시원하게 뱉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본인이 진짜로 좋아하는 걸 하니, 중구난방 뻗어 나가기만 하던 상상의 가지도, 한 곳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조카의 엉덩이는 낙지의 빨판만큼이나 강력한 힘으로 의자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조카가 그렸다는 그림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조카의 그림은 너무 멋져 보였다.
그런 그림을 그려낸 조카가 대단해 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미술 시간에, 열심히 그린 그림을 보시던 담임선생님은 “펭귄 가족을 정말 멋지게 잘 그렸구나!” 하시면서 나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셨다.
선생님의 따뜻했던 그 칭찬으로 나는 그림과 완전히 결별을 선언했다.
선생님은 아무 잘못이 없으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선생님께서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칭찬을 해주셨는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선생님의 칭찬과 다르게 내가 펭귄을 그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화려하고 멋진 공작새 세 마리를 그렸다.
나의 아름다운 공작새가 선생님 눈에는 통통하고 건장한 펭귄 가족으로 보인 것이다.
만약 그때 선생님께서 칭찬이 아닌 질문으로 해주셨다면 어땠을까?
“그림이 참 멋지다. 어떤 그림인지 말해줄 수 있을까?”
그랬다면 나는 아마 내가 느끼고 생각한 공작새에 대해서 즐겁고 신나게 말했을 것이다.
아마 공작새를 주제로 동화 한 편도 뚝딱 만들어 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멋진 펭귄 가족을 그렸다는 칭찬에, 차마 공작새라고 답하지 못하고, 그저 멋쩍은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미술과 완전히 멀어졌다.
나와 그림의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조카와 그림의 인연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조금 늦은 것 같아 걱정도 되었지만, 한 없이 가벼운 엉덩이가 걱정도 되었지만, 조카는 드디어 본인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낸 것 같았다.
몇 시간이고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힘들지 않고, 재밌고 즐겁다는 조카의 말이 어느 때보다 감사했다.
새털보다 가벼운 엉덩이는 죄가 없었다.
조카를 진심으로 믿지 못한 얄팍한 내 마음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