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하다. 16
마을 한가운데 있고, 근방에 하나밖에 없는 가게인 데다, 장기 집권 중인 부녀회장이 사는 집이 어떨지 상상이 되는가? 복작복작, 시끌시끌, 와글와글! 바로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은 언제나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특히나 겨울이면 마을의 모든 아주머니는 우리 안방에, 마을의 모든 아저씨는 우리 가겟방에 모였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뜨개질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수다 삼매경에 빠지셨고, 아저씨들은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며, 막걸리 내기 화투나 윷놀이에 빠져계셨다. 겨우내 막걸리 내기를 하셨던 아저씨들에게 상습도박 혐의가 적용되었다면, 우리 가게는 일명 ‘하우스’가 되는 것일까?
나는 요즘 유행하는(유행이 지났나?) MBTI 성격유형 검사에서 ‘대문자 극 I’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즉 나만의 조용한 공간과 시간이 밥만큼이나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 나에게 겨울날 우리 집의 시끌벅적함은 고난 그 자체였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당시 우리 집은 안채에 3개, 가게에 1개, 모두 4개나 되는 방이 있었지만, 우리는 주로 안방과 가겟방만 사용했다. 비워둔 방들은, 굳이 난방할 필요가 없었고, 겨울이면 북극만큼이나 추운 곳이 되었다. 설을 맞이해 산자를 만들 때 말고는, 방문조차도 열지 않았다. 마음 맞는 친구 집으로 가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당시 마을에는 내 또래의 여자 친구가 없었다. 그러니 내가 마음 편하게 조용히 시간을 보낼 곳은 우리 집에도, 우리 동네에도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간절한 소망을 뒤로한 채,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운 도깨비시장 같은 안방구석에 자리를 잡고 탐구생활도 풀고, 책도 읽고 방학 숙제도 했다. 이런 이유로 겨울이 되면 나의 퉁명스러움은 더 도드라졌다. 조용한 나의 일상을 빼앗아 가버린 훼방꾼들에 대한 나름의 저항 표시였다.
하루 종일 뾰로통한 얼굴이었지만, 유일하게 점심시간만큼은 아주머니들의 왁자지껄함 속에서도 맛있게 밥을 먹었다. 하지만 사람은 밥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맞는 말이다. 사람에게는 간식도 필요하다. 겨울 최고의 간식은 당연히 고구마였다. 쪄서도 먹고, 구워서도 먹고, 생으로 먹어도 맛있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맛있는 고구마라 할지라도, 매일 먹다 보면 질릴 수밖에 없었다. 뭔가 새로운 간식이 필요했다. 지금과 다르게 초등학생의 나는, 특히나 음식 만들기에 관한 것이면 뭐든지 도전해 보는 아이였다. 김치와 밀가루만 있으면 되는 김치부침개라면,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뒷마당에 파묻은 김칫독 위로, 밤새 펑펑 내려 소복하게 쌓인 눈을 손으로 밀어내면, 갈색과 밤색이 감돌면서 모래를 뿌린 듯 우둘투둘한 항아리 뚜껑이 나타났다. 뚜껑을 들어 올리면 새콤하면서도 시원한 김치의 향이 확 올라왔다. 얼음이 벤 듯 차가운 김치 한 포기를 꺼내서 조심스레 양푼에 담았다. 잘못하면 시뻘건 김칫국물과 김칫소가 새하얀 눈 위로 우두둑 떨어져서 무시무시한 ‘사건 현장’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자를 때마다 사사삭사사삭 소리를 내는 김치를 숭덩숭덩 잘라, 밀가루와 물을 넣고 주걱으로 대충 저었다. 양푼에 있던 김칫국물을 부은 것 이외에, 일절 다른 양념은 없었다. 그러고는 튀김이라도 할 듯 콩기름을 한가득 부은 프라이팬에, 반죽 한 국자를 넣고 석유풍로(곤로) 심지에 불을 붙였다. 기름 반, 반죽 반이었던 프라이팬은, 이내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맛있게 익어갔다. 제법 부침개 모양새도 났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음식 잘하는 어머니의 유전자가 조금이라도 스쳐 간 것이 분명했다. 김칫국물을 넣은 덕분에 간도 적절하게 맞았다. 역시 김치부침개는 김치만 맛있으면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열심히 만든 김치부침개를 들고 안방에 들어갔다. 내가 안방에서 나간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어른들은, 갑자기 부침개를 한가득 들고 들어온 내 모습에 깜짝 놀라셨다. 겨울이 주는 특유의 부산스러움과 어른들의 끊임없는 수다는, 부엌에서 나는 소리를 감추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어른들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오메, 오메. 이게 뭔 일여. 아가, 진짜 니가 힜어?”라는 말을 반복하시며, 김치부침개를 하나씩 집어 드셨다. 기대치가 없다 보니, 맛 평가는 몹시도 후했다. 칭찬까지 덤으로 얻었다.
“오메. 이쁘고 기특허네.”
“쬐끄만 것이 부침개도 할 줄 알고, 다 컷구만.”
그동안의, 나의 쌀쌀맞음과 버르장머리 없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하고 예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역시 인심은 곳간에서 나고, 남이 해 준 게 제일 맛있고, 기대치를 낮추면 모든 일에 관대해지고, 무엇이든 함께 먹어야 진짜 맛있어진다.
어설픈 실력이었지만, 그날 내가 만든 김치부침개는 여러모로 맛이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