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브레도 좋기는 하지만...

세상 맛깔나다. 겨울 2

by 오늘나

크리스마스가 무슨 날인지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크리스마스를 기다렸었다. 일요일이 아닌데도 하루 종일 텔레비전이 나오는 크리스마스는 말 그대로 ‘선물 같은’ 하루였고, 더구나 진짜 ‘선물’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오직 크리스마스에만 선물을 받았다. 어린이날이 되면 읍내 나들이를 가서 새 옷을 사고 맛있는 것을 먹었지만 선물은 없었다. 그 시절 그 시골에서 그런 어린이날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선물이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나들이고 옷이고 음식일 뿐이었다. 생일이 되면 어머니는 친구들을 초대해 생일파티를 해주었지만, 역시 선물은 없었다. 생일파티라는 말도 생소했던 그 작은 시골에서 생일파티를 해준 것 자체가 선물이었지만, 역시나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정성과 극성, 그 절묘한 공간에서 자랐음에 감사하지만 철부지 어린 시절에는 당장 내 손에 쥐어지는 선물이 더 간절했고, 그래서 더욱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졌다. 일면식도 없는 산타라는 할아버지가 단지 착한 일을 했다는 이유로 선물을 준다는데 어떻게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착한 일의 기준이 애매하긴 했지만 그래도 언제나처럼 주시리라 믿었다.


선물을 기다리며 분위기를 살려줄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만 필요했던 크리스마스트리 만들기는 톱을 들고 집 뒤 문중산에 가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문중산이 뭔지 모르던 무지 덕분에 마음 편하고 의기양양하게 나무를 벨 수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가 톱을 들고 산에 갔다고 놀라실 필요는 없다. 시골 아이에게 톱이나 삽, 호미는 자연스러운 생활 도구였고, 문중산은 산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언덕배기 정도였으니까!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누리지 못한 운 없는 작은 나무를 베어와 흙이 가득 담긴 빨간 고무통에 꽂고 꾸몄다. 색종이를 오려서 만든 몇 개의 별과 탈지면을 넓게 펴서 눈처럼 장식한 게 전부였지만, 충분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전구도 알록달록한 장식도 없었지만, 텔레비전 속 도시 아이들처럼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다는 것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이제 산타할아버지께 선물만 받으면 됐다. 매년 같은 선물이었기에 무엇을 받을지 뻔히 알면서도 기다려졌다. 산타할아버지가 우리 방에 다녀가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기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우리 삼 남매의 머리맡에는 ‘사브레’가 놓여 있었다. 비싸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던 ‘과자 사브레’는 별로였지만 포장도 안 된 빛바랜 ‘선물 사브레’는 무조건 좋았다. 선물을 받았다는 그 자체가 좋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맞춤형으로 선물을 준다는 산타할아버지가 왜 내가 좋아하는 ‘맛동산’이랑 ‘빠다코코낫’은 한 번도 안 주고, 비싸기만 할 뿐 내 입맛에 잘 맞지 않는 사브레만 주시는지 의아하긴 했다. ‘산타할아버지! 저는 맛동산이랑 빠다코코낫을 좋아하는데 왜 사브레만 주세요? 그리고 사브레보다 맛동산이랑 빠다코코낫이 훨씬 더 싸요. 이번에는 꼭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산타 할아버지의 주머니 사정까지 생각하면서 간절히 기도했지만 응답은 요지부동이었다. 외국 할아버지라서 한국말을 못 알아들으셨나?


산타할아버지의 정체를 알고 나서야, 사브레의 비밀도 풀렸다.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하셨던 부모님은 구색용으로 사브레를 갖다 놓으셨는데 가격 부담을 이기지 한 사브레는 결국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리만 지켜야 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흘러 유통기한이 다가왔고 하필 그게 거의 매번 12월이었던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머리맡의 사브레를 집으며 행복하면서도 아쉬웠다. 은근히 기대했던 맛동산이랑 빠다코코낫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단 한 번도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고 시골에서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막을 내렸다.


값이 덜 나가고 초라해 보여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핀 흔적이 있는 선물을 받으면 행복해지고,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빛이 난다. 하지만 가격과 상표를 내세우며 조건과 생색을 담은 선물을 받으면 부담감에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값나가는 보석이나 명품으로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거나, 받은 선물의 가격을 인터넷으로 잽싸게 확인한다면 그건 선물이 아니라 거래일뿐이다. 진짜 선물에는 배려와 진심이 담겨야 한다. 그동안 받은 선물 중에 직접 만든 책갈피, 부서져 버린 조화 한 송이, 대일밴드 한 장이 소중한 이유다. 1,000원짜리 반지를 건네주던 그 작은 손길이 진짜 선물인 이유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은 그 따뜻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참, 1,000만 원짜리 아니고, 1,000원짜리 반지다. 문구점에서 파는 천 원짜리!


다섯 숟가락.jpg


keyword
이전 10화산자여 커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