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맛깔나다! 가을 9
가을 들녘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내음이 있다. 수확이 끝난 볏단의 메마른 듯, 메케한 듯 풍기는 묵직한 풀 향이 그것이다. 그 향이 코끝에 스치면 가을이 깊었다는 뜻이었다. 우리 동네는 모내기처럼 추수도 한 집이 끝나면, 그다음 집으로, 또 그다음 집으로 품앗이를 했다. 하룻만에 벼 베기에 탈곡과 볏단까지 정리해 주는 멋진 기계는 없었다. 오로지 낫 하나로 그 넓은 논의 벼를 베고, 한 달 정도 말려서, 홀태나 호롱기로 탈곡하는 긴긴 과정을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 했다. 그렇게 마을 전체가 추수를 온전히 끝내기까지는 한 달 이상이 걸렸다. 하루하루가 힘들었을 어른들의 고단함을 알 길 없던 나는, 그저 좋기만 했다. 수확이라는 고차원적 쾌락이 아닌, 쌓아놓은 볏단에서 놀 본능적 욕구 때문이었다. 입장료도 없는 그곳은 우리 삼 남매 최고의 ‘놀이동산’이자 ‘키즈카페’였다.
탈곡하는 날, 동생들은 아버지를 따라 일찍부터 논에 가서 놀았지만 살림 밑천인 큰딸은 놀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새참과 점심을 준비하는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도와드려야 했고, 탈곡하시는 분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중요한 임무도 있었다. 가마솥에 돼지고기 듬뿍 넣고 끓인 김치찌개와 나물 반찬, 하얀 쌀밥에 수저까지 챙겨 넣은 커다란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논으로 향하시는 어머니를 따라, 내 마지막 임무가 손에 쥐여줬다. 막걸리 주전자였다. 아저씨들을 위해서는 한 방울 한 방울이 소중했지만 출렁대는 막걸리는 끝없이 탈출을 했고, 논둑길이 취할 판이었다.
겨우겨우 다다른 논에는 한 달 동안 바짝 마른 볏단 내음, 홀태 돌아가는 소리와 동생들의 웃음소리, 아저씨들의 분주함까지 생생했다. 이미 탈곡이 끝난 볏단은 한 아름씩 묶여서 거대하게 쌓여 있기도 했다. 주전자 때문에 힘들었던 순간이 싹 잊히는 장면이었다. 볏단의 기분 좋은 까슬까슬함과 마른 풀냄새는 나를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다른 차원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았다. 동생들과 숨바꼭질도 하고, 인디언 집처럼 만들기도 하고, 암벽 등반을 하듯 기어오르며 추수를 만끽했다. 최고의 놀이터가 되어 준 볏짚은 소의 먹이와 우리의 땔감이 되었고, 멍석이나 바구니도 되었고, 버섯 키우는 아저씨가 가져가기도 하셨다. 버릴 것 하나 없었다.
우리가 노는 동안 아저씨들은 논바닥에서 하얀 쌀밥과 김치찌개, 내가 지켜낸 막걸리를 드시며 숨을 돌리고 계셨다. 껍데기까지 붙은 큼직한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는 기름기가 좔좔 흘렀다. 얼큰해 보이는 빨간 국물과 보들보들 뽀얀 두부, 쨍한 초록의 대파까지 더해져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웠다. 고기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윤기 좔좔 흐르던 돼지기름은 나도 모르게 손을 뻗게 했다. 어른들 몰래 손으로 두부를 집어서 재빨리 입에 넣었다. 김치의 매콤함과 돼지기름의 고소함까지 더해진 두부는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번질번질하고 시뻘건 입술을 뽐냈다. 제아무리 이름난 명품이라도 그 돼지고기 김치찌개의 보습력과 색감을 이길 수 없다.
폭풍처럼 몰아친 식사가 끝나면 어머니는 밥 한 톨, 국물 한 방울 남지 않은 빈 그릇을 모아 담고, 걸어온 길을 되짚으셨다. 나도 어머니 뒤를 따르며 말도 안 되게 가벼워진 주전자를 허공에 대고 사정없이 돌렸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팔이 씽씽 돌았고 그렇게 왁자지껄한 추수도 끝나갔다.
높은 볏단으로 추수의 끝을 알리던 게 엊그제인데, 어느 순간부터 거대한 가래떡 같은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볏짚을 진공으로 포장한 ‘곤포 사일리지’다. 이름도 생소한 이 거대한 물체는 아무리 봐도 정이 가질 않는다. 마치 외계 행성에 던져진 기분이다. 어마어마하게 사용했을 비닐 못지않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국적 불명의 이름도 참 거슬린다. 쉬운 말로 하면 누가 잡아가기라도 하는 걸까?
한류열풍에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많아진다는 소식이 뿌듯한데, 정작 우리는 우리말과 글에 대한 애정이 없다. 당장 근처 식당이나 카페만 봐도 간판부터 차림표까지 영어투성이다. 한글로 써져 있어도 어려운 발음에 손가락으로 주문하며 멋쩍게 웃는데, 알파벳으로만 적어놓으면 어쩌라는 건가? 내 나라에서 밥 먹고 차 마시는데 영어 시험 보는 기분이 든다. 영어 못하는 사람 색출 작전인가? 1등으로 잡혀갈 판이다. 비단 식당이나 카페뿐 아니라 천지가 영어다. 우리 아파트 놀이터의 귀여운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부르며 노는 순간도 예외는 아니다. “마미, 대디” 아이쿠야!
그렇다고 영어를 탓하는 건 결코 아니다. 영어는 아무런 죄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언어는 똑같은 무게로 소중하다. 단, 지구상에 영어 하나만 남겨놓을 작정이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언어로 충분했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에게도 우리말과 글의 아름다움을 듬뿍 안겨주면 좋지 않을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외국어 표기만 하고 말이다. 어렵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국어가 모국어고, 과학적이고 아름답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글이 우리 문자라는 것을 맘껏 누리자! 나랏말싸미 English(잉글리시)와 달라 어엿비 너겨야 할 일인가?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주시경 선생은 말씀하셨다. ‘나라를 뺏고자 하는 자는 그 나라의 글과 말을 먼저 없이 하고 자기 나라의 글과 말을 전파하며, 자기 나라를 흥성케 하거나 나라를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자국의 글과 말을 먼저 닦고 백성의 지혜로움을 발달케 하고 단합을 공고히 한다.’ 그래서 일제는 우리말과 글을 못쓰게 했고, 독립운동가들은 우리말과 글을 지키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