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하다 15.
크리스마스가 무슨 날인지,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크리스마스를 좋아했다. 일요일이 아닌데도 하루 종일 텔레비전이 나오는데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기다린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선물’이었다. 우리는 오직 크리스마스에만 선물을 받았다.
어린이날에는 새 옷을 입고, 공원에 가서 신나게 놀고 맛있는 것을 먹기는 했지만, 선물은 없었다. 하긴 그 시절, 그 시골에서 그런 어린이날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선물이었지만 그때는 그걸 선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그냥 옷이고, 나들이고, 음식일 뿐이었다.
생일이 되면 나름의 ‘생일파티’라는 것을 했지만, 역시 선물은 없었다. 생일파티며 생일 선물이라는 말도 생소할 정도로 자그마한 시골에서, 친구들을 초대해 생일을 축하해 준 부모님의 정성과 극성, 그 절묘한 어느 선에서 자랐음에 지금은 감사함을 느낀다. 하지만 철부지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의 지극한 정성에도 나는 내 손에 쥐어지는 선물이 더 간절했고, 그래서 더욱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졌다.
일면식도 없는 산타라는 할아버지가, 착한 일을 했다는 이유로 선물을 준다는데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기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착한 일은 크리스마스를 대비해서 충분히 저축을 해놓은 상태였기에, 설렘 가득히 크리스마스를 기다릴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시작될 즈음이면 나는 톱 하나를 들고, 우리 집 뒤에 있던 문중산(산 이름 아니다. 문중에서 소유한 산이다)에 갔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나무를 베어오기 위해서였다. 시골에서 살던 나에게 톱이나 삽, 호미는 그냥 자연스러운 생활 도구였다.
베어 온 나무는 흙을 가득 담은 빨간 고무통에 꾹꾹 눌러 담아서 넘어지지 않도록 했다. 며칠의 눈요기를 위해, 잘 자라고 있는 나무를 자르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드라마에 나오는 도시 아이들처럼 멋진 크리스마스트리를 갖고 싶던 욕심이 사리 분간을 못 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빨간 고무 대야에 꽂힌 나무에, 색종이를 직접 오려서 만든 별 몇 개와, 탈지면을 넓게 펼쳐서 눈처럼 장식한 초라한 크리스마스트리였지만 만족했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전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알록달록한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크리스마스트리라고 부를 수 있는 나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산타 할아버지께 선물만 받으면 되었다.
매년 같은 선물이었기에, 무엇을 받을지 뻔히 알면서도 설렜다. 우리가 자는 틈에, 머리맡에 선물을 놓고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설레고 행복했다. 나중에야 산타 할아버지의 정체가 부모님인 것을 알았고, 왜 매번 같은 선물이었는지 알게 되었지만, 선물을 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산타 할아버지, 아니 산타 부모님이 매년 주신 선물은 무척이나 값비싼 ‘사브레’라는 비스킷이었다.
사실 난 ‘과자 사브레’를 좋아하지 않았다. 비싸다고 내 입맛에 맞으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물 사브레’는 맛이나 가격과 상관없이 좋았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건, 생일에도 선물을 안 주시던 부모님께서 크리스마스에만 왜 그토록 비싼 과자를 우리에게 선물했는 지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하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가게를 하시던 부모님은 구색용으로 사브레를 가져다 놓으셨지만, 역시나 사브레는 가격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팔리지 않은 채 먼지만 뒤집어쓰면서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흘러 유통기한이 다가왔고, 하필 그 유통기한이 거의 매번 크리스마스였던 것이다. 결국 팔기 어려워진 사브레는 우리 삼 남매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는 운명을 반복하게 되었다.
긴 시간 햇볕을 받아, 바랠 대로 바래진 낡아빠진 과자 봉지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선물을 받았다는 그 자체가 중요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근본적인 물음은 남아있었다. 마음씨도 좋고, 아이들의 마음도 그렇게 잘 안다는 산타할아버지가 왜 내가 좋아하는 ‘맛동산’이랑 ‘빠다코코낫’은 한 번도 안 주고, 비싸기만 할 뿐 내 입맛에 잘 맞지 않는 사브레만 주실까? 산타할아버지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 그 의문은 계속되었다. 문제조차 이해하기 힘든 ‘리만 가설’처럼 나에게는 ‘사브레 가설’이 되었었다.
선물을 주는 사람에게 감사하기는커녕, 트집을 잡는다고 혼이 날 것 같았지만, 난 산타 할아버지를 만난다면 꼭 한 번은 물어보고 싶었다. ‘산타 할아버지. 이번에는 진짜로 제가 원하는 것을 주세요. 산타할아버지는 착한 분이라고 들었는데, 왜 제가 원하는 것은 한 번도 안 주세요? 그리고 맛동산이랑 빠다코코낫이 사브레보다 훨씬 더 싸요.’ 산타 할아버지의 주머니 사정까지 생각하면서 간절히 기도했지만, 응답은 요지부동이었다.
사브레도 감사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받고 싶었다.
주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그래야 진짜 선물이 되는 것 아닐까?
사랑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