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생각 속의 상실

by 구일영

상실이란 관계가 끝나 되돌릴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끊어져 버린 관계로 상처받은 이들에게 상실은 절대적으로 커 보인다. 사실, 상실은 절대적이지 않다. 조금만 시선을 돌려 시간의 기점을 우주의 탄생으로 변경해 보면 전혀 다른 통찰을 주기 때문이다. 우주의 시간으로 되돌아보면, 우리는 과연 상실되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절대적 상실이라 함은 존재하던 것이 모두 소멸됨을 의미하지만, 사실 별의 부스러기가 그 연결 상태만 바꾼 것 아닌가? 생명 활동을 그저 화학반응의 결과라고 본다면, 우리의 모든 활동의 흔적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해, 형태만 변했을 뿐, 그 구성 원소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간의 상실을 과연 온전한 상실로 생각할 수 있을까? 또 소멸과 상실을 그저 자연의 섭리로 평가절하해 버리면, 인간이란 존재를 하찮게 보게 되는 게 아닐까?


인간은 역사를 통해 하찮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이 휘두르는 야멸찬 필멸의 법칙에 결코 복종하지 않고 용감히 도전했던 유일한 존재였다. 문화를 창조해 냈던 인간의 역사 자체가 이를 뒷받침한다. 문화는 사회의 발전을 위해 무엇인가를 새로 계획하고 그것을 발전시켜서 관계를 유지하려는 모든 노력의 집합체다. 인간의 활동의 대부분은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집중됐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저 유명한 『사피엔스』에서, 기억에 근간한 인지 능력 때문에 사피엔스가 이 별의 유일한 영장이 되었다고 역설했다. 자연이 창조했던 유기물들이 전기적 신호를 신경이라는 매개를 통해 뇌 안 어딘가에 저장하게 되면서, 상실을 종용(慫慂)하는 자연의 법칙에 당당히 맞섰던 것이다. 기억을 품은 각자의 개체는 세대를 넘어서 오랜 시간을 통해 집적, 발전되며 문화로 이어졌다.


꽤 오래 다니던 회사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들어간 외국회사였다. 한국 직장인은 생애를 통틀어 평균적으로 3~4번의 이직을 경험한다고 한다. 15년을 다녔으니 오래 다녔다고 말할 수 있다. 소수로 움직이는 회사였기에, 우스갯소리로 동료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동료 상호 간의 관계가 무척 긴밀한 회사였다. 때마침 한국의 디스플레이, 자동차가 세계 무대에서 수위(首位)를 다툴 때였기에 매해 성장했다. 그러다 2010년대 초반 지속 가능할 것 같았던 성장이 멈췄고,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 본사는 성장보다는 관리에 방점을 둔 지사장을 한국 지사에 보냈다. 성장이 멈추자 관리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회사는 각종 비용 관리에 들어갔고,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영업 직원들의 자부심이 사라지고 말았다. 급기야 젊은 직원들을 시작으로 하나 둘 퇴직하기 시작했고, 조금 높은 직책자였던 사람 들 중에는 나의 이직이 유일했다.


퇴직하면서 관계가 유지되길 바라며, 나는 사람들에게 아쉬움과 그리고 잘 될 거라는 따뜻한 위로의 말을 서로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끊어진 관계는 대부분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남은 사람들과 떠난 사람들 사이의 간극은 시간이 흐르면서 골이 깊어졌고, 오해가 쌓였다. 겨우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가끔 안부를 묻던 SNS 메시지도 냉정하게 끊겼다. 15년이란 세월을 진정으로 애정을 갖고, 회사가 나와 동체인 것처럼 열정을 다했는데... 결국, 몇 개월도 지속되지 못할 얄팍한 관계라고 느껴져 허탈했다. 관계가 지속되길 바랐던 것은 그저 나의 작은 욕심이었다. 첫 직장이라 그 관계 자체에 대한 상실감과 실망감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물론 나 자신에 대한 책망도 컸다. 내가 좀 더 회사 내 동료들과 관계를 잘 맺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상실은 상대적이다. 앞서 이야긴 한 바와 같이 기준점을 우주의 시작으로 되돌리면 영원한 상실도 회복되지 못할 상실도 없다. 빈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는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날 사이들 아닌가? 근시안적인 소원(疏遠)을 인정하면서, 오히려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반추(反芻)해 볼 수 있다. 상실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거나, 한층 더 나은 관계를 만들 수 있는 발전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상실의 아픔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 흔히 이야기하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로 여길 수도 있다. 잠깐의 관계의 부재를 통해, 무엇이 더 바람직한 관계였는지의 교훈을 얻기까지 했으니, 그 잠깐의 주저앉음을 상실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지 반문하게 된다.


진정한 상실은 오히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다른 곳에서 싹튼다. 바로,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다. 희망을 잃어버리면 재기를 꿈꿀 수 없다. 철학자 니체는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안다면, 어떻게 해서든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된다’ 했다. 살아가는 이유가 분명해야 희망을 품을 수 있음을 피력한 것이다. 희망은 궁극적으로 상실의 회복을 부르는 마중물이다. 삶의 목적에 대한 자기 나름의 철학이 굳건히 서 있다면, 영원한 상실로 여겨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문득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마지막 면회가 생각난다. 기력이 거의 없으셨던 할머니는 출장 갔다 바로 돌아온 자기 피붙이인 내 손을 꼭 잡으셨다. 눈빛으로는 무엇인가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먼저 가 있을 테니, 걱정 말고 천천히 오라고... 실제로는 할머닌 한 마디도 못하셨지만, 그런 할머니를 보면서 내가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을 투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희망을 잃지 않는 한, 상실은 인간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