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를 대신했던 그 선택들의 무게

by 구일영

우리의 탄생은 신에 의한 선택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자유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다. 세상에 나와 눈을 뜨면서 곧 맞이하게 되는 것 온화한 빛뿐만 아니다. 탄생과 더불어 가장 가까운 유전자의 소유자인 부모님을 처음 만나게 되는 것도 숙명이다. 물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지만, 나의 자유 의지가 결여된 상태에서 맞이한 얄궂은 운명이라면 어떨까? 그 운명이 죽을 때까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면 어떤 감정이 들까?


좋은 부모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야 조금 달리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것 자체에 대해 아쉬움을 품기 마련이다. 특히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강력한 자아가 뿌리내리기 시작할 무렵이라면 더 그러하다.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권이 원천적으로 박탈되면서 필연적으로 파생되고 말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한탄과 아쉬움. 그래서 우리는 가끔 자신의 운명이 조금 달랐다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하기도 한다.


나 역시 왜 태어났을까 하는 불만을 가졌었다. 공공 교육 기관인 학교에서 전수된 탄생과 관련된 생물 교육의 내용은 밋밋하고 지루했다. 탄생 과정 자체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왜 하필 나는 이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까 하는 철학적인 의문에 답을 희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유하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난 운명의 원인으로 발생한 사건들과 조우할 때마다 그런 나의 의문이 짙어지기만 했다.


대표적으로 그런 의문을 부르는 것은 것 중 하나는 매년 이사를 가야 했던 일이었다. 이사 갈 때마다 주인집이 바뀌었고, 새로운 동네 아이들과 친해지려면 다시 어김없이 이사를 가야 하는 형편이었다. 매해 이사를 가야 하는 삶이 보편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은 머리가 커지기 시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전학 가지 않고 다니던 학교를 그대로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기적이라 생각했을 정도다.


그럴수록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나 자신의 운명에 대한 탄식은 계속되었다. 운명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우리 집 형편을 생각하니 내가 대학을 간다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이었지만, 우스갯소리로 내가 대학을 가면 온 가족이 간장에 밥을 비벼 먹어야 할 거라는 철없는 소리도 종종 했다. 나는 너무도 당연히 대학에 가지 않고 직업반을 선택하겠다고 부모님께 비장한(?) 선언을 했다. (당시 인문계 고등학교에는 2학년 말에 직업반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은 곧 묵살됐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식을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꿈을 품고 있었던 부모님은, 나의 결정에 너무도 실망하셨다. 그때의 어머님의 초점 흐린 눈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어머니는 다음 날 곧바로 학교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나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알렸다. 나의 도발은 부모님의 거부권으로 하루를 못 버티고 즉시 번복됐다.


부모님은 당신들 아들의 선택을 내심 괘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선택에 이르게 한 장본인은 자신들이었다며 자책하셨다. 나는 선택권이 묵살된 채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원망했지만, 부모님 역시 자식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자신들의 선택을 원망하셨다. 세월이 지나 지금도 부모님은 직업반을 지원했던 그때의 내 선택을 종종 언급하시곤 한다. 정말 서운했다고. 물론 지금은 나도 그때 부모님이 나의 선택을 막으신 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과와 문과가 무엇인지, 직업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셨던 채 그 선택 때문에 지금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부모님의 그 선택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생처럼 나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운명에 수긍해야 하는 상황은, 사실 인생을 살면서 몇몇 안 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출생으로 인한 신분이나 장애처럼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한 운명에 대해서는 자신의 결정권의 부재를 들어 원망의 반응이라도 행사할 수 있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초등학교 때 언젠가 미화 활동으로 거울을 사 가야 했다. 가난한 사정 때문에 액자에 넣지 못하고 테두리가 테이프로 마감된 저렴한 거울을 들고 갔을 때, 담임 선생님의 한심하다는 눈빛을 억지로 모른 척해야 했던 때도 있었다. 남녀 공학인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아침마다 판잣집 골목에서 나오는 내 모습이 창피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멀지만 나의 실체(?)가 들통나지 않게 뒷산 산길로 일부러 멀리 돌아가 통학했던 일도 있었다. 그땐 그게 죽도록 싫었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며 우리 삶에서 오롯이 자신만이 결정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는 선택들을 너무도 많이 목격한다.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자신의 선택들의 연속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선택의 순간을 가볍게 넘겨 버리진 못했을 것이다! 내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는 것이 고상하고 진취적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양날의 검처럼 그 선택에는 무거운 책임감이 따르기 마련이다. 사회심리학자 이자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자유의지가 결여된 현대의 대중은 전체주의 지도자에 굴복하거나, 민주주의에 대해 강박적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나의 순수한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은 무겁고 준엄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제대로 성장하기까지 미숙한 나를 대신해 부모님은 많은 선택을 하셨다. 그들의 선택은 나를 대신해 그 책임까지 기꺼이 짊어지려는 사랑 어린 의도였다. 살아오신 만큼의 경험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한 부모님의 지혜를 무시할 수 없다. 어리숙한 나의 미성숙한 선택을 대신해 그 무거운 책임까지 지려 했던, 그때의 부모님의 숭고한 선택. 연극이 대단원으로 치달을 때쯤, 모든 갈등의 해결을 위해 나타나는 해결사 신(神)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였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아둔하게도 나이가 한참 들어서였다. 부모님은 나를 대신해 감행한 선택을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이셨을까? 우습게도 그 선택의 결과물인 나는 또 누군가의 '해결사'가 되기 위해서 ‘잔소리’라는 이름으로 노력하고 있다. 당연히 들불처럼 모락모락 일어날 자식들의 불만들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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