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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 퍼퓨머 제1권 빛의 물

1. 1부. 마가의 봉인(1)

프롤로그     

넓은 들판과 꽃과 나무가 가득한 동산,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교회의 종탑 위로는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들며, 마을 곳곳에는 은은한 향기가 흐르고, 소년은 오늘도 변함없이 꽃을 따고 이끼를 모으며, 나무 잔가지를 자루에 가득 채워 집으로 가져간다.      

작은 통나무집에는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식탁과 그릇,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 그리고 집 안 가득히 온갖 식물들이 항아리나 자루에 담겨 작은 공간을 메우고 있다.


소년은 작은 손으로 자루에 들어있는 재스민 꽃을 꺼내어 나무로 짠 상자 위에 놓인 유리판에 올리브기름을 바르고, 꽃잎을 정성스럽게 하나씩 펼치기 시작한다. 기름이 녹기 시작한 꽃잎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향긋한 향 기름이 되기 시작할 것이다.

나무의 잔가지와 뿌리는 곱게 빻아 가루로 만들고, 말린 꽃잎과 섞어, 작고 예쁜 병에 담아 놓는다. 소년은 언덕 위 느티나무 곁 작은 땅에 피어있는 야생화를 가장 좋아하였고, 그 잎을 말려 작은 주머니에 넣어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은, 이곳으로 요양하러 온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소녀는 병이 깊어 살 가망이 없자, 언덕 위의 작은 움막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아무도 출입을 못하게 하였다.

매서운 바람이 불던 겨울, 소년은 소녀가 보고 싶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발길을 움막으로 향하였다. 아무런 기척이 없는 집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러 날 불을 피우지 않았는지 냉기가 코끝을 감돌았다. 기침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구석진 곳에 낡은 담요에 싸여있는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불을 지피고 물을 끓여, 가져온 빵을 소녀에게 먹이고, 조금씩 온기가 돌자, 아이는 모든 식물에는 영혼이 있으며, 그 영혼이 소녀를 치료해 줄 것이라고 설명하고 가져온 말린 꽃잎과 나뭇가지들을 하나씩 불 속에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 꽃잎은 생명이야”

“이 나무는 사랑”

“이 나무가루는 꿈이야”

피어오르는 연기는 실내를 떠돌며 향기로운 냄새를 풍겼지만 소녀의 생명은 점점 희미해져 갈 뿐이었다.

이제 소년에게 남은 것은 작은 땅에서 가져온 주머니 속의 야생화와, 재스민 향유뿐…


소년은 울면서 한꺼번에 남은 모두를 불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불속에서 핀 향기는 움막 속의 소녀를 감싸고 한동안 머물다가, 어느덧 움막에서 빠져나와 개울과 숲을 지나고 교회의 종을 두드리며, 죽어있던 모든 것을 살아 숨 쉬게 하고 마을 전체를 뒤덮어 나갔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소년을 “엔젤 퍼퓨머”라 불렀다.                                                                                                                         

1부 마가의 봉인     

향기가 있는 순간은 일상의 지나가는 수평적 시간과는 달리 높이와 깊이가 있는 수직성을 지닌 시간이다. 또한 그 시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하나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 지나가는 일직선의 시간 속에서 정지되지 않고 반복적인 일상의 모양으로, 하지만 늘 다르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 베르사유 아침     

갓 구워 낸 바게트, 감칠맛 나는 소스를 뿌려 만든 생선 요리, 하우스 와인 그리고 얇은 빵 사이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넣고 초콜릿을 듬뿍 얹은 디저트! 향수 마을 그라스의 식당인 라 토크 블랑쉬(La Toque Blanche, 요리사의 하얀 모자)에서 지중해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하얀 시간을 만나고 있다.

막 꿈에서 깬 이세는 그라스에서 할아버지와 보냈던 시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침이 왔다. 꽃은 향기를 드러낸다. 그것은 하나의 무리로 모여 떠도는 것이 아니라, 제각기 바람이 멈추어선 곳으로 퍼져가며, 촉촉한 공기와 따스한 햇볕은 향기를 서로 비비게 하여 바람에 실어 보낸다.

후드득! 한낮에 내리는 소낙비는 꽃을 적시고, 잎과 줄기, 뿌리를 이 궁전 곳곳의 빈 땅에서 자라게 한다. 그리고 꽃은 나무의 향기와 함께 바람이 머문 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TV를 켜니 향수 광고가 나온다. ‘누보 미라블리스’ 향수다. 레드 컬러의 얇은 천으로 감싼 한 여인이 슬픔에 잠겨있는 모습인데 이 향수를 뿌리니 금방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변한다. 아쉬운 밤의 슬픔을 아침의 기쁨으로 표현한 것 같다.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파티로 이어지는 끈적끈적한 화면은 쾌락적이며 신비한 향기만을 남긴 채 끝이 났다.

최근에 대성공을 거둔 파리의 신생 향수회사 하쉬쉬가 발매한 향수 광고다.

이 향수의 탑 노트는 베르가못, 레몬의 상큼한 시트러스 향으로 지중해의 하늘과 바람, 그리고 햇빛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로즈, 프리지어, 일랑일랑, 시클라멘, 백합, 아이리스의 미들 노트는 고대 그리스 여인의 아름다움을 한껏 표현하였다. 베이스 노트로는 바닐라, 샌들우드, 시더우드, 머스크, 벤조인, 통 가빈과 알 수 없는 향료의 적절한 배합으로 깊고 오묘한 여인의 신비스러움을 마음껏 드러내며,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 향수의 향기는 사람의 기분을 변화시켜, 웃게도, 슬프게도 만드는 인간의 감성을 마음대로 조절하며, 모든 걱정 근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한다. 지속시간이 짧아 반복적으로 사용해야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이 값비싼 향수를 사는데 아낌없이 돈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회사는 유망한 조향사를 최고의 대우로 스카우트를 하고 있었는데 향수 학교인 이집카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전에 인재들을 채용하려고 하였다. 가업을 잇기 위해 이곳에서 조향 공부를 하고 있는 이세에게도 채용 제의가 들어와 내심 할아버지의 가업을 이을 것인가 하쉬쉬로 갈 것인가 하는 고민에 사로 잡혀 있던 중이었다.     

베르사유의 아침은 참으로 상쾌하다. 이세가 아침을 먹기 위해 식사 준비하고 있을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라스에 계시는 할아버지 모리드의 전화였다.

“이세야”

“예, 할아버지”

“급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속히 그라스로 왔으면 좋겠구나”     


# 그라스의 향기     

그라스(Grasse)는 향기이다.

향수의 메카인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배경지이기도 한 그라스가 있다. 온난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 등 뛰어난 자연조건이 있어 향수의 원료가 되는 방향성 식물류의 생육에 최적지였으며,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천연향료 공업을 계속 발전시켜 온 지상 최고의 향기마을이다.

그라스는 조향사들의 가슴이나 영혼과도 같은 곳으로 지난 수세기 동안 향수 창조자들이 이곳에서 조향사의 대를 이어왔다. 봄이 오면 많은 조향사들이, 강렬한 향으로 가득한 이 작은 마을을 배회하며, 시원한 분수가 있는 중앙 광장과 돌로 포장된 어두운 골목까지도 그들의 향기가 퍼져간다.   

  

이곳 중심의 빅토르 위고(Victor Hugo) 가에는 커다란 야자수와 소철나무가 버티고 서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보인다. 이세의 발걸음은 빨라진다. 할아버지를 본지가 벌써 6개월이 지났기에 너무나 보고 싶어 단숨에 달려간다. 할아버지의 품은 늘 아버지를 떠오르게 한다.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은 7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버지 사랑은 늘 가슴이 시려오게 한다.      

모리드 향수회사는 전통적인 제조 방법과 경영 방식을 고수하여 프랑스 향수의 자존심을 지키는 회사로 손꼽히고 있다. 1894년, 고조부이신 파투 모리드는 비밀리에 자신의 실험실에서 놀라운 향수를 만들어 내어 그라스 중심가의 작은 가게에 내다 팔아 크게 성공하게 되었는데, 그의 평판이 날로 높아지자 빅토리아 여왕도 그라스에 올 때마다 이곳에 들러 모리드와 그의 향수에 관심을 보이며, 향수를 잔뜩 사 가지고 돌아갔다고 한다.     

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에 어디선가 맡은 적이 있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 이 향기는”

이세는 이 냄새를 알고 있었다. 바로 하쉬쉬 향수회사의 ‘누보 미라블리스’의 향기였다.

“이곳에서도 팔리고 있나”

혼자 중얼거리며 걷다 집에 다다랐을 때 멀리서 그라스 박물관 관장이신 마담 그라스가 급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세가 인사를 하려고 그녀에게 다가서니 손을 흔들며 이곳을 빨리 떠나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녀는 지금 이곳에 이세를 찾으려는 무리가 온 마을을 뒤지며 다닌다고 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이세는 왜 자기를 찾고 있느냐 하는 표정을 짓자, 그라스관장은 “무슨 이상한 냄새를 맡지 않았니”라는 말을 하며 15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곧 어둠의 그림자가 이곳 그라스를 뒤덮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는 어디론가 급히 떠나간다. 그녀 또한 향기 전문가라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집으로 들어가니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공장에 계시는지 찾아 가보니 할아버지는 모리드가 만의 전통기법으로 향을 추출하고 계셨다.

모리드의 전통 에센스 오일 추출방법인 냉침법은 향을 흡입하고 보존하기 위해 끓이지 않는 정화 지방을 이용한다. 알코올에 씻어서 에센스 오일을 생산해내는 포마드도 이 공정에서 얻어진다. 주로 헤이즐넛이나 견과류 등에 이용하는 방법이다.     

적출법은 재스민이나 오렌지 꽃과 같은 원료로부터 향의 기본을 추출하기 위해 매우 효과적인 공정으로, 밀폐된 넓은 용기 안에 있는 구멍 뚫린 접시 위에 꽃잎이나 나뭇잎 또는 식물의 뿌리를 놓고 낮은 온도에서 휘발성 용제를 통과시키면 열을 사용하지 않고도 오일을 추출할 수 있다. 그다음에 용제를 증발시키는데 이렇게 해서 얻어진 콘크리트, 왁스로 이루어진 향이 나는 연고를 알코올로 정화하여 앱설루트를 생산해 낸다.     

증류법은 고대의 향 추출기법으로 기원전 5000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이 방법이 사용되었다. 가공되지 않은 꽃잎에서 향기 물질을 얻을 때까지 증기를 이용하여 증류한다. 증류 후 정유를 능직 용기에 붓는다. 1kg의 장미 정유를 얻기 위해서는 5, 6톤의 장미꽃이 필요하다. 장미, 등화, 라벤더, 파출리, 육계나무 등이 이 방법에 의해 추출된다.     


모리드 향수회사는 대대로 내려오는 모리드만의 전통방법을 고수하며 향을 추출하고 조향 하여 향수를 만들어왔다. 향을 만드는 작업 중에는 말을 걸 수가 없다. 이세는 언젠가 자신이 지켜나가야 할 작업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의 작업이 끝이 나자 이세는 조금 전 일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자, 할아버지는 아무 이유도 말하지 않고 지금 즉시 이곳을 떠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떠나라고 말하였다. 자세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면 마중 나온 사람이 다 설명할 것이라고 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신다. 모리드 할아버지는 15년 전에도 아들을 이렇게 떠나보낸 것을 떠올리며,

 "무슨 이런 일이 또 내게? " 할아버지는 긴 한숨을 쉬시며 이세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하셨다.

"이세야! 너는 꼭 이겨야 한다"      

이세는 할아버지가 하신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 람세스 역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최초의 향료는 기원전 2,500년경 이집트 제5대 파라오 사훔(Sahum)이 훈트 지방을 여행하면서 8만 포대의 물량을 사 왔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수지를 이용하여 향료를 제조하는 것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향료를 애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을 미라를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이집트 역사 연구로 유명한 에이벰즈는 파피루스로 만들어진 고대 이집트의 서적에서 여러 가지 향료에 대한 기록들을 발견하였다. 거기에는 몰약, 육계, 갈바늄(Galbanum), 수지 등을 사용한 많은 향료 물질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고, 구취 제거에 사용하는 처방도 있었다.     

이집트에는 금요일마다 집회가 열리곤 했는데, 그곳에는 몸에 향을 뿌린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여자들은 향료가 들어있는 물로 목욕을 하고, 남자들은 향고를 발랐으며, 부자나 귀족의 집에는 향기가 흘러넘쳤다. 축제가 열리면 거리에 향을 피웠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도 덩달아 좋은 향기를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카이로 공항에 도착한 이세는 곧바로 카이로 람세스 기차역으로 갔다. 이곳에서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석양이 내리는 람세스 역의 개찰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이집카의 학우인 올리비에다. 그녀는 하쉬쉬향수회사에 조향사로 취직했는데 여기에 무슨 일로 왔을까? 이세는 반갑다기보다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올리비에! 너 여기 어쩐 일이야" "어! 이세"

올리비에는 이세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같이 온 일행이 있었는데 그는 안내인으로  고대 이집트인의 복장을 한 다소 생경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회사의 지시로 알렉산드리아에 향료시장 조사를 간다고 하였다. 이세는 그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향료의 집산지였으며 거대한 향료공장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알렉산드리아행 기차가 출발하였고 바로 옆자리에 올리비에, 맞은편에 이집트인이 앉아 있다. 이세는 올리비에와 하쉬쉬에 조향사로 취업한 학우들에 대해 근황을 물었고, 그들은 잘 지내고 있으며 많은 급여와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출발한 지 1시간쯤 지났을 때 올리비에는 핸드백에서 향수 한 병을 꺼내 이세에게 건넸다.

“이 향수는 우리 회사에서 이번에 새로 개발한 향수야!”

"곧 출시할 예정인 ‘오토리베라시옹(Autolibération 자아해방)이라는 브랜드인데 어떠니!"  

올리비에는 이세에게 향에 대해 평가해 달라고 하였다.      

이세는 아주 천천히 올리비에가 준 향수를 맡아보았다. 육감적이고 관능적이며 매혹적인 향을 가졌다. 탑 노트는 불가리안 로즈와 베르가못으로 만들어져 낯설고 신선한 바람을 느끼게 하였고, 그 뒤를 이어 아이리스와 재스민, 그리고 오포파낙스의 향이 섬세하고 신비한 미들 노트를 만들어간다. 마지막으로 바닐라와 통카빈의 따스함이 깊고 오묘한 동양적인 관능의 향이 베이스 노트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 향수도 ‘누보 미라블리스’의 향처럼 알 수 없는 향료가 들어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머리가 혼미해지며 곧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러자 올리비에와 이집트인은 이세를 흔들어 보며 그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이세의 가방을 뒤져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했지만 찾지 못하였다.  기차가 알렉산드리아 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붉은색의 사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이세를 알아보고 급하게 다가왔다. 그들은 이세를 둘러업고 기차에서 내려서, 역 앞에 대기 중이던 검은색 승용차에 타고 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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