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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Dec 15. 2020

공존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공존

[명사]

1.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이 함께 존재함.

2.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함.



옛날 방식으로 두 개의 문을 차례로 열고 닫아야 작동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서니 빼꼼히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이 하나 눈에 띄었다. 현관문을 살짝 열어 두고 내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윤 Yoon의 첫인상은 딱 "미국에 오래 산 유학생"이었다. 5분 정도, 그녀는 주방과 욕실을 보여주며 이런저런 사용법을 알려주었고, 아파트 입구와 현관의 열쇠를 건네주는 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아무런 편견도 오지랖도 갖지 않는 미국식 의사소통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아, 지나친 친절이나 관심을 서로에게 보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널찍한 "내 방"의 문을 닫고 들어서자, 커다란 창을 통해 캘리포니아의 눈부신 햇살이 마룻바닥 위로 떨어져 반짝이고 있었다.


근데, 잠깐, 저 친구랑 같은 집에서 지내는 거라고?


호텔, 민박, 호스텔까지 뒤져 보아도 한 달짜리 저렴한 숙소를 구하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던 차에, 우연히 아파트 서브렛을 내어 놓은 한국인 유학생과 연락이 닿았더랬다. 기가 막히게 서로의 출입국 날짜가 맞아떨어지기도 했고, 다운타운 한가운데에 위치하면서도 한 달치 렌트비가 저렴해서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곧바로 계약금을 보냈고, 내가 도착할 즈음에 본인은 한국에 돌아와 있을 거라, 친구가 체크인을 도와주기로 했다는 메시지를 미리 받았다. 하지만 체크인을 도와주는 친구와 주방과 욕실을 공유하며 같은 아파트에 사는 계약인지는 몰랐는데. 반짝이는 마룻바닥에 앉아 가져온 짐을 풀어놓으면서, 그제야 시내 중심가에서 혼자 지낼 수 있는 아파트가 그렇게 쌀 리가 없지, 싶었다. 얇은 벽 너머로, 윤이 틀어 놓은 티브이 소리가 들린다. 무한도전을 보는 것 같다. 낯선 아파트에 혼자서 덩그러니 있는 것보다는 나은지도 모르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J언니는 진짜 좀 휴식이 필요했다. 무슨 고3 수험생처럼 학기 내내 밤샘 작업하면서 과제에 매달렸으니 지금쯤이면 완전 방전 상태일 거다. 방학 동안 한국에 가서 엄마 밥 먹고 오겠다고 어제 떠났다. 나는 한국 다녀온 지 벌써 삼 년째가 되어가는데, 한 달 동안 한국 음식을 먹는다니 너무 부럽다. 한 달을 비워 두더라도 월세는 내야 하니까, 언니는 어디다 서브렛 광고를 올린 모양이다. 어떤 한국인 여자분이 언니가 없는 동안 언니 방에서 지내기로 계약을 했다니, 그 바쁘던 학기 막바지에 언니도 참 대단하다. 유명한 곳이니 여행 오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한 달 동안 이 작은 동네에서 지낸다는 걸로 봐서 그 여자 분도 조금 특이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미국에서 살면서 만난 다양한 룸메이트들 중에서 J언니는 독보적으로 꼼꼼하고 관리비 1센트까지 따지는 조금 피곤한 스타일이다. 그런 언니가 말하기를 계약한 여자분이 조금 깐깐한 것 같다니, 한숨이 난다. 한 달 동안 부디 별 일 아닌 걸로 부딪히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


오늘 그 여자분이 도착했다. 별로 수다스럽지도 않고, 내 이름을 물어보는 것 말고는 다른 질문도 없는 것으로 봐서 귀찮게 할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여기서 학교도 졸업하고 취업해서 몇 년째 살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부럽다고 말하기도 하고, 특히 로컬들은 어느 식당에 가는지 많이들 물어본다. 외국에 오래 살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로컬들은 주로 집에서 밥을 해 먹고,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한식을 만들어 먹거나 한국 식당에 가는 것이 최고다. 하지만 여행으로 짧게 머무르다 가는 사람들은 미국까지 와서 한국 음식은 먹고 싶지 않다면서 이렇게 좋은 데 살면서 왜 맨날 집밥만 먹느냐고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기도 해서 로컬 식당 질문은 서로에게 별로다.


아무튼, J 언니 방에서 한 달 동안 지내게 될 분도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 H 언니. 한 달짜리 여행 치고는 가방이 작아 보였는데 지금 방에서 정리를 하고 있나 보다. 음악 소리가 들린다. 재즈, 인 것 같다.






윤이는 학생이 아니라 일을 한다고 했는데, 어떤 평일에는 집에 있고, 어떤 주말에는 아침 일찍 출근하러 나가기도 한다. 쉬는 날에는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대다가 외출을 하더라도 항상 일찍 집에 들어오는  같다. 맛있는 카페가 즐비하고, 산책하고 구경할 곳들이 넘쳐나고, 밤에 놀기 좋은 곳들이 지척에 널린 동네에 살면서도, 저토록 무심하게 집에만 있다니 신기하다. 나같으면 매일 매일 알차게 즐길텐데. 저녁에 맥주   하러 나오라고 전화하는 친구들도  있는  같지만 웬만해서는  나가지 않는  같다.


미국에 있으면서 미국 방송은 전혀 보지 않는 것 같다. 티비보는 소리가 나면 매번 무한도전이나 런닝맨이다. 한국 친구들과 한국말로 통화를 종종 한다. 영어 쓰는 건 아직 한 번도 못 들어봤다. 미국에서 저렇게 오래 살고 일도 하고 있으니 아마 영어도 엄청 잘하겠지.


런닝맨을 보면서 깔깔대고, 때로 웃음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귀여워~ 어떡해~"라고 하는 감탄사가 종종 들려온다. 유재석을 저렇게 좋아하나 싶어서 신기했는데, 어느 날 씻으러 욕실로 들어가는 나에게 "언니 이 강아지 너무 귀엽지 않아요?" 하며 인터넷에 떠도는 귀여운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어서 그제서야 유재석이 아니라 개를 좋아하는 거구나 알게 되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꺅꺅대며 행복해하다니, 정말 좋아하나보다.


윤이의 방은 항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구석구석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같이 사용하는 주방과 욕실에도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는 것이 전혀 없다. 밤이면 별 모양의 노란 조명과 태국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러 색깔 공 모양의 조명을 켜 두고 티브이를 본다.


부모님과 화상 통화를 하는 소리도 종종 들린다. 애교스러운 목소리가 영락없는 막내딸 느낌이다. 집에 하루 종일 있어도 뭘 잘 챙겨 먹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은데, 얼마 전 저녁에 잠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왔더니 윤이가 미역국을 끓여 밥상을 차리며 아빠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애교스럽고 씩씩하게 통화를 끝내고는 밥상 앞에 앉으면서는 기침을 했다. 감기 기운이 도는 것 같다고, 그럴 때마다 소고기 볶아 넣고 미역국을 끓여 먹는다고 했다.


미국에서 혼자 지내는 딸내미를 둔 부모님의 마음이 상상되지 않아서 순간 멈칫 했다.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 아플 때도 외로울 때도 투정 부리지 않는 윤이의 마음도 잘 상상되지 않아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어쩌면 외국에서 혼자 지내는 생활이, 윤이를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마음을 갖게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외국에서 여행을 다니는 것과 외국에서 일을 하며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잘 상상이 되지는 않는다, 막연히 꿈꾸기만 했을 뿐 겪어본 적이 없어서.






도대체 H언니는 어디서 저런 정보들을 알아내는 걸까. 그동안 이 곳에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벤트나 콘서트를 찾아다니느라 매일 바쁜 것 같다. 아니 사실 뭐 딱히 바빠 보이지는 않는다. 오전에 일어나면 잠시 음악 소리가 들렸다가 현관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세수도 하지 않고 어딜 가는 걸까 싶었는데, 요가를 가는 날도 있고 성당까지 산책 가는 날도 있단다. 벌써 단골 카페도 있다고 했다. 들어보니 걸어가기에는 꽤 먼데 그냥 산책 삼아 걷는단다. 그 카페는 할머니 할아버지 밴드가 고즈넉한 라이브 음악을 연주하기도 하고, 무슨 유명한 영화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때 자주 다니던 곳이라는데 그냥 별다른 특색 없이 동네 조그만 카페라고 했다.


오후에 집에 돌아왔다가 저녁 즈음에 다시 나가는 것 같다. 나는 아직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심포니홀에서 오케스트라 공연도 벌써 몇 번이나 봤다고 하고, 나는 잘 모르겠는 어떤 동네에 가서 하루 종일 걷다가 왔다고도 한다. 나도 언젠가 오케스트라 공연은 꼭 한 번 보고 싶다. H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사는 이 동네가 참 근사하게 느껴진다. 오래 살아서 좀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주말에 내 절친 E와 만나면 그 카페에 가보자고 해야지.






세상에. 윤이는 무급으로 인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인턴 기간을 잘 보내면 정직원으로 보험 혜택까지 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어서 빨리 정직원이 되고 싶은 욕망보다 현재의 인턴 일에 대한 즐거움이 더 커 보였다. 지금 제 손으로 하나씩 해내고 있는 그 프로젝트가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일이었고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이 너무 꿈만 같아서 행복하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윤이의 두 눈은 정말로 진심으로 행복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세상에.






H언니는 진짜 이 곳을 사랑하는 것 같다. 매일 지는 노을인데 그게 그렇게 예쁘다고 굳이 바닷가까지 가서 보고 온단다. 벌써 친구들도 좀 사귄 것 같다. 요가원에서 만난 남자가 로컬들이 좋아하는 곳들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는데, 그런 걸 쿨하게 거절하는 걸로 봐서 아무 하고나 막 친해지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어디서 친구들을 사귀는 거지? 신기하다.


언니는 이 근처 재즈바는 싹 다 섭렵한 것 같다. 우리 동네에 그런 곳이 있었나 싶은 곳을 언니는 너무 좋더라며 기뻐했다. 근데 또 신기하게 늦게까지 밖에서 놀다 들어 오지는 않는다. 가끔 와인을 사들고 와서 혼자 방에서 음악 틀어 놓고 마시는 것 같다. 삼십 대 여자들은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저렇게 노는 걸까. 궁금하다.






나는 어쩌면 "미국에 오래 산 유학생"이라는 이미지가 뭔지도 모르면서, 내 마음대로 적당히 상상을 했던가보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오며 가며 마주친 윤은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나보다 한참 어른 같기도 하다. 윤이는 아직 내가 갖고 있지 못한 책임감과 진지함이 있는 젊은이인 것 같다. 동시에 꿈도 있는 젊은이. 싱그럽다. 꿈을 품고 사는 젊은이의 마음이 궁금하다. 막연히 "미국에 살아서 좋겠다"라고 부러워하는 여행자의 마음이 윤이에게는 어떻게 들릴까, 궁금하다.


오늘 밤, 내 방에서 같이 와인 한 잔 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윤이는 "와인은 잘 모르지만, 좋아요 언니, 같이 마셔요"라고 대답하면서 냉동실에 아껴둔 몽쉘통통과 곰젤리를 챙겨서 내 방으로 건너왔다.


기분 좋은 밤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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