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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Dec 23. 2020

과거로부터 날아온 레시피

가끔 그는 혼자서 작정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시간을 가진다. 때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천천히 위스키를 홀짝이기도 하고, 빛바랜 사진첩을 들추어 보기도 하면서 아버지를 추억한다.


내 눈에 참 멋지다고 생각했던 그의 면면들이 사실은 그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익힌 것임을 하나씩 천천히 알게 되면서 한 번도 뵌 적 없는, 앞으로도 뵐 수 없는 그의 아버지가 참 멋진 분이셨구나 생각했다. 그가 "우리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당신이랑 참 꿍짝이 잘 맞았을 텐데"라고 말했을 때는 설레기까지 했다.


물려받아서 읽고 또 읽었던 빛바랜 책들이나, 남자들의 장난감인 공구 트레이 같은 물건들에 깃든 아버지와의 추억은 늘 그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아버지와 함께 앞마당에 심었던 작은 나무가 이제는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그 끝이 보일만큼 자랐고, 봄이면 유독 선명한 연둣빛으로 피어나는 잎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면서도 종종 아버지와의 추억을 들려주곤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그가 꼬꼬마이던 시절의 일상들이다.  명의 누나와 여동생  , 그렇게  형제가 주말 동안 아빠와 함께 보내는 특별할  없는 시간을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는 마치 꺄르르 웃으며 바닥을 뒹구는 꼬꼬마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마치 그때의 기분을 고스란히 다시 느끼는 것처럼, 얼굴이 환하게 빛나곤 한다. 역시, 유년 시절의 행복한 추억이 있는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미소가 아름답다,  생각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역시 미소가 지어진다.


특히  시절의 생일 날을 회상할 때면 그는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사소한 것까지 묘사하곤 한다. 형제가 많아서였을까, 그때 그의 아버지가 정해  규칙은 생일날에는 아빠와  둘이 식사를   있고 어느 식당에서 무엇을 먹을지는 생일 당사자가 결정하는 것이었다. 식당의 위치도, 금액도, 메뉴도,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생일날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아빠와  둘이 먹을  있는 특권. 누나들에게 기죽지 않고, 여동생에게 양보하지 않고, 아빠의 관심을 독차지할  있는 특별한 시간.


생일이 다가오면 그와 그의 형제들은 어디 가지? 뭐 먹지?로 몇 날 며칠을 행복한 고민을 하곤 했단다. 지금의 내가 상상해보면 "비행기 타고 뉴욕 가서 미슐랭 식당에 가봐요!"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의 반경이 그리 크지 않았을 어린 시절의 그에게는 다운타운의 유명한 식당에 가는 것이 밤잠을 설칠 만큼 설레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매년 같은 식당을 선택했고, 그때 그에게  식당은 "생일날 아빠와 남자끼리  먹는 "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메뉴판을 펼쳐서  먹지? 고민하는 소년의 수줍은 설렘도, 이동식 수레에 재료를 담아 나와 테이블 앞에서 즉석으로 요리를 해주던 요리사의 화려한 손놀림을 바라보는 소년의 귀여운 눈동자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질 만큼 여러  들었어도 매번 기분 좋아지는 이야기이다.


그의 아버지가 남긴 것은 책이나 공구함 같은 빛바랜 물건들 뿐만이 아니었다. 수십 년이 지나서도 생생하게 회상할  있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이 그의 가슴에 뜨겁게 살아 있었다.



시작은 토마토였다.

빨갛게  익은 토마토가 달고 맛있어서  봉지를  사다 놓았는데, 이래저래 요리에   개씩 사용해도 아직  개가 남아 있었다.  이상 붉을  없을 만큼 예쁜 빨강에, 건들면 터질 것처럼 탱탱하고 토실한 그것들을 그냥 시들게 내버려  수는 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파스타 소스를 만드는 것일 테고, 오븐에 그냥 구워 먹을까 생각하던 차에 불쑥 그가 말했다, ", 쉬림프 프로방잘 만드는  어때?"


무슨 방잘? 그게 뭐냐.. 물었다가, 그다지 복잡하지 않고 간단히 만들 수 있다는 말에 그냥 그러라고 했다. 새우와 토마토면 어떻게 만들어도 맛있겠지 생각하면서.


  오후 내내, 이런저런 레시피를 찾아보아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한숨을 쉬던 그가 이야기를 꺼냈다. 이유는   없지만, 토마토를 보는 순간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쉬림프 프로방살 Shrimp Provençal  떠올랐다고.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 지역에서 만드는 토마토소스에서 유래한 이름인데, 그런 요리가 대부분 그렇듯이 인터넷에는 수만 개의 서로 다른 레시피가 있다고 했다. 아무리 뒤져 보아도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생일날이면 가던  식당에서, 테이블 앞에서 휘리릭 요리해 주던 그것을 재현하는 레시피는 찾을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유튜브 레시피 찾기를 포기하고, 이미 오래전에 문을 닫고 사라진  식당의 주인 요리사를 찾기 시작했다. 이미 그분은 여든에 가까운 나이가 되셨을 거라고 했다. 오래전 이메일은 계정이 사라졌고, 페이스북 같은 현대의 소셜 미디어에 계정이 있는  같지는 않다고 했다. 이리저리 스토킹 아닌 스토킹을 하던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군데 이메일을 보냈다고 했다, 그때  식당의 쉬림프 프로방살 레시피를 찾고 있다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답신을 받았다. 그가 보낸 이메일 중의 하나가 그때 그 요리사의 아들에게 닿았고, 요리사의 부인이라는 분이 대신 답장을 해주신 것이다. 가족끼리의 레시피라 공개적으로 사용하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하시면서, 워드 파일로 깔끔하게 정리해서 보내주셨다.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 같은 연락은 부인 분이 요리사님을 대신해주시는 것 같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때의 식당을 기억하고 그때의 요리를 해본다는 것에 요리사님이 많이 감동하셨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그렇게 그는 그가 추억하는 쉬림프 프로방살의 오리지널 레시피를 펼쳐 놓고, 요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감격스러움으로 배가 부른 듯했다. 뭐든 즉흥적으로 자신의 감각에 따라 요리하는  사람이지만, 이번만은 충실하게 레시피를 따르기로 했고, 설레는 만큼 긴장도 된다면서 한참을 미루다가 팬을 달구어 요리를 시작했다.


"그래서, 그때  맛이 ?" 


나에게는 그저 맛있는 음식일 뿐이지만, 나는 사실 음식의 맛보다 그의 감상이 궁금했다. 수십년동안 그저 생각만 하던 추억 속의 음식을 예전 레시피 그대로 재현해냈을 ,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  맛이 기억날까. 때때로 시간은 기억을 변형시키기도 하고, 미화하기도 하고, 편집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 똑같아."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담백하게 대답하고 맛을 음미했다. 혀끝에 닿는 소스의 맛인지, 마음에 닿는 그리움의 맛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행복해 보였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요리사님의 부인에게 요리 과정과 완성된 음식이 담긴  장의 사진을 보냈다. 그리고 곧, 그는 오래전에 식당 문을 닫고 지금은 취미 삼아 다른 소일거리를 신다는 과거의 요리사님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요리 과정이 어땠는지, 맛은 어땠는지, 궁금하셨던  같다.


그는, 어린 시절의 그 식당이 그에게, 그의 가족에게 얼마나 행복한 장소였는지를 이야기해드렸다. 아직도 선명히 그때의 생일날들을 기억하고 있고, 아직도 가족들과 그 식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그때 그렇게 우리 동네의 멋진 레스토랑으로 존재해주어 정말 고맙다고.


과거의 요리사님은  시절의 식당을 기억해 주어서, 이렇게 찾아 주어서, 추억이 담긴 음식을 직접 만들고 음미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들의 통화를 옆에서 지켜보는 내내, 나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마법 같은 따스함을 느낄  있는 것은 그가 소중한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살기 때문일까, 생각했다. 추억이란, 가슴속에 품을 수밖에 없는 무형의 기억이지만, 항상 잊지 않고 소중하게 아끼면 이렇게 가끔은 선물처럼 근사한 현실이 되어주나보다, 생각했다.


무슨 유명한 연예인과 통화를  사람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번졌다. 전화기 건너편의, 한 때 요리사였던,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똑같은 미소가 스며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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