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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May 23. 2021

김치 트위스트

미국에서 배운 표현 중에, "그 어떤 음식이든, 베이컨을 넣으면 훨씬 더 맛있어진다"는 말을 좋아한다. Everything tastes better with bacon, 문장 그대로를 제목으로 하는 베이컨 레시피 책도 있고, 베이컨 그림과 함께 문구가 적힌 티셔츠도 판매되고 있으며, 위트 있게 재해석하여 세상 모든 물건에 베이컨을 던져 올리는 단순한 게임 앱도 있다. 


식당 메뉴판의 "추가 add-on 메뉴"에도 베이컨이 빠지지 않으며, 베이컨을 그냥 바삭하게 구워서 계란, 토스트와 함께 먹는 것이 흔한 아침 식사이기도 하다. 마트에 가면 소고기, 돼지고기 섹션만큼이나 큰 오픈 냉장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베이컨은 집집마다 냉동실에 항상 구비되어 있는 필수 식재료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누군가는 내가 아직까지 기가 막히게 맛있는 베이컨을 맛보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베이컨에 별다른 호감을 느껴보지 못했다. 선택할 수 있다면 제외하는 편이며, 고열량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파스타에, 샐러드에, 버거에 얹어 먹고 싶지는 않은 그런 것. 


그래서, "베이컨을 넣으면 뭐든 맛있지"라는 말에 그다지 공감할 수는 없는데, 그럼에도 묘하게, "에브리띵 이즈 베터 위드 베이컨"이라는 표현은 마음에 든다. 뭐랄까, "삼겹살 불판에 볶아먹는 밥은 언제나 옳지" 같은, 절대적 호감을 내포하는 경쾌한 단순함이 좋은 것 같다. 


그리고 또, 요즘 우리 집 주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기에 더없이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에브리띵 이즈 베터 위즈 김치. Everything tastes better with kimchi."






요 며칠, 그와 나의 사이에는 냉랭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시들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어차피 화성에서 온 생명체가 내 마음을 이해할 리가 있겠어, 싶은 생각에 금성에서 온 나는 그냥 내 일에나 집중하면서, 집안 분위기가 조금씩 건조해지는 것을 외면했다. 가끔 저 사람은 정말 외계인인 걸까,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나는 이제 좀 귀찮아진 것 같다. 그런 내 태도의 변화를, 그는 애정이 식은 거라고 서운해하기도 하지만, 24시간 함께 부대끼며 지내는 지금으로서는 조금 거리를 두고 혼자의 시간을 가지는 편이 낫다고, 내 마음대로 합리화하고 있다. 


뾰루퉁하게 서운한 표정을 일부러 더 지어 보이면서, 그가 내 책상 위에 따뜻한 접시와 냅킨에 싸인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저녁 먹어."


한 번도, 저녁 식사를 이렇게 각자의 방에서 따로 먹어본 적은 없다. 그래서 이건 과장스러운 불만의 표시라고 받아들이면서, 아직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접시를 들고 식탁 앞에, 그의 앞에 앉았다.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즉흥적으로 만들어 낸 오픈 토스트라 맛이 어떨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즉흥적 요리의 결과물을 앞에 놓고 스스로 만족하는 눈치다. 전날 만들었던 체다 할라페뇨 사워도우와 계란 프라이 사이로, 기다란 김치 줄기가 통째 올라가 있는 것을 본 순간, 푸하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기름에 볶은 김치가 내뿜는 고소한 냄새가 온 집안에 온기를 채웠다. 치즈 듬뿍 얹고 계란까지 얹은 토스트에, 베이컨 대신 올린 구운 김치 두 줄기 덕분에, 이유 없이 시들했던 분위기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 날 토스트의 한 줄 감상평 역시, "에브리띵 이즈 베터 위드 김치!"였다. 





동생과 함께 긴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여행하는 내내 현지 음식을 탐닉하느라 한국 음식이 그리울 새가 없었는데, 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엄마의 김치찌개를 그리워했다. 여행이 끝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엄마가 끓여주는 김치찌개 한 그릇을 먹으면서 "돌아옴"을 축하하곤 했다. 


나의 가장 길었던 여행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외국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제 나에게 김치는 여행에서 돌아옴을 축하하는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여행 같은 생활을 이어가고 있음에 감사하는 의미로 자리하고 있다. 


내가 한국에 다시 가게 되는 날, 엄마는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나를 반겨줄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최근에 들어서야 참기름과 사랑에 빠진 그와 함께, 고소한 풍미의 엄마표 참기름에 달달 볶은 김치를 또 어디에 얹어 먹을까 궁리하는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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