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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Jan 03. 2023

공항을 서성이다

일부러 하루씩 여유 있게 연결 편 티켓을 샀다. 이론적으로 여유 있는 환승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수많은 변수가 동시다발적으로 작용하는 공항이라는 장소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계를 들여다보며 발을 동동 굴리다가 그날의 운이 다해 환승 비행기를 놓치는 일은 겪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서너 시간 혹은 그 이상 지연되는 것이 일상이고 제시간에 출발할 확률이 현저히 낮다고 알려진 항공사였다. 이틀 치의 호텔 숙박비로 심장이 쪼그라드는 환승의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기로 했다.


여유롭게 일정을 잡은 탓에 남는 시간이 많아서였을까, 경유지로 스쳐가는 공항과 도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여행을 목적으로 이 도시를 찾아왔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공항 근처의 호텔을 예약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호텔 근처의 인도 식당에서 점심 겸 저녁을 해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캐나다에는 인도계 이민자들이 많아서, 근처에서 대충 고른 식당에서도 맛있는 커리와 난을 먹을 수 있는 것 같다.)


목적지가 아닌 경유지에서는 무엇이든 해도 좋고 무엇이든 하지 않아도 좋다, 는 점이 은근히 매력적이다. 아무려면 어때, 하고 시크한 태도를 취할 수 있으니 어쩐지 도시와의 밀당을 내가 주도하는 기분이랄까.


공항으로 셔틀을 제공하는 호텔 중에서 제일 싼 곳을 골랐는데 아침 식사도 무료라고 했다. 옷만 갈아입고 내려가 커피를 찾았다. 의외로 맛이 좋아서 생각보다 오래 머무르며 커피 세 잔을 비웠다. 식당을 관리하던 체구가 작은 어린 아가씨가 왜 아무것도 먹지 않느냐고 아쉬워했다. 어쩐지 미안해서 미니 크로아상을 하나 집어왔다. 어라, 의외로 맛있다. 프랑스의 영향으로 이 동네의 빵이 대체로 맛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커피 머신에 신선한 커피가 떨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확인하며 주변을 정리했고, 나는 다음에 토론토에 오게 된다면 크로아상이 맛있는 빵집들을 찾아봐야지, 생각했다.






인천에서 토론토 공항으로 돌아오는 저녁 비행기는 난기류를 여러 번 만났다. 식전주만 덩그러니 놓인 테이블 위에 식사가 나오려던 찰나에 서비스가 한 번 중단되었고, 식사를 마치고 커피는 블랙으로 주세요, 라고 말했을 때 또 한 번 중단되었다. 기장님이 모든 승무원을 비상 소집하기도 했는데, 그 후에 경고 방송이 몇 번 나오는 걸로 봐서 승객 중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려고 시도했던 것 같다.


내 자리의 통로 건너 뒤편에는 핫핑크와 빨강을 섞은 듯한 색으로 짧은 머리를 염색한 아주머니가 있었다. 아주머니에게 식사를 안내하던 승무원이 영어로 말을 시작했다가 소통이 되지 않아 불어로 다시 안내했는데 (캐나다 동부에서는 영어/불어가 통용된다), 불어도 통하지 않자 승무원은 당황했다. 한국말에도 고개를 젓는 빨강머리 아주머니에게 승무원은 “그럼 무슨 언어를 쓰시나요?”라고 물었고, 아주머니는 “온리 러시안”이라고 답했다. 승무원이 자신은 러시아 말을 모른다고 답한 뒤로 그들의 대화는 주변 소음에 묻혀버렸다. 그들이 어떻게 의사소통에 성공했는지 엿듣지 못해 아쉬웠다.


이런 일도 있었다. 탑승 대기줄에 서있을 때 한 아가씨가 내 앞의 공간을 가로지르며 조심스레 “익스큐즈미” 말하고는, 그 옆의 줄을 가로지를 때는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내 앞을 지날 때는 그녀가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다가, 옆 줄을 지나는 것을 보면서 한국인일지도 모르고, 한국말을 조금 할 수 있는 외국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비행기에 오르자, 한 승무원이 밝은 미소를 띠며 “웰컴!” 하고 반겼다. 곧바로 내 자리를 영어로 안내해주어서 통로로 들어섰는데, 바로 뒷사람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유창한 한국말로 자리를 안내하는 것이 들렸다. 어쩌면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외국인 승무원이거나, 한국인 승무원일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맥락이 제거된 공항과 비행기에서 사람들의 겉모습으로 알아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식사 주문을 받던 또 다른 승무원도 그랬다. 나의 바로 옆 자리 한국인 아주머니와 유창한 한국말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눠놓고, 나에게 다가와서는 영어로 말을 걸었다. 그게 괜히 한국말보다 정겹게 들리지 않아서였을까, 불쑥, 나도 한국말할 수 있어요! 하고 말이 나와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본인은 영어든 한국말이든 좋으니 고객님이 편하신 대로 소통하겠다고 답했는데, 그걸 여전히 영어로 말하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흠, 내가 한국말을 한다고 했는데도 계속해서 영어로 말하는 건 뭐지, 하고 내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그녀가 보았을까.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나는 그녀의 대답을 "우리 그냥 영어로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정도로 받아들이고, 영어인지 한국어인지 모르겠지만 "갈비찜"이라고 대답했다.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남았고, 밋밋해 보였던 갈비찜은 보기보다 맛이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김민철의 에세이를 읽었다. 그녀는 쉬운 언어로 계속해서 말했다. 근무 시간 중의 자신과 퇴근 이후의 자신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최선을 다해 일과 여가를 다듬고 가꾸다 보면 결국은 두 자아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성장하게 된다고. 요즘 떠돌아다니는 Quiet Quitting에 대한 응원이기도 했고, 비판이기도 했고, 조언이기도 했다. 일과 여가에 대한 나의 태도와 전략에 대해 반추하려 애썼지만 별다른 소득 없이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도착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토론토 공항에 착륙했다. 항공 지연 경험이 별로 없는 나에게는 "한 시간씩이나 늦다니!" 싶은 일이지만, 지각을 밥먹듯이 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항공사라는 것을 익히 들었기에, 다섯 시간이 아니라 겨우 한 시간이라는 것에 안도하며 출국장으로 나왔다. 기계에 여권을 스캔했더니 무언가 오류 메시지가 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코드가 출력된 종이를 입국 심사 직원에게 내밀었는데, 그는 이것저것 형식적인 질문을 하고 이것저것 받아 적은 뒤, 나를 세컨더리 입국 심사장으로 보냈다. 그곳에는 이미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구불구불한 대기 줄을 형성하며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10명이 넘는 심사 직원 중에서 왜 두 명만 창구에서 아주 느릿느릿 일을 하고 나머지는 서로 잡담을 하면서 웃고 있는 걸까. 그들에게는 이유도 모른 채, 앉을자리도 없이 대기줄에 서 있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걸까. 저녁 비행기로 환승하지 않고, 내일 아침 비행 편을 예약하길 잘했구나. 지금쯤이면 공항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호텔 바에서 간단히 맥주 한 잔 마시며 한 숨 돌리겠지 생각했는데, 나는 왜 이곳에 서있어야 하는 걸까.


두 시간 십삼 분이 흘렀다.


여권을 받아 든 젊은 심사 직원은 내 표정을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미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거만한 태도로 나의 무기력함을 더 자극하지 않아서 다행이기는 했지만, 본인도 당황하는 모습에 맥이 풀렸다. "아, 오늘 저녁에는 좀 쉬고, 내일 아침 비행기로 미국에 가는 거군요."라고 말하며 30초 만에 나를 내보내줄 거였으면, 애초에 두 시간의 기다림이 왜 필요했던 걸까. 그의 미안한 표정을 놓치지 않은 나는, 왜냐고 물어보기로 했다.


그는 사실은, 하고 어색한 미소로 대답했다. 나와 이름이 똑같은데 생일도 비슷한 사람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이런 일이 또 생길 수도 있는 건가요?라는 나의 질문에 그는 어쩌면, 아마도, 하고 말끝을 흐렸다. 생일이 같은 것도 아니고 비슷해서라니, 매뉴얼에 따른 뻔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따질 수는 없었다. 미안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 젊은이에게 여권을 받아 들고 돌아서면서, 캐나다에 다시 오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거쳐가는 공항일 뿐이었는데, 다시 오지 않을 공항이 되어있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공항 호텔의 라운지에 앉아 무알콜 맥주를 마신다. 알콜이 없는데 알싸한 맛이 나서 진짜 ipa를 마시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출발지를 떠나왔고, 도착지에는 아직 닿지 않은 상태를 체감하게 하는 공항의, 필요 이상으로 힙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려니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마치 한국에서의 자아를 조금 내려놓고, 미국에서의 자아로 돌아가기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과 장소라고 해야 할까. 한국에서 먹고 온 돼지국밥의 온기가 아직 뱃속에 남아있는 것만 같고, 이유 없이 불청객 취급을 받았던 공항에서의 무력감은 아직 사그라들지 않는다. 캐나다에 다시 오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입국 심사장의 젊은 직원도,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체크인을 받아주던 호텔 직원도, 무알콜 ipa와 얼음잔을 내어주던 호텔 라운지 직원도, 모두 지나치게 친절했다. 불편한 기억과 따뜻한 기억이 동시에 떠올라 엇갈린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뒤죽박죽 엉킨 생각과 감정들을 돌아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한국인인지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외국인인지 모를 승무원이, "나도 한국말할 수 있어요"라고 하는 나에게 계속해서 영어로 대답했던 것은 내가 그 말을 영어로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한국말을 할 수 있는데, 한국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을 영어로 하다니. 그녀 입장에서는 당연히 영어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나는, 한국인일지도 모르고, 한국말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외국인일지도 모르는 승객이었다.


토론토 공항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누군가와 생일이 비슷한, 한국인으로 보일지도 모르고,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외국인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내가, 자정의 호텔 라운지에서 무알콜 맥주를 마신다. 한국에서 먹고 온 돼지국밥의 냄새가 옅어지는 것만 같다. 이른 아침의 출국 심사장에 늦지 않기 위해 시계 알람을 설정한다. 내일이면, 한국말을 할 수 있는 것보다 영어를 할 수 있는 것이 더 필요한 일상으로 돌아갈 테고, 불청객 취급을 받았던 공항에서의 무력감은 마치 꿈인 것처럼 흐려질 것이다.


경유 공항에서는 아무래도 좋을, 아무것도 확실치 않은, 무중력의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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