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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와이슈팅스타 Feb 12. 2022

딸 친구 엄마와 친구 되기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

1988년 내가 국민학교 4학년이던 그때, 우리 반 반장의 인기는 최고였다. 여자 아이였고, 늘 예쁜 옷만 입었고, 언제나 단정했다. 우리 반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 아이와 친한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당시 '부반장'이던 나는 그 그룹에 끼기 애매했다. 엄마가 슈퍼마켓을 운영하느라 학교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는 것도 한 몫했다. 동인천역에서 버스를 타면 종점까지 들어가야 하는 곳에 위치한 국민학교였으나 그곳에도 분명 치맛바람은 있었다. 단적인 예로 학교 소풍이나 운동회 때 반장 엄마와 총무 엄마가 나서서 선생님들 식사를 준비했는데 우리 엄마는 예외였다. 소풍 때 그 쭈뼛거리던 느낌. 내가 뭘 잘못한 게 아닌데 기가 죽는 기분이랄까. 엄마와 상의도 없이 부반장 선거에 나간 내가 잘못이었던 걸까. 욕심 많은 내면과 감당하지 못하는 외부세계가 부딪히는 순간이었다.

친구 사귀기가 힘들다고 생각한 순간은 그 후 한참 지나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1학년 7반 여자애 일곱 명이서 칠공주파를 만들었다. 기억은 희미한데 그 시작은 아마도 담임을 괴롭히기 위해 장난 삼아 만든 모임이었다. 우리는 매주 소개팅, 미팅을 나가며 지역에 있는 모든 남학교 학생들을 만나보겠다는 포부를 가졌고, 간혹 토요일 가방 검사에서 사복이 걸려 운동장을 함께 뛰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문제는 감수성 예민한 십 대 여자 아이들이 홀수로 모였다는 것. 소풍 버스에 맨 뒷자리 선점에 실패하거나, 놀이동산에서 롤러코스터를 탈 때, 그 밖에도 학교에서 짝을 지어서 해야 하는 모든 일에 늘 한 명은 홀로 남아야 했다. 누구도 혼자 남는 걸 환영할 리 없는, 그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어렵게 넘기다 결국 연말에 나는 왕따가 되었다.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이 주동했고, 나는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유 없어. 그냥 싫어." 그때 처음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그냥 싫을 수도 있구나. 아무 이유 없이 멀어지고 싶을 수도 있구나.

국민학교 4학년, 고등학교 1학년을 제외한 나머지 나의 학창 시절은 무난했다. 그래서 이 두 기억이 보다 더 선명하게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하와이에서 결혼해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군대 경험이 없지만 해외 나와서 사는 일이 마치 '군대'에서 누구나, 아무나 만나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나고 자란 환경이 다른 제각각이 하와이에서 만나 '친분'을 이루는 일은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도박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겁도 없이, 멋모르고 다 사귀었다. 한국 엄마들을 많이 알면 알수록 기뻤고 행복했다.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해외에서 누구 도움 없이 육아를 한다는 공통분모 하나 만으로도 전쟁터에서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서로를 소개하고 또 소개하고. 그러나 역시 사람이 많이 모이니 말도 많고 탈도 많아져 결국 그 모임은 와해되었다. 온 정성을 다했는데, 거짓말을 조금 보태 영혼을 갈아 넣은 관계였는데 그 믿음이 깨지고 나니 허무했다. 남편과 술잔을 기울이며 위로가 필요했던 나날들, 누구에게든 그때 이야기를 하면 아직도 눈물이 가장 먼저 흐른다.

이 모든 경험을 다 통틀어서 가장 힘든 순간은 지금이다. 초등학교 1학년인 딸 친구 엄마와 친구가 되는 일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다. 나는 내 친구 사귀는 일도 버거웠는데, 딸 친구 엄마와 친구가 되어야 하다니. 심지어 딸이 그 친구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나도 친구 엄마와 절친이 되기를 바라는 딸의 압박이 더해져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앞서 언급된 관계에서 나는 나만 상처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관계를 맺었던 그녀들도 저마다 상처는 남아있겠지. 어쨌든 마흔이 넘고 공격형아닌, 수비형 인간관계에 길들여지려는 찰나. 나를 다시 능동적이게 만드는 아이의 한 마디. "엄마, 플레이 데이트하고 싶어!" 그러나 돌아오는 주말에 플레이 데이트를 잡겠다고 말할 용기가 안 난다. 늦은 밤 캐나다에 사는 나의 절친에게 카톡을 보낸다. '나, 좀 비정상으로 산 것 같아. 너는 그런 일 없지? 사람 사귀는 거 힘들지 않지?' 돌아오는 문자에 웃음이 난다. '야, 말도 마. 나이런 세상은 처음 경험한다.' 친구와 한 시간을 통화하고 컴퓨터를 켜 딸에게도 말 못 한 내 속마음을 고백한다. 딸 친구 엄마와 친구가 되는 일은 너무 힘들다는 독백. 친구 말처럼 나만 힘든 것은 아니라는 나에게 보내는 작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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