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날이 따뜻해졌는데도 요 며칠 산책을 하지는 못했다. 몽골 고비사막에서 시작된 모래폭풍 때문에 황사가 심했기 때문이다.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할 때마다 푹푹 한숨이 나왔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왔다. 미세먼지 농도가 낮은 날. 미세먼지 어플의 초록색 스마일을 본 것은 언제였던가. 기어이 공기는 먼지를 희석시키고 만다. 이런 날은 아니 나갈 수가 없지 않은가. 물 얼룩이 잔뜩 낀 창문은 꼭꼭 닫고 얼룩 사이사이로 보이는 목련의 변천을 내다보며 '저것이 목련이야…' 하고 입만 놀리던 며칠치의 답답함을 분명 상쇄해 줄 것이다.
나는 봄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너무 춥고 그나마 봄이나 가을이 살만한데 봄의 지나치게 환한 기운은 나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색이랄까. 봄의 한가운데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내 시선을 잡아끌기에는 충분하지만 벚꽃과 함께 부풀어지는 마음은 왠지 불안하고 어지럽다. 벚꽃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도 잘하지 않고 벚꽃을 배경에 두고 스스로 피사체가 되는 것도 즐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겨울과 봄의 경계에 선 봄은 사랑한다. 비록 몇 개월이지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긴 겨울의 추위를 잔뜩 웅크려 견디고서 빼꼼 삐져나오는 작은 싹, 연둣빛 잎, 여린 꽃, 그리고 덩달아 분주해지는 새와 곤충들. 거칠고 건조한 나무의 표면과 이들의 대비는 매년 보아도 질리지 않고 신선함을 준다. 귀여운 것들 투성이다.
산책의 시작부터 마음이 들떠 조잘조잘 오늘을 예찬했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외투를 걸치지 않아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니! 거의 일주일 만에 외출인데 아이도 풍경의 변화를 알아챘을까. 한껏 높은 음의 소리를 내며 이것저것 가리키기 바빴다. 산책 코스는 옆 단지 동쪽 입구 건너편으로부터 지하철역까지 이어지는 산책로로 정했다. 남편의 아이디어였는데 주변의 공원들보다는 '숲길'과 같은 느낌이 짙어서 나도 아주 좋아하는 길이다. 처음부터 걸어가면 산책로에 도달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므로 아이는 힙시트 캐리어로 남편이 안고 갔다. 산책로에 접어들기 전부터 아이는 내려달라고 몇 차례나 몸을 비비 꼬았다. 서둘러 산책로에 진입하여 아이를 땅에 내려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곧이 난 길로 가지 않는다. 내 손을 꼭 잡더니 몇 년치 낙엽이 수북이 쌓인 숲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귀여운 탐험정신이다. 그 와중에 남편은 낙엽들 틈새로 보이는 쓰레기들을 주워도 되냐고 내게 허락을 구한다. 곤충과 쓰레기 발견하는 데는 확실히 일가견이 있는 눈이다. 버스락버스락. 빠삭빠삭. 우리 세 식구에 의해 바싹 마른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싫지 않았다. 이 두 남자가 아니면 내가 언제 산책로를 벗어나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겠는가.
산책로 위엔 가벼운 산책과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낯선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 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다. 최근의 몇몇 산책 및 외출들을 비롯하여 오늘의 산책에 이르기까지 아이의 낯선 사람 반응 행동을 종합해보면 어떤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어른을 만났을 때와 동물이나 아이를 만났을 때가 확연히 다르다. 먼저 어른을 만났을 때. 지나가는 낯선 어른들 중 많은 수는 아이를 보면 먼저 다가와 싱긋 웃어 보이거나 작은 손짓을 하거나 말을 걸거나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코로나 때문인지 만져보시는 이는 거의 보지 못했다.) 이 자그마한 생명체가 얼마나 귀엽겠는가. 나 또한 아이를 낳기 전에도 아가들을 보면 항상 그 부모님 몰래 눈인사를 하곤 했다. 그런 어른들을 만나면 나는 아이에게 인사교육 겸 그분들의 무안함 방지를 위해 아이 옆에서 'oo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해볼까' 하고 제안한다. 그러면 아이는 멀뚱이 서서 그분을 바라본다. 눈을 크게 뜨고서. 그리고 기대와는 달리 인사는 잘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이 낯설다'라는 기운을 팍팍 풍겨주고 그분은 멋쩍게 지나간다. 반면, 반려견이나 다른 아이를 만나면 분위기가 다르다. 일단 발견한 순간 아무리 멀리 있어도 검지 손가락을 쭉 뻗어 가리키며 꺄악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그 존재를 향해 와다다 달려간다. 충분히 가까워지면 만지고 싶어 하고 나름의 대화(?)를 시도한다.
오늘은 두 마리의 반려견과 한 명의 또래 친구를 마주쳤다. 강아지를 만났을 때는 강아지의 주인 분들이 강아지가 혹시나 우리 아이에게 해를 끼칠까 조심스러워하셔서 빠르게 스쳐갔던 것 같다. 한편 또래 친구를 만났을 때의 상황이 아주 흥미로웠다. 그 친구(이하 K, 18개월)는 한 손에는 초록색 덤프트럭 장난감을 들고 유아차에 곱게 앉아서 아이의 아빠와 평화로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 아들(17개월)은 주변의 돌덩이를 들어 올리려 힘쓰고 잘려나간 나무기둥을 뽑아보려 애쓰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K를 발견하자 역시나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친구에게 다가갔다. K의 아빠도 K가 우리 아이를 잘 볼 수 있게 유아차를 돌려주었다. 아이는 갑자기 바닥을 발로 쿵쿵 구르기 시작했다. (앤서니 브라운의 '우리 아빠' 책에서 달을 훌쩍 뛰어넘는 아빠 그림을 볼 때 하는 바로 그 행동이었다.) K가 별 반응이 없자 저쪽으로 달려가 돌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고, 다시 달려와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짚으며 '친구도 모자를 썼구나'라는 문장을 몸짓으로 표현했으며, 또 손으로 K를 가리키며 무어라무어라 소리를 냈다. K는 아이의 행동이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눈빛(마스크를 썼기 때문에 눈빛으로 모든 표정을 읽어야 했다)을 보내다가 저도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장난감을 희미하게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우리 아이의 다소 일방적인 구애(?)를 지켜보다가 K의 아빠가 K를 유아차에서 내려주었다. K의 아빠나 우리 부부나 이 두 귀여운 꼬마들의 어떤 사회적 상호작용 같은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계속해서 커다란 모양새의 몸짓을 하며 K의 관심을 구했지만 K는 이 낯선 친구가 조금 벅찼던 듯했다. 뒷걸음질 치고 경계의 눈빛이 완전히 풀어지지 않았고 다시 유아차에 올라타서야 손을 흔들며 자그맣게 작별인사를 건네주었다.
한 달 터울밖에 나지 않는 두 아이가 서로에게 보이는 반응이 이렇게나 다르다니. 코로나 시국도 시국이고 그간 아이 또래를 직접 만날 일이 매우 드물었기에 나는 아이의 특정 행동이 나타날 때 이 행동이 이 또래 아이들에게 보편적인 것인지 아니면 우리 아이에게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 혹은 기질에 의한 것인지를 판단할만한 근거가 매우 희박했다. 시누이(유치원 교사 경력이 있다)가 이따금씩 우리 아이는 사회성 발달이 빠른 것 같다거나, 에너지가 넘친다거나 하는 말을 해주었을 때 '그런가?',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나 다른 기질의 두 아이가 만난 장면을 보고 있자니 우리 아이만의 어떤 고유함이 환히 인지되어 아이가 더욱더 사랑스러워지고 만 것이다. 아, 이것이 우리 아이의 성격이구나. 특정 유형의 성격이야 인간사에서 흔하디 흔한 것이겠지만, 흔한 봄의 시작이 항상 신선함을 주는 것처럼 아이에게서 돋아나고 있는 성격이 싱그럽게 느껴졌다.
아이의 성격이 아직 완성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작고 여린 존재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가는 천진함이 힘없이 사그라들지는 않았으면. 더불어 다른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따뜻하고 부드럽게 다가가는 마음도 잘 배워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