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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ne Unsterbliche Jun 21. 2020

마르그리트 뒤라스, 누보로망

그리고 잔 모로의 목소리

잔 모로의 인터뷰를 다시 읽는다. 그녀가 생전에 목소리를 드높여 옹호했던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아방가르드한 누보로망에 대한 코멘트가 인상적이다.


센 강 변을 걸으며 산책하는 것이 가장 큰 일상의 기쁨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는 센 강 변에서 왼쪽으로 꺾어 6구 중심 생 제르망 데 프레 방향으로 향하는 좁다란 골목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좁고 구불거리는 골목길을 발길 닿는 대로 헤매다가도 나는 불현듯 가능하다면 꼭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아파트 앞을 지나가려고 했다. 그 아파트 앞에 붙은 현판을 볼 때마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이 건물에 언제부터 언제까지 뒤라스가 살았다는 그 짤막한 내용을, 간결한 문장을 읽다 보면 내 일상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이 이 위대한 작가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설렜다. 뒤라스가 그토록 열심히 글을 써서 집을 얻고, 아파트를 사고, 글을 쓰는 동안의 기쁨과 들뜬상태에 대해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에세이들의 몇몇 문장들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그 생생하고 펄떡이던 문장들, 책 귀퉁이를 접거나 문장들에 밑줄을 그어야지, 하다가 아! 이대로 책 페이지를 뜯어서 꿀꺽 삼켜버리고 싶다는, 그렇게 이 문장들을 가지고 싶다는 기괴한 욕망에 사로 잡히기도 했다.


<히로시마 내 사랑> 오로지 영화 한 편 때문에, 나는 꼼짝없이 이 영화 속 내레이션에 이끌려 무작정 히로시마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흑백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도 압도하던 엠마뉘엘 리바의 젊은 얼굴, 처연한 눈빛, 그 떨림이 깃든 목소리와 이어지는 대사들... 무채색의 강렬한 이미지가 당시로서 꽤나 파격적이었던 알렝 레네 감독의 카메라 워크와 연출로 펼쳐지며 나를 사로잡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도, 곧장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렸다. 언젠가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된 것도 그렇게 벅찬 가슴으로 시네마테크를 나서던 어느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 같은 영알못이 영화라는 예술에 대해 존경심을 갖게 된 순간들은 그렇게 소리 없이 다가왔다. 이 장르가 분명히 제7의 예술임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들이기도 했다. 빗물이 땅에 소리 없이 스미듯 어떤 이미지들과 목소리들은 그렇게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언젠가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들만 골라서, 소설과 영화 리뷰를 각각 쓰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아마 가장 먼저 쓸 작품을 고른다면 뒤라스의 소설 <연인>이 순위권에 든다.


<연인>은 소설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영화도 나쁘지는 않았다. 원작에 충실한 각색이었으며 제인 마치의 독특하고 이국적인 얼굴과 동서양이 혼재하는 몸매, 차 안에 나란히 앉아 처음 만난 두 사람의 손이 닿는 장면 등은 무척 서정적이었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였으나 그 한계 역시 명백했다. 이미 뒤라스의 문장을 통해 구성된 세계를 결국 영화가 뛰어넘지 못하고 주저앉는 걸 느껴야만 하는 지점이 가장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연인>의 경우 누가 되었든 꼭 소설을 먼저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프랑스의 식민 지령인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성장한 한 작가가 어쩌면 평생을 내면에 품고 있던 이야기, 백인 소녀라는 이유만으로도 주변과 바로 구별되어 결코 풍경 속에 섞여 들어갈 수 없었던 소녀가 겪는 자아와 세계의 충돌이 영화 속에는 다 담길 수가 없다.

 열다섯열여섯 시절의 자전적 이야기를 작가가 너무나 오래 품고 있었던 걸까? 칠십 세가 된 작가의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 시간이 마법을 부리듯 재창조된 세계 속에서 혼재하는 것이 소설 <연인>의 가장 큰 매력인데, 영상언어로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문장으로만, 서사를 통해서만 유영하듯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인 터라 영화로는 그 결이 다 전해지지 않는다. 소설이 할 수 있는 것과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분량 역시 상당히 짧아서 얄팍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결국 생략해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더 많았으리라는, 자전적인 소설이지만 실제 과거는 더 두텁고 혼란스러우며 결이 풍성했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히로시마 내 사랑> (1959)은 엠마뉘엘 리바의 표정만으로도 언제든 스크린으로 다시 볼 가치가 있는 걸작이다. 59년도의 큰 눈망울로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해 내던 얼굴이 그대로 늙어 2012년 하네케의 <아무르> 속 주름진 얼굴이 되었다. 필름에 찍힌 배우의 얼굴은 이미 그 자체로 물성을 지닌 무엇으로 영원히 산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르>는 물론 다리우스 콘지가 담아낸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촬영이지만.  


<히로시마 내 사랑> 속 내레이션, 엠마뉘엘 리바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린다. 그 아득해짐, 어딘가로 치닿는 것처럼 흘러가는 감정들이 순식간에 환기되며 나에게 다가온다.

언제든 이 영화를 큰 스크린으로 다시 봐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다 말해지지 않은 비극과 참혹함, 적군에게 점령되어 폭력이 일상이던 그 시기에도 피어난 사랑, 사랑을 지키기 위해 경험해야만 했던 또 다른 지독한 폭력, 그리하여 씻을 수 없는 영혼의 상처를 입은 한 개인의 그 아득한 눈빛과 텅 비어버린 무의미한 일상과, 서로에게 닿지 못한 채 허공을 지나 엇갈리는 대화들까지... 진정으로 탁월한 영화는 결국 미래의 관객들에게도 울림을 주며 영원히 사는 이야기가 아닐까.

 몸과 마음이 서로 멀리 떨어져 그 누구에게도 가 닿을 수 없는 요즘을 사는 와중에, 뒤라스의 문장이, 뒤라스의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 엠마뉘엘 리바의 목소리가 다시 다가와 우리를 구원한다.

새롭고, 뻔하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놀라움을 선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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