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를 어떻게 잡는 줄 알아?”
지난주 친구들과 오랜만에 모임을 가졌을 때였다. 다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는지라 옛날이야기를 할 때면 초롱한 눈망울로 마치 아이가 된 것처럼 신들이 났다. 새카만 얼굴, 콧물이 하얗게 마른 인중, 트고 갈라진 손등, 하지만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이던 그 소년들. 산과 들을 다니면서 소를 몰고 토끼를 기르던 추억, 메뚜기, 개구리, 뱀을 잡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다 누군가 돼지 잡던 기억을 소환했다. 어릴 적 마을에 경조사가 있을 때면 소나 돼지를 장정들이 직접 도축했던 그 기억을.
“돼지다리를 줄로 묶고 목 부위를 칼로 찔렀어. 솟아나는 피를 대야에 받았지. 나중에 순대 만들 때 쓰려는 거였어. 피가 빠지면서 돼지는 서서히 죽었지. 목의 경동맥이 찔릴 때의 고통으로 돼지가 울부짖었어. ‘꽤에~에’ 그 소리가 아직도 기억나. 돼지 멱을 땄을 때 나는 그 소리 말이야.”
도시에서 자란 친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고향이 각기 달랐건만 모두 돼지 도축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돼지를 잡을 때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이 그 장면을 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서 보았다. 그런 관습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단지 우리들의 머릿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전통 방식의 축제와 도축을 기억하는 이 땅의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돼지들은 전기나 이산화탄소로 고통이 최소화되어 도축된다고 들었다. 우리는 어릴 때 돼지가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자라고 또 어떻게 죽는지를 잘 알고 먹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돼지고기는 그저 공산품처럼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몽골 사람들이 양을 도축하는 장면을 다큐멘터리로 본 적이 있었다. 유목인들은 피를 땅에 뿌리는 것을 금기시했다. 하여 그들은 양을 뒤집어서 꽉 붙잡고 명치 부위를 칼로 한 뺨 정도 찢었다. 희생양은 울음을 내질렀고 목동은 잽싸게 소매를 걷더니 그곳에 손을 쓱 집어넣었다가 잠시 후 뺐다. 그게 다였다. 양은 잠이 들 듯 곧 숨을 거두었다. 목동의 손이 양의 뱃속을 헤집고 들어가 심장에 연결된 혈관을 ‘뚝’ 끊어버렸던 것이다. 우리의 돼지 도축 방식보다 조용했다. 차이라면 우리는 피를 바깥으로 배출시켰지만 그들은 안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있지, 조금 있다 고백할 건데 나 돼지거든 나 본래 돼지였거든”
김혜순 시인의 시 ‘돼지는 말한다’의 일부분이다. 바짝 마른 장작이 도끼날을 받자 ‘쩍’하고 시원하게 쪼개지는 것 같이 통쾌한 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인간 그렇게 고상하지 않아. 우리는 천사가 아니야. 지금도 전쟁을 벌이고 살육을 자행하며 막장극을 펼치고 있잖아. 비루한 상상과 얼빠진 행동. 너와 나 모두 돼지라는 것을 인정하자. 그곳으로부터 출발하자.’ 하지만 그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깨닫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고급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우아하게 나이프와 포크를 잡고 순대를 썰어서 입에 넣는다. 돼지고기를 입에 넣으며 자신은 돼지가 아니라 고독한 영혼이라 믿으면서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저울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돼지가 느끼는 고통은 우리의 고통과 다르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동물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나? 내가 당신 속을 모르듯 당신의 아픔을 체감할 수 없듯이 그렇게 우리는 어둡다. 하지만 개를 키워보니 자연스레 느끼게 되었다.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뭇 생명도 사람처럼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불과 얼마 전까지도 백인들은 흑인들이 피부가 두꺼워서 고통을 훨씬 덜 느낀다고 여겼다지 않는가. 지금도 그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숨 쉬는 모든 것들의 옆에 가만히 앉아 함께 시간을 보내면 자연히 알게 된다. 고통은 생명체가 가지는 공통의 숙명이라는 것을. 어떤 이들은 그것을 쉽게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드럽고 맛있는 고기를 죄의식을 느끼면서 먹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 속에 나도 당연히 포함된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말이다. 얼마 전 영국에서는 갑각류 등 무척추동물도 고통을 느끼는 생명이므로 산 채로 요리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을 내용으로 동물보호법을 개정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제 주변에 대한 공감의 영역과 이해의 폭을 조금씩 넓히고 있는 것 같다.
거울 같은 연못의 수면 위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나르키소스. 아름다운 자신의 환영을 보고 사랑에 빠져버린다. 우리도 모두 나르키소스의 조각을 어딘가에 지니고 있다. 자아에 대한 강한 집착, 자존심을 향한 천착. 숭고한 나의 영혼이 내 몸 어딘가에 있어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믿음 말이다. 나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우리의 본능은 때로 부나방처럼 삿된 것을 욕망한다. 그 욕망의 크기에 비례해서 고통도 커지기 마련이다. 나르키소스는 우리 인간의 그러한 속성이 결국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깊이 알아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절절한 사랑의 대상을 끌어안았을 때 모래성처럼 부스러지는 허망함. 그래서 그 허무의 벽을 넘지 못하고 참담한 고통을 이길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나도 어쩌면 그릇된 욕심과 환상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우리의 인류도 기후위기와 AI의 위협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끝없는 욕망에의 질주, 더 크고 더 화려해지려는 무지개 같은 자신의 환영에 집착하다가 우물에 풍덩 빠져 버둥대는 돼지 꼴이 되지는 않을까?
비가 내린 후 산속 오솔길을 걷는다. 바람에 실려오는 소나무와 편백의 피톤치드향이 싱그럽다. 빗물을 흠뻑 머금은 낙엽과 솔잎에서 갈색의 구수하고 따스한 냄새가 은근히 피어오른다. 땅속에 묻혀있는 송로버섯(트러플)의 기분 좋은 향기도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슴 가득 숨을 들이켜면서 코가 근질거리는 나는 아무래도 전생에 돼지였던가 보다. 아니, 고백하건대 지금도 돼지다. 본래 그러했듯이. 행복한 돼지가 소멸한 꼬리를 흔들며 산길을 내려가고 있다.
*제목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1996>에서 따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