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에 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해 있었다. 시계를 쳐다보니 아직 늦지는 않았다. 오늘 해야 할 일들과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상념에 잠겨있는데 인근 농협 창고 건물에서 어느 20대 청년이 단감 박스를 나르는 모습이 보였다. 어깨에 단감 박스를 짊어지고 다른 손으로는 빙과를 입에 넣고 있었다.
초겨울로 접어드는 아침, 싸늘한 공기 속에서 아르바이트로 단감 박스를 나르는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힘들여 일하고 부지런히 돈을 모아 자격증 준비를 하려 할까 아니면 친구들과 함께 할 해외여행 계획을 짜고 있을까.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짐의 무게를 견디며 그는 무언가를 오래 기다리는 중이다.
청년이 지나치는 주차된 승용차 밑에는 회갈색 고양이가 웅크리고 앉아서 청년의 발을 커다란 눈망울로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차량 밑에 가만히 웅크린 고양이는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살피며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 옆 편의점 주차장에서 또 다른 남자가 전자담배를 피우며 서 있다. 아마도 출근길에 뭔가 살 것이 있어 잠시 들렀다가 담배를 태우고 있는 중이리라. ‘몇 모금만 더 빨고 차를 몰아서 회사로 가야 한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 늦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깐깐한 거래처 몇 군데를 둘러야 하는데 빡쎈 하루가 되겠군.’ 그의 사유는 전자담배 연기처럼 끊어지고 또 이어졌을 것이다. 담배를 태우는 그 시간은 그에게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도로 옆 밭에서 노인이 밭이랑을 정리하고 있다. 괭이로 흙을 쪼아서 고르고 다듬는다. 수확하고 난 땅을 고르는 것은 또 다른 작물을 위한 준비작업일 터이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하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급전이 필요하다며 땅 판 돈을 가져간 큰아들의 사업이 부디 성공하기를 빌고 있을까. 거동이 불편한 마누라의 신경통이 어서 나아지기를 바라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 파종하고 있는 유채 씨앗들이 내년에 노랗게 피어나기를 소망하고 있을까. 그는 괭이질을 하면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단감 박스를 나르는 청년, 승용차 밑 고양이, 전자담배를 피우는 남자, 밭을 가는 노인 그리고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던 나. 일 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여러 존재들이 같은 공간에서 다른 말들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 하나의 공통된 행위, 즉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전등불처럼 내 마음 작은 공간을 고요히 비추었다.
주식을 투자하고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사람,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 집 앞에서 어린이집 노란 차를 기다리는 젊은 엄마, 학교 앞 횡단보도에 형광색 조끼를 입고 경광봉을 흔들며 아이들을 보호하는 노인, 유니폼을 입고 치과로 들어가는 간호사, 셔터를 올리는 미용사, 경운기를 몰고 가는 농부, 치킨을 싣고 달리는 오토바이 배달기사, 저수지 가장자리 낚싯대를 드리우고 밑밥을 던지는 사람.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출근하면 퇴근을, 주중에는 주말을, 일 년 중에는 휴가를, 직장생활에서는 승진을. 아이의 입학과 졸업을, 군 제대를, 고통과 씨름하며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을 그리고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좋고 기쁘고 즐겁고 편안한 그 무엇이 찾아들기를 우리는 늘 기다린다.
오지 않는 사랑을 기다리고 떠나간 사랑이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기쁨이 오면 오래 지속되기를 기다리고 슬픔이나 고통이 찾아들면 어서 빨리 사리지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사람이 그리워 만나기를 기다리고 만나면 지겨워져 헤어진다. 헤어지고 나면 금붕어처럼 어느새 그 사람을 또 만나고 싶어 한다. 겨울이 오면 첫눈을 기다리는 자그마한 아이는 어서 커서 어른이 되기를 기다린다. 카페에서 두근거리며 연인을 기다리고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기다리고 만삭의 몸으로 태어날 아기와 만날 날을 기다리고 학원을 마치고 돌아올 아이를 기다린다. 살림살이가 더 펴지기를 기다리고 큰 집으로 이사 갈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당신은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끝없는 기다림이리라.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 ‘고도를 기다리며’의 인물들처럼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기다리는 존재들인지 모른다. 살아가는 일의 본질이 어쩌면 기다림이기 때문은 아닐까.
간절히 로또복권 당첨을 기다리던 사람의 통장에 거금의 당첨금이 꽂혔을 때 그의 오랜 기다림은 끝이 났을까? 간절히 기다리던 어른이 된 아이, 오랜 수험기간 후에 찾아온 대학 입학식, 손꼽아 기다리던 군인의 제대날, 여러 해 취업 입시 공부로 지쳐가던 사회준비생에게 알려진 합격통지, 살아서 나가기를 소망하던 중증환자의 퇴원수속, 속죄의 나날을 보내던 모범수의 퇴소. 버킷리스트인 세계여행을 끝낸 퇴직자. 그들의 기다림은 이제 끝이 났을까?
최근 어느 힌두교 요가 수행자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수십 년간 오른팔을 들어 올리고서 한 번도 내려놓지 않는 고행을 이어오고 있다 한다. 학교 다닐 때 무언가를 잘못하면 가해지던 흔한 벌칙이 ‘복도에 나가서 손들고 꿇어앉기’였다. 손을 든다는 것은 우리의 몸에 고통을 가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다. 수행자는 자신의 어떤 죄에 스스로 벌을 내리고 싶었을까? 그가 처음 팔을 들었을 때 고통은 폭풍처럼 몰려왔을 터이다.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우던 애착과 분노의 생각들은 그 소용돌이 속에 묻혀 버렸으리라. 이윽고 저려오던 팔에서 점차 감각이 사라지고 종래는 남의 팔처럼 감각 자체가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때 그를 괴롭히던 근심과 망상 그리고 욕망도 그에게서 사라져 버렸을까? 삶의 고통을 신체의 고통으로 대신하면서 그는 무엇을 그렇게 간절히 기다린 것일까. 그의 기다림은 이제 끝이 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기다림을 자신의 오른팔처럼 무감각하게 만들어서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 자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원도 이제 가을이 한창이다. 갈대가 하얀 손을 흔들며 이별을 아쉬워할 때 붉게 물든 잎들이 바람에 떨어져 내리고 국화꽃은 만개하여 은은한 향기를 바람에 싣는다. 오래 거닐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머물게 된다. 길과 연못을 만들고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었다. 정원을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무대를 조성하고 공연을 벌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자연은 계절의 변화에 맞춰 순환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그래서 정원을 만드는 일은 힌두교 수행자의 고행 같기도 하고 목마른 자에게 건네지는 시원한 우물물이 되기도 한다.
고대 사람들이 고통의 소멸과 행복의 도래를 소망하고 기다리며 돌을 쪼아 만들었다는 운주사 미륵불처럼 나와 아내도 무언가를 기다리며 우리만의 정원을 가꿔온 것인지도 모른다. 국화 꽃잎을 들여다본다. 노란 암술과 수술 둘레에 흰 꽃잎이 풍차처럼 가지런히 달려있다. 코끝을 가져다 숨을 들이마신다. 내 가슴속 한편에 노랗게 밝아지는 향기로운 등불 하나. 그 순간 나는 무엇도 기다리지 않았다. 가막살 열매같이 붉은 찰나의 침묵으로부터 돌아서면서 나는 또 한 계절을 꿈꾸고 당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