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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의 탈출

by 달빛정원 Mar 23. 2025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다. 목련은 조그만 꽃들을 흔들고 봄날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꽃샘추위에 주춤 뒷걸음쳤다.*’ 정원의 스카이로켓 나무는 바람에 휘청였고 집 뒤 대나무 숲은 파도처럼 일렁였다. 전봇대에 걸린 전선,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날카롭게 ‘휘이이’ 울었고, 물통, 항아리 등 속이 비어있는 것들은 ‘우우웅’ 울었다. 바람의 이중창이 을씨년스러웠다. 열려있는 창문이 덜컹거려서 닫았더니 실내가 일순 조용해졌다. 그때였다.


“끼긱... 푸드덕... 끼긱끼긱...”


조용히 책 속에 몰입해 있는데 얼핏 쇠나 유리를 긁어대는 소리가 났다. 유령인가? 소름이 돋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직감했다. ‘아! 또 올 것이 왔구나.’ 아직 난로를 매일 피우고 있었고 짝짓기 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참새가 연통을 통해 난로 안으로 들어와서는 마치 초인종을 누르듯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제 발로 들어왔으니 다시 그 길로 나가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안타깝게도 들어온 참새들은 모두 연통 바깥으로 다시 나가려고 시도를 거듭하다 지치면 반대편으로 출구를 찾아 벽난로 안으로 들어오고야 말았다.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다.


동물원에서 본 홍학이 생각난다. 얕은 연못이 가운데 있고 가장자리에는 낮은 펜스가 쳐져 있었으며 하늘에는 천장이나 그물도 없었다. 그런데 왜 홍학들은 날아서 도망가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유는 홍학 날개의 한쪽 끝을 잘라서 아예 날아오를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란다. 어떤 동물원은 홍학의 행동특성을 이용하기도 한다. 홍학이 날아오르려면 비행기 활주로처럼 도약하기 위한 일정한 길이의 공간이 필수적인데 중간에 나무들을 심어버림으로써 이들의 도약을 방해하여 날아오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될 때면 인간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참새는 심하게 불어대는 바람을 피하려고 연통 안으로 숨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통이 4미터 수직으로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한 번 아래로 떨어지면 다시 오르기에는 연통 안이 너무 비좁은 데다 헬기처럼 수직으로 떠오른다는 것은 아무리 비행의 귀재 참새라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홍학처럼 그 녀석도 통발에 빠져버린 물고기 신세가 된 것이다.


난로 입구 유리창 안쪽에서 참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수줍음 많은 사춘기 소녀가 첫사랑을 몰래 엿보다 들킨 것처럼 후다닥 거리며 난로에 넣어둔 참나무 사이로 숨어버렸다. 아내에게 알렸더니 “아니, 짝짓기 철도 아닌데 벌써 들어오고 난리야.”라며 한숨 쉬듯 말했다. 녀석을 빼내야 했지만, 바람이 거센 날에 난로의 문을 열었다간 역풍이 불어서 재가 온 집 안에 날아들 것이기에 참새를 꺼내주는 일은 바람이 잦아드는 다음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참새에게 난로는 감옥이 되었고 우리는 뜬금없이 간수가 되었다. 불청객 참새는 밤새 ‘찍’ 소리도 내지 않고 태평하게 꿀잠을 잤는데, 우리는 정작 이놈이 죽었나 살았나 괜히 걱정이 되어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감시 아닌 감시를 했다.


어릴 적 명절날에 가족들과 함께 티브이에서 보았던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가 기억이 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포로수용소에 갇힌 연합군 포로들. 그들 중 70여 명이 탈출을 시도한다. 어린 우리 형제들이 손에 땀을 쥐며 넋을 빼고 바라본 장면은 감방의 바닥에서부터 수용소 철책선 바깥까지 땅굴을 파서 탈옥을 시도하는 과정이었다. 독일군의 엄혹한 감시 아래 들킬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은밀히 작업을 해나가는 모습은 경탄스러웠다. 포로들은 임무에 따라 팀을 이루어 위조 여권을 만들고, 땅굴을 파고, 파낸 흙을 나르고, 나온 흙을 호주머니에 담아서 수용소 운동장 여기저기에 살며시 뿌렸다. 드디어 수용소를 빠져나온 포로들. 독일군의 사나운 추격을 피해 오토바이를 타고 자유를 향해 바람처럼 내달리던 스티브 맥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영화를 흉내 내고 싶었을까? 어디로 탈출하고 싶어서였을까? 어린 형제들은 비어 있는 방에 땅굴을 만들었다. 냉장고 포장용 종이박스를 방에 눕히고 의자 몇 개를 뒤집어 벽에 잇대어 붙여서 그 위에 담요를 덮고 그럴듯하게 길고 좁다란 터널을 만들었다. 드디어 탈출의 날이 왔다. 동생들은 터널 입구로 기어들어갔다. 나는 독일군이 되었다. ‘게 섯거랏!’ 외치며 땅굴로 따라 들어갔다. 동생들은 기겁을 하며 사력을 다해 기어나갔다. 우당탕거리는 깜깜한 터널에서 희끄무레한 동생의 발이 보였다. 힘껏 팔을 뻗어 발목을 움켜쥐었다. “끼아아항....노노..놔...까르륵” 동생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다리를 떨치며 자지러졌다.


영화 ‘대탈주’는 실화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인데 70여 명의 탈주자들 중 대부분은 다시 잡혔고 그중 50명은 총살당했으며 3명만 살아서 도망갔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탈옥수들이 잡히면 형량이 추가된다. 하지만 독일, 벨기에 등 몇몇 유럽국가들에서는 감옥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므로 탈옥 과정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처벌되지 않는다고 한다. 강제로 메여 있는 상황, 자의로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은 우리의 탈주 본능을 자극한다. 홍학, 참새, 사자 그리고 돌고래가 그러하듯이.


하지만 자발적으로 갇히는 사람들이 있다. 게다가 몇 만 원 돈도 기꺼이 치른다. 돈을 주고 일부러 갇혀서 머리를 싸매고 방법을 찾아야 풀려나는 방에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간다고 한다. 바로 방탈출 카페다. 물론 연인이나 친구들끼리 재미와 여흥을 위한 일일 테지만 내게는 그리 단순하게만 보이지 않는다. 치열한 경쟁과 커지는 빈부격차, OECD 자살률 1위, 행복지수 꼴찌, 그리고 정치적 양극화가 가속화하는 이 땅의 현실에서 젊은이들은 탈출하는 희열을 통해 고되고 팍팍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위안처럼 대신 누리고 싶은 것은 아닐까?


지구를 탈출하려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있다. 2029년까지는 인류가 화성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2050년까지 화성에 100만 명을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진심으로 추진하고 있는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다. 우리 인류가 화성에만 가면 거세당한 황소처럼, 시기와 질투, 혐오와 애착, 사랑과 미움, 오만과 편견, 욕망과 탐욕, 종교와 미신, 전쟁과 다툼, 집단주의와 배타의식도 모두 제거되어 마치 존 레넌의 노래 이매진(Imagine)처럼, 오로지 양보와 배려, 인류애가 충만하여 영원히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내가 똑똑하게 태어났으니 이기는 건 당연하고 내가 부자인 것은 오로지 나의 천재성과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우생학적 사고로는 지구를 탈출해서 화성, 아니 안드로메다에 가더라도 결코 살기 좋은 세상은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곳에는 또 다른 지옥이 잉태될 뿐이다. 차별하고 지배하고 배제하고 득세하려 들수록 평화와 행복과 공존의 세상은 무지개처럼 멀어지는 것이 우주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햄릿은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 나누는 대화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원래 좋고 나쁜 건 따로 있는 게 아닐세. 생각하기에 달린 것이니까. 내겐 감옥이란 말일세. 비록 내가 호두껍질 속에 갇혀 있어도 무한한 우주를 지배하는 왕이라고 자처할 수 있네. 내가 꿈으로 괴로움만 당하지 않는다면 말일세!” 이 대사를 접하고 셰익스피어의 인간 본질에 대한 직관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갈등과 괴로움의 늪에 빠진 햄릿은 우리의 또 다른 초상이자 꿈속에서 방황하는 고독한 인류의 형용이다. 그의 대사처럼 시골 오두막이든, 맨해튼 펜트하우스든, 화성의 어느 기지에 거주하든 ‘꿈으로 괴로움만 당하지 않으면’ 바로 당신은 <우주의 왕>이다.


다음날 바람은 언제 그렇게 불었냐는 듯 잠잠해졌다. 아침 일찍 벽난로 입구에 그물을 치고 빼꼼히 난로의 문을 열어 두었다. 참새 치고도 조심성 많고 소심한 녀석이라 그런지 10분을 꼼짝 않고 기다려도 녀석은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출근 준비를 해야 했고 아내는 난로에서 조금 떨어진 행운목 잎사귀 뒤에 숨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내가 사라지고 잠시 후 참새는 난로 문틈을 뛰쳐나와 그물로 돌진했고 그물 바깥으로 나가려 날갯짓을 하며 버둥거렸다. 아내는 재빠르게 달려가 그물과 출입문에 끼인 참새를 낚아챘다. 종이박스 땅굴에서 나에게 발목이 잡혔던 동생처럼 참새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찌이익~” 아내가 두 손으로 조그만 참새를 감싸 잡았을 때 따스한 온기와 함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연못의 물을 두 손으로 움키듯 아내는 우주의 불꽃을 소중히 감쌌다. 현관 밖으로 나가 그물을 젖히자 참새는 뒤도 안 돌아보고 휙 하고 날아가 버렸다. ‘우씨 인사도 안 하고 그냥 가냐? 안녕, 참새. 잘 살아~’ 아내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인두겁을 쓰고 제대로 살아왔을까. 울고 웃으며 여태껏 걸어온 나의 껍질도 이제는 낡았다. 고치 속에서 탈피는 뒷전이고 울화와 욕망으로 꿈틀대며 기름진 몸집만 헛되이 키워온 것은 아닐까. 햄릿의 대사처럼 고통이 넘실대는 세상이라는 감옥에 태어나서 목숨 다할 때까지 덧없는 수인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자각이 들 때면, 우리는 애벌레가 껍질을 벗어나 날개를 펴고 날아가듯 언젠가 고통과 눈물 없는 평화의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인류는 오래오래 그 꿈을 꾸어왔다. 참새가 난로를 탈출해서 ‘포르르’ 날아가는 것처럼 괴로운 꿈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자유로울 수 있는 그 행복 말이다. 나와 당신의 탈출을 기원한다.






* 김성호의 노래 <회상> 첫 소절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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