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그 친구를 다시 만난 건 검도(劍道) 도장에서 이후 처음이었다. 사무실 출근하고 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만났다. 초췌한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생뚱맞게 아침 일찍 사무실 근처에서 그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누구를 찾으려고 이 동네에 왔다고만 그가 말했지만 묻지 않아도 내막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의 직업이 형사였으므로 범인을 잡으러 근처 어느 골목에서 잠복근무를 했을 것이었다. 그냥 보내기 아쉬워서 식사는 했냐고 물었다. 아직 못했다길래 우리는 가까운 국밥집으로 향했다.
24시간 영업하는 돼지국밥집이었다. 자리에 앉자 유리창으로 굵은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아, 이런... 우산을 미처 챙기지 못했네..." 내가 중얼거리자 그가 "비 좀 맞지 뭐."하고 무심히 대답했다.
돼지국밥이 나왔을 때 그가 아주머니에게 ‘소주도 한 병 주세요’하고 말했다. 잠시 후 소주와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가 “아지매, 맥주 잔도 하나 주이소.”하고 다시 말했다. 내가 “왜 소맥 하려고?”하고 물으니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컵이 도착하자 그가 내 작은 소주잔을 채워 주더니 자신의 맥주컵에 소주를 콸콸 부었다. 왜 그러냐 물으니 조그만 소주잔에 자꾸 따라주고받아야 하는 것이 귀찮아서 그런다 했다. 상대를 성가시게 하기도 싫고 그냥 술 마시는 행위에 집중하고 싶다 했다. 그는 맥주를 마시듯 소주를 마셨다. 평일 아침 유리창 너머로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어느 경찰서에 있냐고 물으니 다른 도시로 전근을 갔다고 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냐 되물으니 범인의 주거지가 이 근처라 어제저녁에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하면서 눈꼬리가 약간 처져서 삼각형인 그의 눈 속에 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매서운 눈매는 마치 사슴을 쫓아 며칠을 따라온 늑대같이 보였다.
그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작고 호리호리한 체형에 말이 없었다. 조용한 성격이라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중퇴를 한다는 것이었다. 특별히 사고를 치거나 비행을 저지르지도 않았지만 성적이나 진로 문제로 담임선생님과의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당시에 학교를 그만둔다는 것은 꽤나 심각한 일이었다. 지금은 검정고시를 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자진해서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말이다.
졸업 후 그를 다시 만난 건 검도장에서였다. 나는 직장생활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업무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심했다. 운동을 통해 극복해 보려고 새벽반에 등록을 했다. 왜 검도였을까? 수련을 하듯 싸움을 하듯 나를 몰아붙이고 싶었는지 모른다.
왜 우리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마라톤, 헬스, 클라이밍, 철인 삼종경기 등 힘겨운 일에 매달리는 것일까. 매사에 행복하고 만족스럽다면 그런 일을 왜 사서 하겠는가. 잊고 싶은 것을 잊을 수 있게 만드는 그 무엇을 부여잡으려는 집작이나 불안하고 만족스럽지 않은 현재를 극복해 보려는 그런 욕구가 원인은 아닐까. 그래서 고행의 길을 대안으로 선택하는지 모른다.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서 삶의 강을 건너려는 수도자처럼.
추운 겨울 캄캄한 새벽에 집을 나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도장에 도착하면 나 혼자였다. 그 시간대에 수강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범은 잠이 덜 깬 듯 부스스 한 모습으로 내게 기초부터 가르쳐 주었지만 한 명을 위한 수업이 성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도장에 또 한 명이 나타났다. 바로 고등학교 3학년 때 중퇴를 했던 그 친구였다. 그때 알았다. 세상의 인연이란 알 수 없는 묘한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검도는 초심자든 유단자든 기본 동작들을 같이 연습한다. 유단자들은 고난도의 동작만을 따로 연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들도 처음 배웠던 것들을 연습하며 운동을 시작했다. 합동 연습이 끝나면 타격대를 두드리고 대련을 하는 유단자들을 보면서 나는 언제 저렇게 해보나 선망의 눈으로 지켜봤었는데 그 친구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유단자였다.
나는 그때 뭔가 잘 되지 않는 단계에 막혀 있었다. 가만히 서 있다가 순간적으로 상대의 머리를 가격하는 동작이었다. 사범이 강조하는 ‘기검체’ 일치, 즉 기합과 검과 몸이 하나로 이뤄지지 않았다. 검이 머리를 타격할 때 앞발이 ‘쾅’하고 마루가 꺼질 듯 울려야 하는데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발을 세게 구르려 연습하고 애를 써도 외려 소리는 더 작게 울릴 뿐이었다. 사범의 채근이 늘수록 나는 더욱 세게 굴리려고 발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진척이 없었다. 뭔가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혼자 연습해 보라며 사범이 사무실로 들어가 버리자 곁눈질로 지켜보던 그가 다가와서 내게 말했다.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어.”
“힘을 빼야 구르는 힘이 더 커져. 바닥을 세게 치려고 욕심을 부리니까 힘이 들어가는 거야."라고 덧붙였다. 무심하게 하늘로 발을 툭 차라고 말했다. 땅이 아니라 반대로 하늘을 차야 바닥을 구를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한 번 해보았더니 거짓말처럼 ‘쾅’하고 바닥이 울렸다. 그렇게 안 되던 동작이 그의 말 한마디에 단박에 이뤄진 것이었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간의 사정을 들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 후 직업군인으로 입대를 했고 이후 제대를 하고 경찰이 되었다고 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체형이 작고 호리호리 했는데 키도 훌쩍 커지고 덩치도 단단해져 있었고 눈빛도 여전히 날카로웠다. 늦게 시작한 경찰 생활이었지만 부지런히 시험을 치러서 또래보다 오히려 계급이 높았다.
새벽마다 운동을 나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죽도를 쥔 손에 물집이 몇 번이나 잡히고 발바닥의 껍질이 벗겨져 쓰릴 무렵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나는 검도를 그만두었다. 이후 몇 년 그를 만나지 못하다가 우연히 사무실 앞에서 그렇게 다시 조우하게 된 것이었다.
국밥집을 나서서 비를 맞으며 걸어가던 뒷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얼마 전 그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같은 모임을 하던 다른 친구를 통해서였다. 지병이 있었던 그가 큰 수술 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글라스로 소주를 먹었잖아. 의사가 먹지 말랬는데..." 그 친구가 덧붙였다.
삶도 검도를 하듯 하나의 수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삶의 기본동작을 매일 반복해야 한다. 밥 먹고 싸고 숨 쉬는 일. 지향점을 향해 끝없이 노력하는 일. 한 단계 또 한 단계 고개를 넘어야 하는 일. 때론 단단한 벽이나 아찔한 절벽을 마주하는 일. 어쩌면 열쇠 같은 조언을 해주는 삶의 사범을 만나기도 하면서 말이다.
”힘을 빼고, 하늘을 차야 땅이 울린다."던 그의 말이 살아가면서 괴롭거나 잘 풀리지 않을 때 문득문득 떠올라 내게 울림을 주는 한 마디가 되었다는 것을 그는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때로 위대한 사람들의 명언보다 장삼이사가 내뱉는 일상의 말이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음을 그는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처럼 공명을 줄 수 있을까? 오지랖 넓은 말로 상처를 주지 않으면 다행이지 싶다.
대체공휴일 오후, 반백을 넘긴 이 마당에 내 삶도(道)는 어느 경지에 이르렀을까를 생각하며 비 갠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