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빼는 거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난처한 표정을 한 어느 중년의 여인이 사무실로 찾아와 말했다. 건물 지하에 차를 주차했는데 빠져나가지를 못하자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지하 주차장은 협소해서 만차가 되면 되돌려 나오기 어려운 공간이다. 그래서 운전자들이 일을 보고 나갈 때 종종 애를 먹기도 한다.
여인을 따라 어두운 계단을 내려서자 동작감응 자동램프에 불이 들어오면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훤하게 드러났다. 여인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동굴인 것처럼 울렸고 차갑고 음습한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차를 구하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는 음유시인이었다. 자신의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슬픔에 빠져 괴로워하다가 간절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하계에 있는 저승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저승의 신들을 만나자 자신의 특기인 산천초목도 울게 한다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 후 아내를 다시 살려줄 것을 간청했다. 노래에 감동한 저승의 왕 하데스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정하고 아내와 함께 지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지켜야 할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지상에 도달하기 전까지 그는 절대로 아내의 얼굴을 돌아봐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가 앞서고 아내가 뒤를 따르며 길을 떠났다. 이윽고 저 멀리 지상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립고 보고 싶은 아내였던가. 오르페우스는 참지 못하고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순간 아내 에우리디케는 안개의 정령으로 변하여 지하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뒤를 돌아보지 말아라.”
엄마를 산에 묻고 돌아설 때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뒤돌아보면 망자의 혼이 슬픈 미련을 차마 버리지 못해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곁에 남는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자 슬픈 감정이 제지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나는 말의 올가미에 묶인 채 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며 산을 내려왔다. 한발 두발 대지의 흙을 밟고 내려오면서 수많은 생명들이 이렇게 흙이 되었겠구나, 어쩌면 나도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를 타기 전에 나는 할머니의 충고를 잊고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가 묻힌 산은 여기저기 목련꽃이 하얗게 피어나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엄마의 영혼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엄마가 그리워 눈물짓는 날들만 오래 지속되었을 뿐이다.
저승까지 찾아가 아내를 구해 나오던 오르페우스도 결국 실패하고 만다. 생명체에게 죽음은 숙명이며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신화는 전하고 있는지 모른다. 왜 돌아보지 말아야 할까?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남은 자들은 자책감이나 죄의식을 느낀다고 한다. 내가 속을 썩여서, 내가 모질게 한 어떤 말 때문에, 더 사랑을 주지 못해서, 더 잘 돌보지 않아서..... 오르페우스 신화와 우리의 문화는 죽은 자를 죄의식의 눈으로 돌아보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살아남은 자에게 내려앉는 감정의 멍에를 벗어버리라고, 떠난 자에게 속세의 미련을 이제 거두라고 말이다.
1700년대 독일의 작곡가 글루크가 이 신화를 모티브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라는 3막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초연이 있고 나서 사람들이 비극으로 끝나는 줄거리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바꿀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지금의 오페라는 신화와 달리 사랑의 신 아모르가 에우리디케를 살려줘서 사랑을 이룬다는 행복한 결말을 갖게 되었다 한다. 그 당시 관객들도 오르페우스처럼 뒤돌아보는 성향을 어쩌지 못했나 보다.
미안해하는 그녀에게서 자동차 키를 받아 앞뒤로 몇 번을 왕복하고서야 차는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다. 낯선 차에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너무 좁은 지하공간 탓이었을까. 후진하다가 벽에 ’쿵‘하고 부딪혔다. 살짝이긴 했지만 그녀의 표정을 살피려고 둘러보았더니 중년의 그 여인은 벌써 주차장 입구로 올라가고 없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어둠 속에서 햇빛을 향해 나는 가속 페달을 밟아 서서히 올라갔다. 지상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리자 그녀는 마치 에우리디케를 만난 듯 자신의 차를 보고 활짝 웃으며 반겼다. 내게 감사하단 인사도 잊지 않았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 차에 타자마자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사라져 갔다.
바쁜 일들을 마치고 오랜만에 여유로운 휴일을 보냈다. 정원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꽃사과나무는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잎을 바람결에 비처럼 날리우고 있다. 떨어진 꽃잎은 다시 붙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걸까. 나무는 의연하게 서서 낙화를 맞이하고 있다. 나와 아내만 "아! 저걸 어째... " 하며 안타까워한다. 보고 또 돌아본다. 그래서 사람이 어리석은 것인지 모른다.
내 심장은 부지런히 뛰고 봄은 또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