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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정원 Mar 24. 2024

인생의 봄날은 언제인가요?

퇴근할 때 남아서 일하던 직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완연한 봄이네. 먼저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돌아서는 나를 향해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나는 갑자기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근데, 인생의 봄날은 언제야? 아니 언제였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건가?”


직장 스트레스에 시달려도 항상 따뜻한 미소와 부드러우면서도 단아한 자세를 잃지 않는 그녀. 어린 자녀들을 돌보는 직장맘으로 부지런히 살아가고 있다. 업무 중에도 틈틈이 자녀들의 학교와 학원, 그리고 숙제를 챙기느라 통화하는 모습을 볼 때면 안쓰럽게 느껴지곤 했다. 정신없이 쫓기듯 살아가는 나날들 속에서 꽃이 피고 있음을, 바람 속에서 봄의 향기가 실려오고 있음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지 모르고 어쩌면 그런 감성에 눈 돌릴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에게 봄을 환기시키는 말을 건네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말의 방향이 의도치 않게 불쑥 바뀌어 인생을 묻는 묵직한 돌직구가 건네지고 말았다. 어쩌면 그녀가 생각하는 인생의 봄날은 언제였을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리라. 가볍게 전하려던 나의 인사가 느닷없이 무겁게 날아들자 그녀의 표정이 다소 굳어지면서 잠시 생각하더니 생긋 웃었다.


벚꽃처럼 꽃망울이 터지던 이십 대의 나는 꽃샘추위처럼 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아직 한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육체와 정신의 변화, 그리고 삶의 불안정과 외로움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문태준 시인의 시 ‘매화나무의 해산’에서처럼 내 청춘의 개화에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친구들도 군에 입대하러 다 떠나버렸고 내 짝사랑은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꼬깃꼬깃 주름이 지고 있었으며 격정과 우울과 분노가 변덕스럽게 나부끼던 봄바람처럼 마음을 어지럽히던 시절이었다. 여기저기 꽃이 피고 바깥이 실내보다 더 따스하게 바뀌었지만 나는 추위에 웅크려 있기만 했다. 신문지를 깔고 손톱을 깎던 중에 진해 군항제 관련 기사를 보고 문득 집을 나섰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진해 가는 버스를 탔다. 축제가 끝난 후라서 그런지 버스 안은 한산했다.


차에서 내린 진해 거리는 온통 하얀 꽃잎 천지였다. 이리저리 세차게 불어대는 봄바람에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벚나무에는 이제 파릇한 잎들이 돋아나와서 시든 꽃을 밀어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 축제의 도시는 텅 비어 있었고 꽃잎은 그야말로 여름 장대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한참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근처에 중국집이 보였다. 호주머니에는 돌아갈 차비를 빼고 짜장면 한 그릇 값만 남아있었다. 관광지라서 짜장면 가격이 비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굶을까 하다가 일단 들어가서 메뉴를 보고 가격이 비싸면 잘못 들어온 사람처럼 나오자 하는 생각을 했다. 좁은 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머리와 어깨에 묻은 꽃잎을 털고 테이블에 앉았다. 새카만 눈에 오동통한 볼, 붉은 입술을 한, 갓 스물 쯤 돼 보이는 소녀가 주문을 받았다. 내가 짜장면을 선택하자 소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로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이었고 소녀는 사장의 딸인 듯 보였다.


짜장면이 나왔고 먹으려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머리 위에 아직 남아있던 꽃잎 하나가 검은 면발 위에 살며시 떨어졌다. 짜장면처럼 검게 얽힌 내 청춘의 나날들 위로 작은 희망이 한 가닥 내려앉은 것 같아서였을까. 내 인생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기나 할 것인지 막막한 생각 때문이었을까. 벚꽃 잎 지는 작은 도시 어느 골방에서 짜장면 위로 알 수 없는 나의 슬픔이 그만 툭하고 떨어졌다.


일본식 이층 장옥(長屋 나가야)집들이 늘어서 있던 이국적인 거리. 축제가 끝난 후 텅 빈 무대 같은 그 도시. 까만 짜장면 위에 흰 꽃잎 하나. 그날의 기억들은 지금도 사진처럼 선명하다.


퇴근 무렵 ‘인생의 봄날은 언제인가?’라는 나의 도발적인 질문에 그 직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이요.”


어린 자녀들을 부지런히 기르고 남편과 함께 바쁘게 살아가는 오늘이 어쩌면 그녀의 인생에서 힘든 시기일 수도 있을 텐데 그녀는 지금이 바로 자신의 인생의 봄날이라고 선뜻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전하는 눈빛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다.


매화나무처럼 대책 없이 피어나던 청춘의 봄날에 넋을 놓고 앉아 있던 내 이십 대 젊은 시절. 나는 내가 꽃인 줄도 모른 채 차가운 겨울 속을 헤맸다.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사실 우리의 봄날인 것을. 지나고 보면 힘들고 괴로워도 내 마음이 꽃을 찾으면 겨울도 눈 녹듯 사라지고 봄이 될 수 있는 것임을. 불안과 걱정 그리고 분노에게 지금 내 마음자리를 내어 주면 봄이 와도 봄이 아닌 것을. 스무 살 그때는 몰랐고 지금도 자주 잊고 산다.


지금 불행하다 느껴질 때면 내가 너무 많이 가진 건 아닌지, 너무 많이 가지려 하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려 한다. 남들보다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가진 것 잃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과 가진 것 더 늘려야겠다는 욕심에 끌려다니는 처지를 아직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축제가 끝난 도시, 벚꽃 잎 떨어진 짜장면, 직장맘 동료 직원 그리고 나, 이 모두가 봄날이고 꽃이다. 움켜쥔 것 사라지고, 많은 인연 스치며 지났건만 남은 것은 기억뿐. 나를 이루던 이 모든 세상도 벚꽃잎처럼 언젠가는 흩날리겠지. 가만히 귀 기울이자. 어디서 새소리 들리고 향기가 바람에 실려온다. 그렇게 봄날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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