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출근할 때면 아내는 대문까지 따라 나와서 배웅을 한다. 그 익숙한 풍경 속에 요즘은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 아내 바로 뒤 마가목 가지 위에 수십 마리의 참새들이 새카맣게 앉아서 같이 배웅을 해준다는 것이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고개를 젖혀 참새를 보며 방긋 웃는 아내의 얼굴. 그녀에게는 팬들이 너무 많다. 그녀는 인복(人福)도 많지만 수복(獸福), 즉 동물복이 많다.
인류와 개가 어떻게 지금의 관계를 갖게 된 것일까? 한동안 사람들은 누군가 처음 늑대 새끼를 주워 기르게 되었고 그것이 개의 조상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달리 해석한다. 늑대가 인간에게 먼저 다가왔다는 것이다. 사람의 똥과 남은 음식물 등을 먹으려고 어슬렁거리다가 점점 친해졌고 그중에 순한 것들이 남아서 인간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축화 가설이다. 늑대 중 일부가 스스로 가축화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최근 아내는 그 같은 과정이 사실일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얼마 전 보관하던 쌀이 그만 상했다. 그냥 버리기 아까워 마당에 조금 뿌렸다. 그러자 참새들이 와서 순식간에 다 먹어치우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아침 내가 출근하고 나면 조금씩 뿌려주었다고 한다.
어느 휴일, 아침을 먹고 가만히 아내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내가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자 어디서 날아왔는지 수십 마리의 참새들이 아내 주위를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아내가 잔디밭에 쌀을 반 주먹 정도 뿌리자 참새들이 새카맣게 내려앉아서 쪼아 먹었다. 직접 목도한 나는 어이가 없고 신기하고 또 약간 무섭기까지 했다. ‘참둘기’라고 해야 할까.
얘네들이 밥 주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인지 아내만 나가면 어떻게 알고 우르르 몰려와서 어깨나 머리 위에 앉을 기세로 주위를 날아다녔다. 아내가 갑자기 마녀같이 보였다. 마치 쥐떼를 몰고 다니는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연못에 금붕어는 아내의 그림자만 어른거려도 물 위로 올라와서 무리 짓고, 마당에 앉으면 직박구리가 날아와 좀 봐달라고 찍찍거리며 울고, 물까치 가족들도 날아와서 시끄럽게 떠들다 간다. 길고양이, 멧비둘기, 찌르레기도 즐겨 방문하고 반갑지는 않지만 두더지도 여기저기 마당에 구멍을 내며 살고 있다. 울타리가 없었다면 고라니와 멧돼지도 들어와서 푸바오 부럽지 않은 애교를 부렸을 것이다.
처음에는 예닐곱 마리에서 출발했는데 참새 동네에 소문이 났는지 점점 늘어나서 이제 오십여 마리가 넘게 되었다. 게다가 직박구리 한 쌍도 꽃사과 나뭇가지에 달린 열매를 겨우내 찾아와서 먹더니 우리가 먹다 버린 사과껍질 등에 맛을 들여서 아예 눌러앉았다. 아내가 챙겨주는 과일 껍질로 아침 식사를 하고 나면 직박구리 부부는 타지로 출근해서 먹이활동을 하다가 저녁나절쯤 집으로 돌아와 정원 나뭇가지에 잠자리를 마련한다. 그들의 일상에서 우리 집이 중요한 근거지가 된 셈이다.
아내가 닭에게 모이를 주듯이 과자 부스러기나 묵은쌀 등을 뿌려주면 참새와 직박구리 암컷은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하지만 직박구리 수컷은 달랐다. 머리털을 마치 인디언 추장의 깃털모자처럼 쭈뼛 세우고 날개를 바르르 떨면서 분노를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거세게 날아서 참새를 쫓아냈다. 심지어 동작이 굼뜬 참새는 깃털이 뜯기기도 했다. 쫓고 쫓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탑건 매버릭에서 신기의 활공능력을 보여주던 탐 크루즈가 떠올랐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수컷이 먹이 앞에서는 제 암컷도 내쫓는다는 것이다. 비정하게도 제 식구인 암컷을 거둬 먹이지는 못할망정 먹지 못하게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러면 암컷은 인근 가지에 숨어들어 얌전히 수컷의 동태를 살피며 눈치를 봤다. 그 틈을 노려 참새들은 내려와서 열심히 모이를 쪼고 수컷이 참새를 쫓으면 암컷은 잽싸게 내려와 먹이를 먹고, 또 수컷이 쫓고... 그렇게 반복하면서 아침식사는 끝이 났다. 수컷은 얼마 먹지도 못하면서 칼로리는 그보다 더 많이 소비하는 듯했다. 실속은 사실 암컷이 챙겼다.
봄을 맞으며 정원 일이 늘었다. 겨우내 미뤄왔던 일들 때문이다. 여느 때처럼 라디오를 켜고 음악을 들으며 작업을 했다. 아나운서의 멘트 중에 문득 반가운 단어가 들려서 귀를 기울였다. ‘주남저수지’ 철새에 관한 얘기였다. 봄이 되었지만 아직 떠나지 못하고 남은 철새들은 낙오자일까? 지각생일까? 때로 경쟁에 뒤쳐졌다고 느낄 땐 낙오했다는 비관보다 조금 지각했을 뿐이라는 긍정적 생각으로 삶에 여유를 갖는 건 어떨까 하며 마무리하는 내용이었다. 다시 음악이 시작되자 나는 거기에 보태어 한 생각이 더 일어났다.
수렵 채집을 하며 철새처럼 이곳저곳을 떠돌던 신석기인들 중 일부가 농경을 시작하고 한 곳에 정착했을 때 그들은 나머지 수렵인들에게는 낙오자였을까 지각생이었을까.
우리나라 경제성장기. 너도나도 고향을 떠나 도시를 향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 눌러앉았다. 철새들이 보았다면 그들은 낙오자일까 지각생일까.
남태평양 아름다운 섬나라에 온 관광객이 하릴없이 놀고 있는 원주민을 만났다. 왜 그렇게 빈둥거리면서 놀고 있냐고. 부지런히 일하면 충분히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조언을 했다. 그러자 원주민이 돈을 많이 벌면 무얼 할 수 있는지 관광객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 관광객이 배를 사서 낚시도 하고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원주민이 말했다. “지금 내가 그렇게 지내고 있다오.”
남태평양의 원주민과 라다크의 티베트인, 그리고 생태적 삶을 지향하며 느리게 사는 사람들은 낙오자인가 지각생인가 아니면 오래된 미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가?
봄이 되어도 주남저수지에 잔류하고 있는 겨울 철새들의 대부분은 거동이 불편하거나 늙은 새들이다. 천리만리 머나먼 여행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냥 눌러앉은 것이다. 봄, 여름, 가을 지나 다시 겨울. 동료들이 이역만리 차가운 땅에서 주남저수지로 돌아왔을 때. 남았던 그들은 낙오자도 지각생도 아니다.
다만 ‘먼저 온 자’ 일뿐이다.
직박구리도 사실 철새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에 텃새로 정착했다 한다. 저녁노을이 뉘엿뉘엿 붉게 물들 무렵 마당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직박구리 부부가 잠자리를 찾아 우리 정원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다. 수컷과 암컷은 마치 내외하듯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내가 암컷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런 못 돼먹은 수컷이 뭐가 좋다고, 저렇게 눈치를 보며 붙어 지내나. 참 딱하다.” 그러자 아내가 덤덤히 말했다.
“내 처지랑 비슷하네.”
순간 나는 찬물을 한 바가지 둘러쓴 것처럼 얼어붙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뭐가 어째?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내가 당신을 그리 구박했나? 비유를 해도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도끼눈을 한 채 목청 높여 되묻자 아내가 차분히 말했다.
“사실 나도 당신 눈치 많이 봐. 한 번씩 벌컥 화내면서 구박하지, 설거지하다가 그릇을 깨면 비꼬면서 나무라지, 집안 정리 안 돼 있으면 이것저것 잔소리 하지, 퇴근하면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냈나 살펴야 하지, 연락 없이 늦어지면 걱정되지, 힘이 없어 보이면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염려되지, 당신 출근하는 뒷모습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짠하지...”
나는 망연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입안이 바짝 타서 마른침을 삼키며 나무만 올려다보았다. 직박구리 수컷 뒤쪽 저만치 떨어진 가지에는 암컷이 물끄러미 수컷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목을 짧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수컷의 구박에도 눈치를 보며 함께 붙어서 살아가는 직박구리 암컷의 비밀이 물 스미듯 가슴에 고였다.
그것은 생존본능도 유전자의 작용도 자연선택도 아니다. 바로 사랑 때문이다.
암컷을 위한답시고 벌컥 화내며 구박하는 사랑. 조건과 기준을 앞세우는 사랑. 사랑의 진폭을 깊이로 착각하는 사랑, 활화산처럼 타올라서 용암과 화산재로 뒤덮고는 차갑게 식어버리는 그런 수컷의 사랑이 아니다.
무던히 참고 인내하는 힘. 모질게 대하는 박정(薄情)에도 떠나지 않고 조용히 그 뒤를 따르는 염려. 허세를 보듬어 주는 너그러움. 표 나지 않지만 무던히 뜨겁게 끓고 있어 가까이 다가가 온천욕을 하면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휴화산 같은 그런 한 수 위의 사랑. 바로 암컷의 사랑이다.
암컷은 승리자인 것이다. ‘먼저 온 자’이자 ‘사랑의 승리자’.
붉게 물든 노을에 걸려 있는 직박구리 부부를 보면서 내 얼굴도 내 마음도 붉게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