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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정원 Feb 04. 2024

꼬리가 길면 벌어지는 일

유난히 춥고 바람 불던 날이었다. 점심시간에 식당을 다녀온 후 사무실에 도착하니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누가 이렇게 문을 열어 놓고 다니나’하고 살펴보니 방학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이십 대 초반의 대학생이 먼저 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학생을 보며 농담처럼 말했다.


“너 왜 그렇게 꼬리가 길어?”


그 소리를 들은 학생은 무슨 뜻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묵묵부답이었다. 잘 못 들었나 싶어 다시 얘기했다. 그러자 학생이 대답했다.


“저 꼬리 없는데요.”


농담인데 진담으로 알아들음에 순간 당황했다. 얘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내 말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꼬리가 길다’라는 말은 겨울철 문을 닫지 않고 들어온 사람에 대한 비유라는 것을.


그 대학생만 그런가 하고 다른 젊은 직원들에게도 똑같이 물어보았더니 그들도 까맣게 몰랐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라는 말만 알고 있을 뿐.


내 어릴 적 겨울철만 되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말이 ‘왜 꼬리가 그렇게 길어?’였다. 찬바람 들어오니 문을 닫고 오라는, 추울 땐 문을 꼭 닫고 다니라는 주문으로 어른들이 자주 하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70~80년대 서민들은 대부분 난방이 잘 되지 않는 주택에 살았다. 한겨울 방 안에 앉아 있으면 입김이 보일 정도였기에 등이 시려서 앉아 있기도 힘들어 이불을 깔아 둔 온돌바닥에 등을 대고 눕기 일쑤였다. 내 어깨가 다소 구부정한 것도 사실 어린 시절 추위 때문에 몸을 옹송그리고 생활했던 탓도 있으리라.


요즘 젊은 세대는 아파트 생활을 해온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출입문은 알아서 저절로 닫히고 실내에는 이제 더 이상 ‘위풍’이 없다. 아파트는 주택에 비해 단열이 좋다 보니 여름처럼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세대들이 ‘왜 그리 꼬리가 길어?’라는 말을 들어봤을 리가 없다.


이십 대 젊은 직원들은 88 서울올림픽은 물론이고 2002년 월드컵도 잘 모르고 우리가 익숙한 가수나 연예인들도 알지 못한다. 사회생활에서 당연하다 여겨지는 예절에도 그리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최근 ‘꼬리가 길다’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사건’을 겪고 보니 다시금 세대차를 실감하게 되었다.


언제나 청춘인 줄 알았던 내가 거울 속 늘어난 주름을 발견하며 늙었다는 걸 한탄하듯 젊은 세대의 말과 행동에서 느끼는 격차를 통해 또 한 번 내가 늙었음을 확인한다. 그들과 같은 사무실에서 생활하면서 느끼는 이질감과 무례함에 때로는 화가 나고 속상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일일이 나무라거나 다잡을 수도 없기에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할 경우가 많다. 젊을 때는 거센 상사들 눈치 보고 비위 맞추느라 힘들었다면 퇴직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요즘은 젊은 직원들의 태도와 말투에 적응하느라 힘이 든다.


누구 덕분에 이만큼 사는 것이냐고, 누구보다 더 힘든 세월을 보냈다고, 그러니 인정해 달라는 ‘라떼’ 감성의 진부한 넋두리는 결코 하고 싶지 않다. 개인의 삶, 세대의 고난은 각기 제 시절을 만나서 제 몫을 살아낸 결과일 뿐이니까. 혹여 세대차라는 편견의 감옥에 갇혀 밖으로만 화살을 쏘아대는 노예는 되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우리는 모두 어린 감성을 지닌 허수아비라는 것을 인정하며 서로 연민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까짓 차이쯤이야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터이니.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의 8할은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일이 힘든 것보다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겪는 고통이 더 크다. 내 탓이든 남의 탓이든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렇다고 홀로 살 수도 없으니 그것이 문제다.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도, 멀어지고 싶다는 갈망도 모두 내 속에서 같이 요동치고 있으니 말이다. 혹독한 추위를 피해 조그만 굴속에 오글거리며 모여든 고슴도치들처럼 조심하며 살 밖에는.


어지러운 마음으로 정원에 멍하니 섰다. 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니 주남저수지를 찾아온 철새들이 저 너머로 날아가고 있었다. 맨 앞에 날아가던 녀석이 피리 소리처럼 ‘끽’하자 뒤를 따르던 가족들이 오보에 소리처럼 ‘고곤’했다. 마치 노동요를 부르면서 들일을 하던 우리네 선조들처럼. ‘끽, 고곤, 끽, 고곤...’ 구호 소리에 맞춰 날갯짓을 하며 어디론가로 날아갔다.


“새는 사실 날고 싶지 않아요.”


어느 유명한 생물학자의 말이다. 육지에 새들의 천적이 없는 생태환경을 갖춘 호주나 뉴질랜드에서는 키위나 에뮤 등 날지 못하는 새들이 20여 종이나 있다고 한다. 새들은 육지가 안전하면 굳이 날아다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새들은 당연히 날고 싶어 할 것이라고, 아니 제 몸뚱이로 날아다니는 것이 그들만의 특권이자 행복이리라 생각해 왔던 나로서는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그토록 부럽게 바라보고 흉내 내는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그네들은 벗어나고 싶은 굴레로 여긴다니 말이다.


애초에 새들은 그들의 조상이 날고 싶어서 그리된 것이 아니다. 먹이를 찾아서, 천적을 피해서, 뛰고 활강하며 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어느덧 날아다닐 운명을 얻게 된 것이리라.


어느 여름철 중년의 방송사 카메라맨을 옆에서 본 적이 있다. 그의 한쪽 팔뚝은 뽀빠이처럼 굵었다. 무거운 방송카메라를 늘 들고 다니다 보니 저절로 그리 되었을 것이다. 새들의 가슴 근육이 불룩한 것도 날아다니는 것이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새들은 먹이를 찾아 힘들게 날아다니기보다는 할 수만 있다면 편하게 땅에 안주하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아주 오랜 옛날, 육지에서 뛰어다니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 유영하는 고래처럼.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럽게 바라보는 그들도 사실 죽지 못해서, 살기 위해서 오늘도 그렇게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저지른 기후변화와 자연파괴 때문에 줄어든 먹이와 안식처를 찾으며 그들도 지금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다. 플라스틱과 비닐을 뱃속에 채우고서.


이리 치이고 저리 차이며 쓰린 속으로 올려다본 하늘. 산업화의 정점으로 치달으며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 기술의 진보는 삶의 평화로 이어지지 않고 더욱 빠른 속도로 우리를 경쟁으로 내몬다. 적응하느라 따라가느라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스스로를 옭아매며 사람들은 오늘도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상처와 고민과 번뇌를 머릿속에 가득 채우고서.


2024년 2월

날고 싶은 한 인간과 날고 싶지 않은 새들이 서로 바라보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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