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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정원 Jan 14. 2024

살면서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되는 것

엊그제 같은데 장기교육을 다녀온 지가 벌써 1년이 지났다. 쉼 없이 돌아가는 바쁜 일상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서 학창 시절처럼 수업도 받고 체험하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직장생활과 어느덧 반백을 넘긴 인생을 돌아보고 자신을 더 성숙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계기였던 것 같다. 1년간의 교육이 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무 짧게 지나가 버렸다. 힘들거나 지루한 시간은 정지된 듯 더디 가면서 즐거운 시간은 왜 그리도 빨리 지나가는지. 함께 했던 벗들의 얼굴이 스친다.


“왜 사세요?”


직무 관련 첫 수업에서 어느 강사가 대뜸 물었다. 왜 사느냐고. 이처럼 삶의 의미나 목적을 묻는 근원적인 질문은 늘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뭔가 그럴듯한 뜻이 있을 테지만 그것은 깊은 내면 어딘가에 숨겨져 있거나 전능한 신의 뜻 속에 있기에 알기 어렵다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즉답을 피한다. 평소 그 답을 호주머니에 늘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누군가 물으면 즉시 꺼내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헬멧을 쓰고 장비를 구해서 힘들게 깊이 파내려 갈 각오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쯤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달, 몇 년 깊이 파내려 간다 해도 수백 미터 암반 밑에서 조우한 아이 머리통 크기만 한 다이아몬드가 번쩍거리며 ‘왜 이제야 왔소’라며 반갑게 맞아줄 것 같지도 않다.


“태어났으니까 살지요.”


아무도 답을 하지 않자 맨 앞줄에 앉아 있는 바람에 강사로부터 지목을 받은 여직원의 답변이었다. 그녀는 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고 동그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마치 호주머니에 있던 걸 아무렇지 않게 건네주는 것처럼.


당찬 답변에 수업을 듣던 30여 명의 중년을 맞은 교육생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닌 듯했다. 강사도 예상치 못한 답변에 멈칫 흐름을 잃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어나갔다. 애초 철학 강의가 아닌 직무수업이었기에 인생의 심오한 내용까지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근원적 질문으로 수업을 시작한 그의 강의는 용두사미로 싱겁게 끝났다. 역시 삶의 의미는 함부로 물으면 안 된다. 어쨌든 1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장면이 떠오르는 건 그 여직원의 답변 때문이었다. 짧은 한 마디가 마치 ‘너도 모르는 걸 왜 묻니? 삶에 본래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의미를 찾아갈 뿐이지. 애써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의미를 강요하지 마’라고 말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우리는 왜 사는지 잘 묻지 않는다. 스스로에게는 물론이고 타인에게도 그렇다. 물으면 이상하거나 실없는 놈 취급을 받는다. 아니면 ‘왜? 너 요즘 무슨 문제 있어?’라는 질문만 되돌아올 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삶의 벽에 부딪히거나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이렇게 묻는 것이다. 내가 왜 살아야 하나,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마치 귀를 자르기 전에 고흐가 그린 그림 ‘고갱의 의자’처럼, 그리운 사람의 빈자리를 우두커니 한참을 바라보다가 흘러넘치는 뜨거운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삶의 의미를 묻고 또 묻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대개는 크게 달라지는 것 없이 제자리로 돌아갈 뿐이다. 퇴근을 할 때 저녁노을을 등지고 내 속에 든 상처와 외로움을 진정 알아줄 누군가를 그리며 골방 같은 술집에 찾아들어 헛헛한 속을 소주로 달래곤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감정의 회오리에 몸을 맡긴 채 태엽이 감긴 자동인형처럼 제 인생을 묵묵히 살아낸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누군가에게 어깨를 내주며 태엽이 다 풀릴 때까지.


‘웃을 뿐 답을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笑以不答心自閑)’     


이백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의 한 구절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때면 그렇게 빙긋이 웃을 뿐이다.


몇 달간 집수리를 했다. 지붕에 비가 새는 바람에 나무들이 썩어서 어쩔 수 없이 노후자금으로 모아둔 목돈을 헐어 수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마무리가 되고 나서 제대로 잘 되었는지 요모조모 살피다가 문득 집 옆 나뭇가지 사이로 버려진 빈 둥지를 발견했다. 울창할 때는 보이지 않던 새집이 낙엽이 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게 되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청소를 하면서 자세히 보니 둥지의 소재가 나뭇가지나 풀잎이 아니라 플라스틱 혹은 비닐 등이 섞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새들에게는 사람들의 쓰레기가 둥지 건축을 위한 신소재로 보였는지 모르겠다. 플라스틱으로 인한 오염이 광범위하게 생태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절감했다.


동물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에서 바우어새(bowerbird)를 본 적이 있다. 호주와 파푸아뉴기니에 분포하는 새인데 정원사새 또는 정자새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수컷이 짝짓기를 위한 신방(新房)을 꾸민다는 것이었다. 오로지 암컷과 첫날밤을 보내기 위한 ‘집 아닌 집’을 만드는 데, 그 솜씨가 기가 막혔다.


먼저 이끼를 모아서 나무 주변에 붙인다. 거기에 나뭇가지를 부리로 주워와 신중하게 끼우고 사이사이 엮어서 둥지처럼 만든다. 러브하우스가 완성되면 그 주변에 불필요한 나뭇가지나 잎사귀 등을 빗자루로 쓴 듯이 깨끗이 정리한다. 마련된 빈 공간에는 꽃이나 열매, 고둥껍질 등을 동일한 소재나 같은 색깔별로 구분해서 정성껏 장식한다. 마치 사람이 일부러 그렇게 꾸민 것같이 아름답게. 준비가 끝나면 수컷은 이웃 새들의 노랫소리를 흉내내기도 하고 심지어 굴삭기나 기계톱소리도 모사해 낸다. 또한 동공의 크기를 마음대로 키웠다 줄였다 하는 등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모양, 색, 소리, 춤 등 다양하고 기괴하고 신기한 행위를 총동원한다. 오로지 ‘원 나잇 스탠드’를 위해 필사적으로. 이윽고 꾐에 빠져 찾아온 암컷과의 짝짓기가 끝나면 수컷은 또 다른 짝을 찾기 위해 신방을 보수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이후 알을 낳고 키우는 것은 순전히 암컷 혼자의 몫이다. 수컷의 신방을 꾸미는 기술은 지금도 세대를 이어가면서 점점 진화하고 있다 한다.


바우어새가 왜 그렇게 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독특한 방법으로 암컷을 유혹하는 수컷과 그런 수컷에게 곧잘 유혹당하는 암컷의 자손들이 더 많이 생존하게 되었고 그런 방향으로 점점 진화되었을 뿐이라는 것밖에는. 사람들이 보기에 쓰잘머리 없는 기교를 부리는 수컷을 암컷들은 왜 선택하는지, 둥지를 지어주고 새끼를 공동으로 양육하는 그런 자상한 수컷은 왜 선택하지 않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을 뿐이다. 바우어새 암컷들을 모아놓고 너희들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돼.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왜 개고생을 해야 한단 말이냐고, 기러기처럼 한평생 가정에 충직한 다정한 수컷을 만나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침을 튀기며 설교를 해도 소용없다. 돌아서면 그들은 파란색 플라스틱 병뚜껑들을 주워 모아서 멋지게 장식해 놓은 수컷에 매혹되어 짝짓기를 하고 또 홀로 새끼를 키워나갈 것이다. 그것이 그들 나름의 신앙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거미줄로 먹고사는 거미처럼 인간은 항상 의미로 생을 엮어가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우주의 기원, 인류의 태동, 민족의 연원, 탄생의 의미, 삶의 목적 등 모든 것에 사람들은 제가 속한 문명의 영향 아래 제각각 의미를 부여한다. 도심 속 펜트하우스에 살거나 깊은 산속 오두막에 살거나 아니면 이곳저곳 떠돌며 노숙을 한대도, 인생에서 소위 남들이 얘기하는 성공이나 실패를 한다 해도 그건 사실 우리의 기준과 잣대로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다. 무의미한 삶은 결코 없다.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또 다른 의미부여일 뿐이다. 사회ㆍ문화ㆍ종교적으로 이미 의미는 충분히 부여되어 있고 우리는 그중의 하나에 저절로 물들거나 아니면 스스로 선택했다고 착각하며 산다. 의미를 부단히 찾는 것, 그것이 우리 인간의 숙명이지 싶다. 죽어야 벗을 수 있는 쇠코뚜레처럼.


수업시간 삶의 의미에 대한 어느 직원의 답변이 문득 떠오른 휴일 아침. 나는 한참 생각에 잠겨있다가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삶이란 뭐요?” 그러자 아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삶은 계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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