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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정원 Aug 18. 2024

‘티키타카’가 필요한 시간

작년 가을 어느 휴일 오후, 정원에서 풀을 뽑고 있는데 대문 근처에 있던 아내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원 가꾸기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아내가 대화를 나누던 낯선 여성에게 대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오는 사람을 힐끗 보니 여성 외에 키 큰 외국인 남자 한 명도 뒤따라 들어왔다. 190센티미터는 족히 돼 보였다.


인사를 나눈 후 한국인 아내와 외국인 남편으로 이뤄진 국제커플임을 알았다. 우리 집에 있는 파초가 신기해서 밖에서 구경하다가 마침 대문 근처에서 일하던 아내에게 질문을 했던 것이었다. 정원 이곳 저것을 둘러본 부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렸다.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차 한잔을 나눴다. 아내는 영어로 대화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나는 서툴렀다. 외국인 남편은 한국어가 불가능했기에 우리는 자연스레 영어로 이야기를 나눴다.


아내와 그 여성이 다른 곳에 있는 꽃을 구경하느라 자리를 잠시 비우자 나와 외국인 남자만 남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그가 뭔가에 대해 질문을 했다. 나는 역도선수가 무대에서 손바닥에 송진을 묻히고 바벨을 들어 올리기 전, 신중하게 숨을 고르듯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떠났던 아내와 그 여성이 다시 돌아왔고 서로 얘기를 주고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내가 하려던 말은 그들의 얘기로 인해 중단되었다. 평범한 말인데도 막상 영어로 표현하기가 만만치 않아서 암산을 하듯 머릿속에 문장을 어지럽게 썼다 지우며 애를 먹고 있던 터였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용을 쓰며 바벨을 들어 올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인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불렀다.


“여보, 방금 이분이 말씀하던 중이었는데 계속 들어봅시다.” 그러더니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다시 바벨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며 ‘여기서 to 부정사를 쓰는 게 맞나? 그렇다면 전치사는 뭘로 해야 할까...’ 내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있었고 세 명이 빤히 나의 입을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이 혓바닥에 머물기만 하는 답답함과 슬그머니 밀려오는 긴장감. 나는 하려던 얘기를 그만 잊고 말았다며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들이 떠나기 전에 또 한차례 그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 외국인은 누군가가 말을 시작하면 끝까지 들어주려는 룰을 진심으로 지키려는 듯 보였다. 내게는 굳이 안 지켜도 되는데 말이다. 어쨌든 그것이 개인적인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서양식 대화 예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근무지를 옮기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여러 차례 동료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를 가졌다. 으레 그러하듯 점심 혹은 저녁 식사에서는 자유로운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눈다. 특히 저녁 시간에는 공식 업무가 끝났다는 심적인 여유 때문인지 보다 편하게 얘기를 나누는 편이다. 주문을 하고 대화가 잠시 소강상태일 때였다. 서먹한 분위기를 깨고자 내가 뭔가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본론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누군가가 내 말을 가로채고 자신의 주제로 가져가 버렸다. 특히 말 빠르고 성질도 빠른 어느 동료와 대화를 나눌 때면 한 문장도 채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내가 물회가 먹고 싶어서...” 막 이야기가 전개되려는데 동료가 치고 들어와서

“나도 어제 물회 먹었는데. 물회는 그 집이 최고야...” 그러면 다른 동료가 또 가로채서

“생선에 미세 플라스틱이 어쩌고 저쩌고...”


정작 나는 물회를 먹으러 가다가 만난 사람 얘기를 하려 했는데 그 동료가 낚아챈 이야기는 이내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전개되고 마는 것이었다. 대개 친구들이나 지인들과의 대화에서도 그러한 기조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는 대화에도 적용된다. 누군가 말이라는 공을 쥐면 마치 탁구를 하듯 짧게 주고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가만히 쥐고 있는 것을 서로 허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상하 위계질서가 엄존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말을 길게 이어가는 기회는 잘 주어지지 않는다. 한편으로 말발 센 사람은 말의 주도권을 잽싸게 빼앗기도 하지만 뺏아 온 자신의 기회를 잘 놓으려 하지 않아서 독주형 대화가 전개되기도 한다.


국가 대항전 축구 경기를 볼 때면 항상 해설가들이 덧붙이는 말이 있다. “아.. 빨리 패스를 해야죠. 볼을 너무 오래 잡고 있어요. 저러다 상대 선수에게 공을 뺏겨서 공격의 흐름이 끊기겠어요.” 외국보다 개인기가 부족한 우리나라 선수들은 FC 바르셀로나처럼 공을 서로 빠르게 주고받는 ‘티키타카’ 전술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누차 강조한다. 경기를 뛰는 선수들을 향해 축구 전문가들이 던지는 조언 중에 ‘서로 말을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좁은 시야에만 갇히거나 긴장으로 몸이 굳어지는 것을 방지하라는 뜻도 있지만 그 외에도 어쩌면 우리네 일상의 대화처럼 그렇게 공을 ‘티키타카’ 하라는 함의가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이다. “평소 말을 그렇게 잘도 뺏고 뺏기며 조잘대듯이 그렇게 공을 주고받아! 티키타카는 정작 지금 필요한 거라고옷!”


그 국제커플은 지난봄에 한 차례 더 우리 정원을 방문했다. 작년 가을 첫 방문 때의 약속을 잊지 않은 것이었다. 햇빛을 사랑하는 백인 남편이 따스한 봄햇살을 좀 더 즐기고 싶다기에 나무 그늘 아래에 놓여 있던 의자와 테이블을 양지바른 잔디밭 쪽으로 옮겼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나의 말을 자신의 아내가 가로채자 그 남자가 말했다. “여보, 아직 이분 말씀이 끝나지 않았으니 좀 더 들어봅시다.” 말이 서툴고 느려서 답답할 때는 그냥 다른 주제로 넘어가도 될 터인데 굳이 끝까지 기회를 주고자 하는 그 정신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살짝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좀 거칠고 단순하게 비교하자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서양사람들은 자신의 사생활이 침해당하기 싫기에 상대의 그것을 존중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그래서 신사적이지만 냉정한 반면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는 집단적 이익과 활동이 우선되므로 개인에게 무례하지만 정이 깊다는 문화적 특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특성이 생활문화 전반에서 용해되어서 각 문화별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리라.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냐는 의미가 없다. 어느 것이 어떤 상황에 더 적합한가를 살펴, 보다 나은 방향으로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상당 부분 그렇게 하고 있듯이 말이다. 세상은 벌써 지구촌, 글로벌 사회가 된 지 오래다.


이번 가을에 또 그 부부가 방문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에게서 하나를 배웠다. 누군가의 말이 지루하다 할지라도 내가 그 주제에 관해 더 재미있고 더 신나게 얘기할 수 있다 할지라도 쉬 가로채지 말자는 것, 축구는 짧게 패스를 해야 하지만 대화는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여유를 갖자는 것, 상대를 향한 존중은 그의 말을 배려하는 태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이다.


저녁에 아내의 휴대폰이 울렸다. 옆에서 대화를 들어보니 국제커플 중 한국인 여성인 것 같았다. 날이 선선해지면 조만간 우리 정원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내 말을 기다려주던 그 외국인의 파란 눈동자가 생각났다. 전화를 끊은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 괜찮겠어?”


나는 영어책을 오랜만에 다시 꺼내 들었다. 외국어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치매 예방에 효과가 있다 하니 좋고 또 외국인 친구와 보다 즐겁게 대화를 할 수 있으니 더 좋을 것이다. 게다가 서로 배려하는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아내에게 대답했다.


“No, problem. That's my pleas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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