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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다 혼자다

한라산과 가야산, 설세계에서

안개 속을 혼자 거닐면 정말 이상하다.

살아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다.


어릴적 즐겨듣던 '밤의 디스크 쇼'에서 이종환이 낭송한 헤르만 헷세의 시 <안개 속에서> 마지막 구절이다.


사람은 모두가 다 혼자다. 그리고 때때로 그것을 산에서 체험한다.

멀리 선 본 한라산


은하수(한, 漢)를 당길(라, 拏) 수 있는 한라산은 오르면 오를수록 그 매력이 더해가는, 그래서 혼자 겨울이면 한번씩 오르는 나만의 겨울산이다.


2024년 1월 17일 오전 10시 성판악 코스를 오르기 시작했다. 제주시에서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가는데 2시간여를 소모해서 벌써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한라산은 특유의 매력으로 내 기운을 북돋아 주었기에 12시에 백록담 정상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백록담


멀리서 본 한라산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는데 산 정상에 걸려 있던 그 한조각 구름 속에 들어서니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어디로 날아가든 상관없을 눈보라가 심하게 들이쳤다.


지상은 봄날씨였지만 백록담은 볼이 얼얼한 추위로 모든 사람을 움추려들게 했다. 수많은 사람이 백록담 표지석 앞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줄을 길게 늘어섰는데 나는 어서 내려오고만 싶었다.


서둘러 관음사 방면으로 들어섰는데 눈보라와 얼어붙은 길 덕분에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쏟아지는 땀을 닦으며 헉헉거리며 겨우겨우 올라오는 사람에 비하면 나는 참 운이 좋은 편이었다.

관음사로 내려가는 길에서


얼마를 내려왔을까, 갑자기 안개가 걷혔다. 언제 그랬냐는듯이 파란 하늘 아래 모든게 선명하게 평온하게 드러났다. 마치 마녀의 옷장을 통해 나니아를 모험하고 돌아온 듯 다른 세상이었다.


한라산은 늘 새롭고 아름다운 다시 오고 싶은 산이다.




그렇게 1월 한라산을 만나고 2월이 되었다. 어딘가 가야할 것 같은데 날씨가 보통 매섭지가 않았다. 그래도 국립공원 도장깨기는 멈출 수 없었기에 찬 바람이 불던 2월 24일 아침 일찍 사제관을 나섰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새로운 감각이 깨어나고 예기치 못한 것을 만난다. 내게 가야산은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준 설세계였다.

가야산 만물상 코스


백운동 탐방센터에서 출발해 가장 험준한 만물상 코스로 올랐다. 점점 가빠지는 호흡에 따라 눈이 점점 쌓이더니 어느새 안개 속을 걷고 있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마주한 상고대! 상고대는 나무서리라고도 불리는데 영하의 온도에서 액체상태로 존재하는 미세한 물방울이 나무 등에 하얗게 얼어붙어 눈꽃을 피운 것을 말한다.

가야산 상고대


살아생전 처음 만나는 최고의 상고대는 흡사 이상한 나라에 온 신비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절정의 순간에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현실 너머 세계가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기괴하고 눈부셨다.


갑자기 울리는 빵~거리는 총성이 조용한 산을 깨웠다. 누가 사냥을 나섰나 싶었는데 알고보니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정신 차리라고 죽비로 내려치는 소리 같았다.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누구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신선계에서 나무나 돌은 서로를 보지 못하고 모두가 다 혼자다.


마침내 가장 높은 칠불봉(1,433미터)을 오르고 내친 김에 산 정상인 상왕봉까지 갔다가 하산하니 며칠동안 제대로 걷지 못할만큼 다리가 무거웠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그 어떤 값을 치루고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칠불봉
상왕봉


가야산 안개 속에서 모두가 다 혼자였지만 고독은 견딜만했다.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하늘에 닿을 듯 솟아올랐다. 꿈속을 걷는 듯한 설세계는, 한마디로 환상적이었다.

몽유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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