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8일, 맑은 가을 날
나는 집을 소유한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한국인의 DNA에 녹아있는 '나의 집'에 대한 열망을 모른다. 그저 주어지는 집에 감사하며 깨끗하게 사용하고 때가 되면 흠없이 남겨놓고 떠나는 일을 내 운명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어린 시절 단칸방에서 시작해 첫 한옥을 마련하고 몇번의 한옥을 거쳐 양옥으로 이사갔을 때 보았던 부모님의 희열이 떠오른다. 집은 그저 건물이 아니라 부모님의 자부심이자 자랑거리였다.
그러던 부모님께서 자녀들이 출가하고 연세가 드시자 아파트로 이사를 가셨다. 여러모로 편리하다고 하셨지만 옛집에서 느껴졌던 각별한 애정은 없었다. 발을 땅에 디디고 살지 않고 꽃밭에 채소가 자라지 않는 공간은 반쯤 죽은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동생집으로 가시자 자연스럽게 그 아파트는 처분되었다. 집이 사라지고 나니 갈 곳이 없어졌다. 어머니와의 지상에서의 연은 그렇게 집과 함께 끊어져 버렸다.
집은 우리가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때론 집에서 집을 그리워하는 나를 만난다.
"여우들고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예수님도 그러하셨다. 하지만 나는 지금 머리 뉘일 곳은 있지 않은가.
새성전 착공식(Groundbreaking)을 한다. Groundbreaking은 말 그대로 땅을 파는 것을 말하지만 동시에 획기적인 일을 뜻하기도 한다. 볼티모어 한국순교자성당 역사에 신기원을 이룬다고 해도 되겠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 126).'가 떠오른다. 그동안 우리 신자들의 고난을 어떻게 말로 다 하겠는가!
하느님의 집을 짓고자 한다. 그런데 하느님에게는 집이 필요없다. 그래서 하느님의 집은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을 위한 집이다. 우리가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곳이다. 두 팔을 펼치고 환영하고 안아주는 주님이 계신 집을 알면 언제나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아버지 집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때 하느님의 집이 우리 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