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고 사랑 안에 머무십시오.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입니다. 예수회 총장 베드로 아루페 신부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람이 되는 것(Men and women for others)'은 1534년에 이냐시오 성인이 세운 예수회(Society of Jesus)가 오백 년 동안 가르쳐 온 중요한 교육철학이다. 조지타운, 보스턴 칼리지, 지역마다 있는 로욜라 대학 등과 같은 미국의 많은 유명한 사립대학들이 예수회가 세운 대학인데 클리브랜드에 있는 존 캐럴(John Carroll) 대학도 그중에 하나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예수회 출신 첫 교황이다.
나는 2009년 성 안토니오 성당의 보좌신부 임기를 마칠 즈음 존 캐럴 대학의 비영리단체 경영학 석사 과정(Master of Nonprofit Administration)에 들어갔다. 학비는 클리브랜드 교구 신부로 장학금을 받았지만 기숙사비와 생활비는 내가 직접 해결해야 했으므로 교목 신부로 지원했다. 교목 신부는 캠퍼스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대학생들을 사목하기 위해 교목처에 소속되어 미사(주일 저녁 미사는 젊은이들을 위해 밤 9시에 있었다.)와 성사를 집전하고, 학생들을 상담하며 같은 기숙사에 살았다.
모든 예수회 신부들은 캠퍼스 밖에 살았는데 나 홀로 삼천 명 학생들과 함께 살았다. 한국에서 온 신부를 본 적이 없는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과 어울리는 방법은 함께 뛰는 것이 최고였다. 원반던지기 게임(Ultimate Frisbee), 깃발 빼앗기(Capture the flag) 등은 내겐 생소한 게임이었지만 모두 잘 뛰는 사람이 유리했다. 그들 표현대로라면, 나는 우버 패스트(Uber fast), 곧 엄청나게 빨랐다.
그렇게 함께 뛰며 대학생들과 친해졌고 2010년 '살아있는 사람 6'으로 교수, 직원, 학생으로 구성된 19명이 클리브랜드 마라톤을 함께 달려 $3,200의 성금을 모아 절반을 지역의 사회복지센터에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해 여름 직접 절반의 성금과 따로 모은 돈을 들고 마다가스카를 다시 방문했다.
"This is Africa(TIA)."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서 주인공 대니 아처(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가 하는 말이다. "여기는 아프리카라 모든 것이 가능해."라는 의미로.
나에게 아프리카란 마다가스카를 뜻하고 마다가스카란 사라의 다른 이름이었다. 오년 만에 다시 마다가스카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동안 변한 것은 신학생이 사제가 되었다는 것 뿐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다만 겉으로의 변화일 뿐이었다. 마다가스카의 체험은 나에게 사제가 된다면 어떤 사제로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었다. 가난한 이를 잊지 않고 사는 것,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매일 달리는 삶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이 마다가스카로 향하는 길이었다.
마다가스카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조지 수사님과 다른 형제를 만났다. 그들 역시 사랑의 선교회로 엠마누엘 수사님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새로운 만남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홈리스들에게 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나도 오년 전과 똑같이 밥을 퍼 주었다. 함께 노래하고 춤도 추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사라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몰라보면 어떻게 할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만날 수 없음이 다행이라 여겨졌다. 어딘가에 있을 집에서 매일 따듯한 밥을 먹고 또래 아이들과 놀며 떠들고 있을 사라를 위해 기도했다.
나는 가는 곳마다 그곳 사람들과 미사를 봉헌했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같은 식탁에서 말씀과 빵을 나눌 수 있음이 은혜로웠다. 나는 사제로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들의 '아멘'은 바로 나의 기도이기도 했다. 결코 물질로 채울 수 없는 결핍을 기도 안에서 나누며,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라는 신영복 선생(1941-2016)의 말이 떠올랐다.
그저 함께 있음이 전부였다. 하지만 만남은 이별의 또 다른 이름이듯이 떠나야 할 때가 왔다. ‘다시 올 거예요?’라고 묻는 그들의 질문에 '그렇게 하겠다.'하고 대답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하느님이 허락하신다면’이라는 말을 차마 붙일 수 없었다.
황량한 벌판에 학교를 세우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수녀님들을 보며 ‘언젠가 선교사가 된다면 바로 이곳이 내가 올 곳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TIA! 아프리카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까!
존 캐럴 대학에는 추수감사절에 가난한 지역 100가정에 보낼 사랑의 바구니를 채우기 위해 돈을 내고 5킬로미터를 뛰는 자선 달리기 대회가 매년 있었다. 2010년 나는 학교의 동의를 얻어 그 대회 이름을 '신부님 추월하기(Pass the Priest)'로 바꾸었다. 참가자 중 누구라도 나보다 먼저 결승선에 도착하면 교목처에서 준비한 특별한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많은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30대 후반의 신부를 따라잡으려 애썼지만 다섯 손가락 내의 학생들만이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달리는 신부(Running Father)'라는 별칭이 생겼다.
대학 캠퍼스에 사는 유일한 신부로서 새로운 행사도 기획했다. 사순절 기간인 40일 동안 매일 1시간씩 원하는 누구에게나 한국차를 대접하는 '하상바오로 신부와 차 한 잔(Tea with Fr. H.Paul)'이 그것이다. 학생, 직원, 교수 등 누구라도 온라인으로 신청할 수 있었고 기숙사 나의 방에서 한국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은 자기중심적으로 생활하는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매일 1시간을 온전히 내어주는 것은 사순절을 잘 보내기 위한 나만의 극기와 절제의 한 방법이었다. 신부님과 차 한 잔은 유명한 사순절 이벤트가 되어 대학에서의 나의 사순절은 늘 바빴다.
2011년 4월 15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달리기를 통한 하느님의 현현(Epiphany)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을 위한 피정 역시 교목 신부의 몫이었다. 피정에 가면 가슴 아픈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미국의 중상류층 젊은이들이지만 그들 역시 상처와 절망으로 얼룩진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에게 위로와 치유, 희망을 발견하는 시간이 피정이었다. 그래서 피정을 한번 다녀오면 심신이 녹초가 되었다.
그렇게 피정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가 울면서 전화를 받으셨다. 암이 전이되어 다시 열두 번의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주셨다. 차마 할 말이 없어 듣고만 있었는데 날카로운 슬픔이 스펀지처럼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다음날 오전, 화창한 날씨에 전날의 피로와 슬픔을 씻기라도 하듯 열심히 뛰었다. 8마일(약 12킬로미터)을 달리고 캠퍼스에 돌아오니 정오 무렵이었다.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모두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잔디밭 한가운데에서 스트레칭을 하다가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들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사람으로 다르게 보였다. 그들 모두 각자의 어깨에 지고 가는 고통과 아픔이 느껴졌다. 전혀 낯선 이들이 나와 하나가 된 것처럼, 마치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이 루이빌에서 체험한 것처럼, 낯선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 모두가 '걸어가는 빛나는 태양' 같았다.
고통은 우리 모두 각자의 몫이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겠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몰려왔다. '나도 살아야 한다.' '나도 이 삶을 살아낼 수 있다.'라는 생각이 솟구쳐 올랐다. 그저 은혜롭게 한낮 태양의 은총 아래 서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 7(Living Person 7)'은 미국에서의 나의 마지막 마라톤이었다. 또한 마라톤을 시작할 때부터 꿈꿔왔던 서브쓰리에 대한 결판의 날이었다.
하지만 먼저 나의 목표보다는 사라를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총장 신부님을 찾아가 '살아있는 사람 125명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2011년은 존 캐럴 대학이 설립 125주년을 기념하는 해로서 많은 행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냐시오 성인(St. Ignatius of Loyola, 1491-1556)의 가르침인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땀과 시간을 쏟는 '125년을 기념하는 125명의 달리기 선수들(125 years, 125 runners for others)' 이야말로 가장 존 캐럴다운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클리브랜드의 복지센터와 마다가스카의 홈리스 쉼터를 위해 $12,500을 모금하면 좋겠다고 했다.
총장 신부님의 전폭적인 지지와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살아있는 사람 7은 캠퍼스에 마라톤 붐(boom)을 일으켰다. 달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황금색 러닝셔츠만이 아니라 대회 때 물을 나눠주는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셔츠도 제작했다. 캠퍼스에서는 자신이 뛰는 거리에 맞춰 그룹별로 훈련을 했고, 나는 인터넷으로 달리기 방법을 소개하고 격려했다.
‘살아있는 사람(Living Man)’의 이름도 바꾸었다. 대학생들이 살아있는 ‘사람(Man)’이 남성 편향적이라 하여 좀 더 포용적인 ‘사람(Person)’으로 바꾸자고 건의하였기에 ‘살아있는 사람(Living Person)’이 되었다.
대회 전날 토요일에는 대학교 성당에서 살아있는 사람과 후원자들이 모여 후원금 봉헌과 감사미사를 바쳤다. 미사 후에는 스파게티 파티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있는 사람 7은 대학생, 교수, 직원, 한인본당 신자들, 신부님들까지 157명이 등록했고, 성금도 목표한 금액을 훨씬 뛰어넘는 $23,673.20을 모금했다.
살아있는 사람을 준비하고 이끌었던 나의 이야기는 사진과 함께 지역신문(The Plain Dealer)에 크게 났다.
다른 사람을 위해 달리는(Running for others) 살아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사라를 위해 달리는(Running for Sara the beautiful) 나의 이야기가 칠년동안 자라나 맺은 열매였다.
7년전 두명의 신학생이 7년동안 202명의 다양한 살아있는 사람으로, $120의 첫 정성이 7년동안 $37,910.20로 늘어났다. 무엇보다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이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간디의 말을 실천하고 있음이 뿌듯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미국에서의 나의 7년 마라톤 역사의 이정표로 서브쓰리를 달성하는 것이다.
2011년 5월 15일 새벽, 클리브랜드 시내 주교좌성당 앞에 황금색 셔츠를 입은 150여 명의 살아있는 사람이 모였다. 그들 앞에 선 나는 손을 펼쳐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축복의 기도를 바쳤다.
2003년 아무것도 모른 채 미국으로 왔던 두려움 가득했던 신학생이 이제는 달리는 신부가 되어 큰소리로 축복의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초원이였던 한 신학생의 조그만 상상이 자라나 수확을 앞둔 황금벌판의 풍성한 곡식을 바라보는 넉넉한 마음이었다.
7시 정각 출발 총성이 울렸다. 날씨는 좋았고 컨디션도 괜찮았다. 잘 달렸다. 하프를 지날 때 기록이 1시간 29분대였고, 닉이 합류해서 나를 끌어주었다. 중간에 비가 내렸지만 서두르지 않고 계획한 페이스대로 뛰었다.
호흡 하나, 발 한걸음이 모든 것이었다. 이렇게 찐하게 한순간 한순간을 살아있음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마치 내 안에 깊숙이 감춰져 있던 하느님의 숨과 성령의 불이 터져나오는 것 같았다.
마지막 급수대를 지날 때 백여 명의 존 캐럴 대학생들이 연도에 나와 “H.Paul! H.Paul!"을 소리치며 서브쓰리를 응원했다. 호흡은 거칠었고 팔은 무거웠지만 계속 뛰었다.
결승선이 보이는 코너를 돌아서면서 닉의 응원을 뒤로하고 혼자 내달렸다. 다리는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심장은 남은 힘을 다해 펌프질을 하고 있었다. 멀리 기록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앞 숫자가 3이었다. 절망했다. 아, 그렇게 뛰고도 3시간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3:01:25.
마라톤을 하는 사람은 안다. 3시간 1분 25초의 기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쉬운 기록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비단 86초의 물리적인 시간의 거리만이 아니라 서브쓰리라는 육체적 한계를 얼마나 절실하게 뛰어넘고 싶은가 하는 마음과 정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내가 미국에서의 마지막 마라톤에서 서브쓰리를 했더라면 나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이봉주가 된 것처럼 귀국했을 것이다. 하지만 86초의 모자람이 나를 고개 숙이게 만들었고, 그 덕분에 나는 아직도 목마름을 느끼며 꿈을 꾸고 있다. 어쩌면 서브쓰리는 나에게 허락되지 않을 미지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도 그 목표를 바라보며 뛰면서 꿈꾸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믿는다. 오히려 그 꿈을 바라보며 계속 달릴 수 있음을 감사히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