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세네카
클리브랜드 신학대학원 원장신부님 톰 티프트(Fr. Tom Tifft, 1942-2012)의 키는 150센티미터가 조금 넘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작은 키에 큰 목소리, 왜소하기보다 육중한 풍채의 원장신부님은 내가 미국에 갔을 때부터 두 손을 들고 환영해 주셨다. 늘 인자하셨고 다른 교구 신학생인 나를 똑같이 아끼고 사랑해 주셨다.
하루는 원장신부님께서 사제 서품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나와 동기 부제 세명을 따로 불렀다. 그때 원장신부님 톰은 내가 평생 잊지 못할 말씀을 해 주셨다.
"Remember Monday(월요일을 기억해라). 네가 사제 서품을 받고 주일에 첫 미사를 봉헌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너에게 와서 축하해 주고 선물도 주겠지. 그리고 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안수해 줄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날 월요일이 되면 넌 혼자가 될 것이고 계속해서 그런 월요일이 네 앞에 펼쳐질 것이다. 월요일을 잘 사는 것, 그것이 사제생활의 핵심이란다."
월요일은 계속해서 내게 온다. 주일을 예비자 교리, 교중미사, 단체와의 점심, 공소 미사, 모임 등으로 정신없이 보내고 맞이하는 월요일은 늘 피곤하다. 처음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월요일 새벽 미사를 봉헌하고 아침을 간단히 먹은 뒤에는 그냥 쉰다. 몸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점심을 먹고 필요한 일을 하는데 여기서 뺄 수 없는 것이 달리기다. 일과 사람에 지친 몸에 약간의 자극을 주면 생기가 돌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 삶의 목표는 원래 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이었다.
남들처럼 성공해서 주중에 열심히 가치있는 일을 하고 일요일이 되면 사랑하는 가족과 여유를 즐기며 쉬는 것이 내 삶의 오랜 바램이었다. 그래서 가장 나에게 어울리면서 성공 가능성이 높은 경제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인간은 삶에 던져진 존재, 아무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1997년 나라가 부도나고 IMF 구제금융으로 하루 아침에 세상이 변했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던 나는 선배들처럼 4학년이 되면 조건이 가장 좋은 대기업 가운데 한군데에 취업할 계획이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이루는 것은 신이 한다더니 말 그대로 어떤 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저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IMF 이후 이십년이 훨씬 더 지났지만 지금도 그때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기업이 도산하고 가정이 파탄난 것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닥친 경제 위기로 인해 나와 같은 젊은이들이 겪었을 시련과 그 이후의 불안정한 삶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IMF의 불행은 내 삶을 놀랍게, 한편으론 은혜롭게 바꿨다.
국가적 재난 때문에 국내 신규채용이 없어지자 나는 중국에 공장이 있는 한국기업에 취직해서 곧 중국으로 갔다. 중국 십대 소녀들, 한자녀 정책으로 국가에 등록되지 못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그래서 너무도 싼 임금만 받으며 일해야 하는 이들이 한국기업의 이윤이었다. 낮에는 한달에 겨우 백달러를 버는 그들을 착취하고 밤에는 술값으로 백달러를 흥청망청 쓰는 무자비한 자본주의를 맛보았다. 성당도 찾을 수 없었고 이대로 가다간 괴물이 될 것 같아 두려워 떨다가 완전히 실패하고 무너졌다.
그때 시궁창에서 고개를 들었더니 세상을 위해 살지 않는, 일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이 더 중요한 삶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멋진 일요일을 위해 능력을 키우고 자신을 드러내 성공하는 것은 신영복 선생이 말한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도로의 고속을 원하는 삶이었다. 앞만 보고 질주하는 직선의 삶은 풍요롭지만 비인간적이었다. 하지만 인간다움의 길은 더디지만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곡선으로 소박하고 아름답다.
월요일을 소중히 여기는 삶은 일요일에 세상과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나만의 사랑하는 가족은 없지만 교회와 신앙공동체가 아끼고 염려해 주는 사람을 위한 시간이다. 그래서 월요일은 하느님의 사람을 위한 시간이다.
달리기에 가장 좋은 날도 월요일이다.
신영복 선생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말한 감옥에서 만난 노인 목수 한 분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노인은 집을 그릴 때 보통 사람들과는 반대로 그렸다고 한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과는 달리 그는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집을 그렸다. 집을 짓는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행동으로 실천하기보다 말과 머리로만 집을 지어 온 나의 한계를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제생활도 마찬가지다. 주춧돌을 먼저 놓아야 하는데 자주 사람들에게 드러낼 지붕을 그리고 있는 나를 본다. 멋진 결과만 먼저 기대하고 기초는 신경 쓰지 않는 격이다. 신자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기를 원하면서 헌신과는 거리가 먼 자기만족이나 인기를 바라고 하는 일이 대부분 그렇다. 사제가 예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서 신자들의 신앙심이 깊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춧돌부터 먼저 놓는 사제생활, 이를 위해서는 먼저 기도해야 한다.
여기서 기도란 단순히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적인 토대 위에 놓인 것이다. 기도를 하면 영혼이 가벼워지는 것처럼 달리기를 하면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런 다음 기도라는 주춧돌 위에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싶다: '기쁘고 성실하게, 겸손하고 지혜롭게.' 이는 내가 기도하는 모든 것을 세우는 방식이다. 그렇게 실천하는 삶을 살면 지붕은 착한 목자를 따르는 신자들이 직접 올릴 것이고 그 그늘에서 나는 그들과 함께 쉬게 될 것이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1-3).
월요일의 또 다른 이름은 퀘렌시아다.
류시화 작가가 쓴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 보면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고 한다.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는 그곳에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으고 다시 싸우러 나간다. 그곳을 스페인어로 퀘렌시아(Querencia)라고 부르는데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이다.
월요일 달리기는 나에게 퀘렌시아다.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얻고 본연의 자기 자신에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의 퀘렌시아에 오면 안도의 숨을 쉴 수 있다. 월요일 달리기는 호흡을 고르며 부정적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나의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힘을 얻는 퀘렌시아다. 내가 내가 될 수 있는 곳에서 다시 생기를 얻는 순간, 나는 퀘렌시아에 있다.
이렇게 퀘렌시아에서 다시 힘을 얻는 월요일 달리기는 나에게 '렛잇비(Let it be)'를 되새기게 한다. 주일 하루 열심히 내 몫을 했으면 월요일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시간이다.
가브리엘 대천사의 방문을 받고 성령의 힘으로 예수를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접한 마리아처럼, 때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나에게 생길 때도 있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칠 때도 있지만 달리기를 하는 월요일은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38 참조)하고 기도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그것은 그동안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판단하고 행동했던 것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을 볼 수 있도록 먼저 나의 몸과 마음을 내려놓게 만든다. 그래서 진정한 기도란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느님께서 그대로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배우는 시간이 월요일이다.
마리아의 렛잇비처럼, 모든 것을 마음에 곰곰이 되새기는 가운데 맞이하는 월요일은 나를 내려놓는 시간, 나의 시선을 바꾸는 시간, 돌아가신 원장신부님 톰의 거룩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