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얼굴: 춘천마라톤대회

인생은 반환점이 없는 마라톤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을 후회 없이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 손기정


2016년 77명의 '살아있는 사람 12'는 이웃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자비의 얼굴(The faces of Mercy)'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제70회 춘천마라톤에 참가하게 되었다.


10월 22일 토요일 밤 11시 30분에 교구청 꾸르실료 경당에 모여 자정에 후원금 봉헌과 감사미사를 봉헌하고 새벽 2시에 춘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침 6시에 춘천에 도착해서 아침식사를 하고 7:30분에 출발 집결지인 공지천교에 모였다. 9시 정각에 9명의 풀코스 주자들이 출발하고, 10시에 68명의 10킬로미터 주자들도 뛰기 시작했다.


비가 와서 쌀쌀한 날씨였지만 가을의 전설인 호반의 바람을 가르는 길을 달리며 터널을 지날 때는 모든 러너가 함성을 질러 대 신이 났다. 오른쪽에는 호수, 왼쪽에는 산, 그리고 단풍이 어우러진 춘천마라톤, 춘천댐까지 도달하는 오르막이 많이 힘들었지만 나는 3:18:45의 기록으로 결승선에 도착했다. 돌아보면 밤잠을 자지 않고 뛰는 무리한 일정이었음에도 모두가 기쁜 얼굴로 달렸고, 월요일 아침 조선일보에는 "성당 대신 춘천 달려간 수녀님"이라는 기사와 함께 아셀라 수녀님의 모습이 실려 흐뭇했다.



image.png?type=w966 살아있는 사람 12, 2016년




춘천마라톤은 1936년 손기정 선생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우승한 1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일보 주최로 1946년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당시 대회의 이름은 '손기정 세계 제패기념 제1회 조선일보 마라톤 대회'였다.


1936년 8월 9일, 손기정 선생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세계기록을 5분이나 단축하며 당시 인간의 한계로 인식되던 2시간 30분의 벽을 깨고 2시간 29분 19초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하였다.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기에 일본의 온갖 방해공작을 이겨내고 이룩해낸 우리 민족 최초의 세계적인 승리였지만 일제 식민지 시절이었기에 일장기를 달고 달려야 했다.


하지만 손기정 선생은 베를린 올림픽 전 종목 입상자들이 기념 서명을 할 때 자신이 한국 사람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사인을 했으며, 수많은 인터뷰에서도 자신은 한국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고도 시상식에서 손기정과 같이 고개를 떨구었던 남승룡은 이렇게 말했다. "손기정이 1등 한 것보다 가슴에 단 일장기를 가릴 수 있는 월계수 묘목을 갖고 있어서 부러웠다."


1590380237859.jpg?type=w966 손기정과 남승룡 @google.com


1992년 8월 9일, 아시아인 최초로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생의 뒤를 따라 56년 뒤 정확히 같은 날에 황영조 선수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땄다. 막판에 일본 선수와 경쟁을 하다가 그를 따돌리고 우승한 그에게 소감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지난 36년 손기정 선생님이 일장기를 달고 우승한 뒤 56년 만에 다시 태극기를 달고 우승하게 돼 감격스럽습니다."


1896년 시작된 근대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지금까지 금메달을 딴 유일한 두 동양인이 바로 우리나라 사람이다.


그리고 1897년에 근대 올림픽을 기념하고자 시작된 보스턴 마라톤에서 최초로 우승한 동양인 역시 1947년 우리나라의 서윤복이며, 1950년 보스턴 마라톤에서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3위를 기록해 세계가 놀랐다. 2001년에는 51년 만에 한국인 이봉주가 보스턴 마라톤을 다시 제패하였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마라톤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어왔다.


또 한명의 세기의 마라토너로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바로 사도 바오로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아니었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뒤에 그는 복음을 전하는 마라토너 선교사로서 세상 끝까지 가서 '예수라는 이름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사도 4,12 참조)는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가 쓴 서간에는 달리기를 신앙에 비유한 글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 이런 글이 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4-27).


바오로 사도는 그가 살았을 당시에 행해지고 있었던 고대 올림픽의 달리기 경주를 염두에 두고 편지를 썼을 것이다. 경기에서 받을 상, 곧 화관은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졌던 월계관이며 이것은 곧 영광과 명예를 상징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 있어서 승리하는 사람은 월계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썩지 않을 화관을 얻기 위함이므로 올림픽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보다 더 절제하며 더 단련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절제하고 더 노력해야 하는 그리스도인, 그의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그의 눈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 땅에서 이방인처럼 산다. 시민으로서 모든 일에 참여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사라질 곳에서 영원을 꿈꾸며 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이 땅에서 순례자로 살다가 때가 되면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준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사도 바오로처럼, '훌륭히 싸우고 달릴 길을 다 달리며, 무엇보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 '의로움의 화관'(2티모 4,7-8 참조)을 받기를 꿈꾼다.


36c6137059a1eb0fb30c3505c64840c2.jpg 바오로 대성전 앞 바오로 사도 @google.com


바오로 사도의 이런 가르침은 내가 마라톤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 주었다. 곧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도록 먼저 나의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켜야 함을 말이다.


지치지 않고 세상 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바오로 사도, 그의 체력과 열정은 그가 직접 달리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리도록'(히브 12,2 참조) 격려하면서, 스스로도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립 3,13-14).


선교를 하는 가운데에서도 꾸준히 달렸던 바오로 사도였기에 그는 자신의 사명이 바로 '달길 길을 다 달려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치는 것'(사도 20,24 참조)임을 늘 생각하고 있었으며 달리는 몸으로 그것을 매일 새겼을 것이다. 그래서 지쳐 힘이 빠진 이에게는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도록'(히브 12,12-13 참조) 격려할 줄 알았다.


IMG_0465.JPG 바오로 사도의 제자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님들, 2015년 춘천마라톤


세기의 마라토너 손기정 선생과 바오로 사도, 그들은 달리기를 통해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으며, 이를 통해 고통받는 민족의 애국심을 일깨웠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온 세상에 전파하였으며, 마침내 자신들이 믿는 바를 끝까지 쫓아 달려가 이루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