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나에게 능력을 주셨다. 나머지는 내 몫이다. 믿어라. 믿어라. 믿어라. 빌리 밀스
꿈을 꾸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꿈을 꾸기만 해도 안되지만 꿈에 대한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안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서브쓰리는 2005년 마라톤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꿈이다. 꾸준히 꿈을 이루기 위해 나아갔지만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지금껏 내가 지불한 대가가 모자란 탓이다. 연습 때 더 많이 뛰지 않았고 대회 때 더 적극적으로 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서브쓰리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모자랐다. 얼마만큼 모자랐는가는 중요치 않다. 모자랐으니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서브쓰리는 마라토너라면 누구라도 인정하고 동경할 수 있는 성취다. 자격이 아니라 오직 행위로 입증하며 결코 누가 뺏어가거나 위조할 수 없다. 체력이 뛰어나고 속도가 빠르고 무엇보다 훈련 때에 엄청나게 많이 달릴 수 있는 사람만이 이룰 수 있다. 달리는 자의 동물적 본성과 함께 용기, 정신력, 그리고 믿음이 있어야 도달할 수 있다.
'아직도 서브쓰리가 가능하나?'하고 묻는다. 당연히 가능하다. 45세에 마라톤에 입문한 조지 쉬한 박사는 61세에 자신의 최고 기록인 3시간 1분을 기록했고, 캐나다의 에드 위트록(Ed Whitlock, 1931-2017)은 72세에 2시간 59분을 뛰었고 그 다음해에는 2시간 54분으로 더 빨리 뛰었다. 나는 그들에 비하면 가능성이 많다. 물론 그들만큼 더 열정적인지, 더 노력하는지에 대해서는 부족함을 느낀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서브쓰리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 곧 유전자에 담긴 재능이 아니라 마음에 담긴 갈망에 달려있다.
서브쓰리는 출발부터 결승선까지 42.195킬로미터를 달려서 세 시간 내에 마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1킬로미터를 4분 16초 내에 뛰는 페이스를 유지한 채 결승선까지 멈추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실제로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페이스로 뛰기는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달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고 몸도 아직 준비가 덜 되어 있다. 그래서 보통 서브쓰리를 위해서는 10킬로미터를 40분 안에 뛰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매 킬로미터마다 몸의 상태가 다른 데다가 날씨, 영양상태 등의 변수가 많고 32킬로미터 지점에 이르면 몸에 축적한 에너지원인 글리코겐이 다 소모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고려한 철저한 준비만이 서브쓰리를 가능하게 한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믿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번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도전하다가 포기한 사람들이 다 안된다고 말해도 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에게 그저 한낱 꿈 혹은 이야깃거리일 뿐인 것을 나는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의 마라톤 역사는 서브쓰리 도전의 역사이며 꿈에 대한 믿음의 실험대다.
2020년 현재 공식 마라톤 세계최고기록은 2018년 베를린 마라톤에서 케냐의 엘리우드 킵초게가 세운 2시간 1분 39초다. 100미터를 17.2초에 420번 반복하면 이 기록에 도달할 수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마라톤 풀코스 1시간대 진입도 더 이상 꿈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2019년 10월 12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엘리우드 킵초게는 날씨와 코스, 영양상태, 운동화 등을 최적의 조건으로 맞춘 상태에서 수많은 페이스 메이커들과 차량의 도움을 받아 가며 1시간 59분 40초로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했다. 비록 공식 기록으로는 인정되지 않았지만 인류가 상상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마라톤 풀코스 2시간의 벽을 넘은 것이다. 킵초게는 역사적 도전이 끝난 후에 말했다. "인류가 달에 착륙하는 순간과 같았으며,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서 기쁘다."
1954년 영국의 베니스터가 1마일(1,600미터)을 4분 내에 뛰는데 성공하기 전까지 전 세계 수많은 과학자들은 인간의 속도로는 그 '한계'를 뛰어넘기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일단 한 인간이 그 벽을 넘고 나자, 다음 1년 반 동안에 45명 이상의 선수들이 그의 경기력에 도달했다. 갑자기 그들이 획기적인 달리기 방법을 습득했다기보다는 누구나 가지고 있었던 정신적인 한계가 제거되고나자 그들의 자유로워진 정신에 몸이 응답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제 마라톤 풀코스 경기에서 2시간의 한계도 킵초게의 비공식적인 성공을 통해 다른 누군가에 의해 깨질 날이 멀지 않았다. 지금 어디선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벽을 넘어서기 위해 꿈을 꾸며 최선을 다해 연습하는 어떤 이가 혜성처럼 나타나 그 벽을 허물 것이다. 그러면 수많은 다른 러너들이 앞다퉈 그 길을 따라갈 것이며, 새로운 도전을 발견하고 그것을 넘기 위해 다시 매진할 것이다.
인간의 몸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나며, 몸과 정신이 일치될 때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서브쓰리로 가는 길에 이루고 싶은 또 하나의 꿈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여섯 개의 '세계 메이저 마라톤 대회(World Marathon Majors)', 곧 보스턴, 뉴욕, 시카고, 도쿄, 런던, 베를린 대회를 모두 뛰는 것이다. 세계 메이저 마라톤 대회를 다 뛰면 특별히 제작된 기념메달, 식스 스타 피니셔(Six Star Finisher)를 받을 수 있다. 공식 등록을 하고 다섯 대회를 뛰고 마지막 여섯 번째 메이저 대회를 뛰면 그곳이 어디든 결승선에서 여섯 개의 메이저 마라톤 대회가 모두 새겨진 기념메달을 받게 된다. 보통 사람은 들어본 적도 없는 메달,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에 걸쳐 꿈꾸며 이루어내야 할 버킷 리스트다. 2020년 8월 20일 현재 등록된 세계 메이저 마라톤 대회 기념메달 수상자는 6,619명이다.
나는 2009년 4월 제113회 보스턴마라톤을 3:07:35, 같은 해 11월 제40회 뉴욕 마라톤을 3:07:52, 그리고 2010년 10월 제33회 시카고 마라톤을 3:05:26의 기록으로 뛰었다. 그리고 귀국해서 2014년 살아있는 사람 10주년을 기념하여 나만을 위한 특별한 계획을 준비하고 실행했다. 세계 메이저 마라톤 대회 가운데 하나인 도쿄 마라톤에 참가한 것이다.
2007년에 시작된 도쿄 마라톤 대회는 2013년부터 아시아 유일의 세계 메이저 마라톤 대회가 되었다. 도쿄마라톤은 도쿄 시내 주요 관광 명소를 달리며 구경하는 것뿐만 아니라 슈퍼히어로, 만화 캐릭터, 닌자 등 특이한 의상을 입고 달리는 사람들 역시 볼거리 가운데 하나다. 달리기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에 뒤지지 않는 열정적인 일본 마라토너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2월 23일 쌀쌀한 주일 아침에 출발 대기선에 서 있는데 갑자기 화장실을 가야 했다. 3만 5천여 명의 러너들이 모두 그룹별로 서 있었으므로 도무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게 플라스틱 게토레이 병을 건네며, "지금은 이게 최고죠!"하고 말했다. 곧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고 긴급한 문제를 해결했다. 다만 나중에 누가 게토레이 음료와 내 것(?)을 혼동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도쿄 마라톤 대회는 한국에서 그동안 풀코스 기록에 있어서 부진을 면치 못했던 내게 희망을 발견하게 한 마라톤이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3:12:01의 기록으로 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세계 메이저 마라톤 대회 완주의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2019년 4월 말 런던마라톤 대회가 끝난 직후에 나는 2020년 제40회 런던마라톤 대회 신청을 했다. 하지만 추첨에서 탈락했다. 10대 1이 넘는 경쟁이었다. 그런데 2020년 들어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덮쳐 4월 런던마라톤 대회는 10월 초로 연기되었다.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다.
베를린 대회는 나의 세계 메이저 마라톤 대회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동안 베를린 마라톤 대회는 마라톤 세계기록의 산실이었다. 2003년 케냐의 폴 테가트가 2시간 4분 55초로 베를린 대회에서 세계기록을 세운 뒤 지금까지 세계기록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데니스 키메토(케냐)가 2시간 2분 57초로 세계기록을 경신한지 4년 만인 2018년에 케냐의 엘리우드 킵초게가 2시간 1분 39초로, 무려 1분 18초나 앞당겨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베를린이 세계 마라톤의 성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높은 상금, 평평한 코스, 최적의 날씨와 무엇보다 마라톤 코스를 가득 채운 백만 명이 넘는 열광적인 관중들의 응원 때문이다. 그 세계 마라톤 역사의 중심에서 나 역시 브라덴부르크 문을 서브쓰리로 통과해 나의 두가지 꿈을 동시에 이루고 싶다.
꿈은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좋은 꿈이란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함께 기뻐하고 희망을 갖게 한다. 그래서 지난 십오년 동안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가고 싶다. 누군가 차려놓은 상업적 마라톤 대회가 아니라 직접 마라톤 대회를 여는 것이다. 달리는 살아있는 몸으로 사라와 같은 어린이들을 돕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사람들을 군위로 초대해 ‘살아있는 사람 16 마라톤 대회'를 열고 싶다. (날짜는 10월 24일 토요일로 정해졌다.)
기존 마라톤 대회에서 빠지지 않던 비싼 참가비, 상업적 광고, 컴퓨터 장비, 일괄적인 기념품 등을 바꾸어 꼭 필요한 돈만 받고 군위 시골길을 달리며 군위성당 어린이와 어르신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얻으면 어떨까. 물론 손으로 시간도 측정하고 완주 메달도 준비하고 순위도 매길 것이다. 전체 레이스 우승자와 나이대별 우승자들에게는 지역 쌀과 돼지고기를 상품으로, 참가자 전원에게는 지역 농특산물을 기념품으로 준다.
특별히 '1000번째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잊지 못할 선물을 준비하고 싶다. (지금까지 943명의 살아있는 사람이 뛰었다.) 가족이 모두 참가하는 5킬로미터 걷기, 아름다운 군위 위천을 따라 뛰는 10킬로미터와 하프 마라톤은 조용한 군위의 토요일 오전에 색다른 풍경을 연출할 것이다.
그리고 마라톤 후에는 군위 성당에 모여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몸과 마음으로 준비한 후원금을 봉헌하는 감사미사를 바칠 것이다. 젊은이들과 수녀님들로 구성된 성가대가 신나게 반주하는 미사에서 사제단이 같이 기도하면서 살아있는 몸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할 것이다. 돼지 바베큐에 막걸리, 수제 맥주는 덤이다.
2022년 5월 8일(주일)은 김수환 추기경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때에는 전국의 모든 가톨릭 마라톤 동호회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자,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추기경님을 기억하며 달리고 싶은 모든 사람들을 초대해 ‘김수환 추기경 탄생 100주년 기념 마라톤 대회’를 열고 싶다.
추기경님의 생가가 있는 군위 용대리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에서 출발해서 어린 시절 추기경님께서 어머니가 언제 오실까 늘 바라보았던 ‘저 산 너머’를 뛰는 것이다. 여러 코스가 있겠지만 달리는 사람 모두는 군위읍을 거쳐 군위금성로에 들어서 뛰면 결승선이 보이는 저 멀리 사랑과 나눔공원에서 환하게 웃고 계신 추기경님을 바라보며 마지막 남은 땀과 숨을 기쁘게 바칠 것이다. 지금은 한 사람의 꿈이지만 하느님께 믿음을 가지고 달리는 모든 이에게 기쁘고 희망찬 꿈이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