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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가을의 자히르

#2008년 가을의 어느 오후


창가에 앉아있다. 늘 그렇듯 이 자리다. 카페의 구석진 창가 자리는 마치 나만의 작은 방처럼 편안하다. 잔잔했던 재즈가 끝나고,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흘러나온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테이블 위에는 반쯤 마신 아메리카노와 파올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가 놓여있다. 페이지를 넘기다 한 구절에서 시선이 멈춘다.



자히르란 눈에 보이는 즉시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되는 존재다. 그것은 서서히 우리의 생각을 잠식하다가 결국에는 미치게 만든다.



명백함. 보이는 것. 그토록 선명하게 보이기에 오히려 더 아픈 것들이 있다. 사랑이란 것도 그렇다. 집착이란 것도 그렇다. 강박처럼 남는 기억도 그렇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본다. 단풍나무가 서 있다. 붉게 물든 나뭇잎들이 하나둘 떨어진다. 노래 속 은행잎 대신 단풍잎이 춤을 추듯 흩날린다. 떨어지는 것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오늘따라 더 선명하게 보인다.


따스한 가을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와 테이블 위에 그림자를 만든다. 그림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모양을 바꾼다. 무심코 한숨을 내쉬지만, 그것은 우울함이 아닌 깊어가는 가을의 짙은 감성 때문이다.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면, 식어가는 커피 맛이 오히려 더 진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히르를 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놓치고 싶지 않아서, 잊히지 않기를 바라서, 혹은 잊고 싶어서. 그것이 사랑이든, 집착이든, 아니면 단순한 계절의 풍경이든.


윤도현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카페를 가득 채운다. 시계는 천천히 움직인다. 나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오늘의 이 순간들이, 이 선명함이, 이 노래가, 더 오래 머물러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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